어머니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며칠 전 나는 근래에 보기 드물게 기분 좋게 돈을 쓴 적이 있다. 내 한 달 수입의 10%가량을 한자리에서 썼으니 과지출이었으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시내에서 한우만 사용해 유명한 고기 집 입구에서 친구 내외와 친구의 부모님과 마주쳤다. 고등학교 동창인 친구는 가끔 만났으나 부모님들을 뵌 지는 벌써 30년이 훌쩍 넘었다.
고교시절 시내로 나와 자취를 하던 나는 주로 학교 인근 식당에서 밥을 먹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집에 가자고 해 아무 생각 없이 따라나섰다. 도착한 친구의 집에는 임금님의 수라상 부럽지 않은 저녁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 밥상에는 내가 좋아하는 돼지갈비에다 고등어구이, 고추튀김까지...
“얘야! 객지에서 고생이 많구나. 아들 친구에게 밥한 끼 제대로 해먹이지 못해 미안 하구나” 하시며 마지막으로 손수 국한 그릇을 떠 주셨다.
그날 받은 저녁상과 저녁은 지금까지도 가끔 생각날 만큼 내게는 감동을 준 한 끼 식사였다. 그 후 친구와는 다른 대학에 진학하고 가는 길마저 전혀 달라 겨우 4,5년에 한 번쯤 얼굴을 보는 정도가 됐고 더구나 어머니 아버지는 간혹 안부나 묻는 형편이 됐다.
최근 은행에 다니던 친구 녀석도 이른 명퇴를 했다는 소식을 들은 바 있는데 그날 바로 식당 앞에서 마주치게 된 것이었다.
그날 30여 년 만에 뵌 어머니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계셨고 아버님 역시 다리가 불편하신지 지팡이를 집고 계셨다. 단번에 나를 알아본 어머니는 휠체어에 앉아 계신 것을 잠시 잊으신 듯 벌떡 몸을 일으키려 하실 만큼 반갑게 맞아주셨다.
연세가 여든을 넘기셨으니 그 옛날 꼿꼿하시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지만 나도 순간 30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듯 잠시 어머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처녀시절 미스코리아 지역대회에 출전하실 만큼 미인이셨다. 학부모들이 학교를 방문하는 행사가 있을 때도 친구 어머님은 여러 어머니들 틈에서도 금방 눈에 띌 만큼 출중한 미모와 품위를 가지고 계셨다. 덕분에 친구 녀석은 반 친구들에게 “엄마를 반만 닮았어도...”하며 놀리곤 했다.
친구 녀석에게 들은 바로는 경찰이셨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반해 5년을 따라다니며 공을 들여 청혼에 성공했다고 했다.
병원 치료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 그 집에서 유명한 갈비탕을 포장해 가져 가려 들린 탓에 일행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자연스럽게 합석을 할 수 있었다. 친구 내외와 어머니 아버지도 흔쾌히 자리를 내주셨다.
친구의 말로는 어머님은 지난 3년여간을 요양병원에 계시다가 어제 막 퇴원을 하셨다고 했다. 서울의 집 정리와 아내를 설득하느라 3년 여가 걸리는 동안 요양병원에 모실 수밖에 없었다며 그럴 필요도 없는 내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는 어제 요양병원을 나온 분 같지 않게 얼굴이 밝아 있었고 기쁨에 혈색도 좋아 보였다. 실제로 어머니는 얼마나 어제오늘 기분이 좋으시겠는가. 아무리 시설이 좋은 요양병원이라 해도 그곳은 감옥과 같은 곳이다. 가족과 친지 특히 손자 손녀는 얼마나 보고 싶을 것이며 동네 친구들과는 얼마나 아울리고 싶어 하셨을까.
그동안의 안부를 묻는 어머니께 저희 어머니도 벌써 15년 전에 돌아가셨고 아버님은 3년 전에 여의었다고 말씀 들릴 때는 눈물을 보이셨다.
물론 친구에게는 내가 투석치료를 받으러 다닌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당부를 했고 스스로도 그런 상황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난 도중에 잠깐 화장실을 다녀온다는 핑계로 나와 먼저 계산을 했다. 고교시절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에 비하면 보잘것없지만 이렇게라도 그때 그 밥상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심정으로 기쁜 마음으로 계산을 할 수 있었다. 더구나 편찮으신 어머님께 이번 기회가 아니면 영원히 보답을 할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자리었는지 모른다.
그날 돌아와 누운 잠자리에서는 친구 어머님이 차려주신 그 옛날 진수성찬이 오래도록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