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여름, 가을

익어가는 계절

by 이뉴

동남아로 휴가를 떠나려고 알차게 준비하고 있었다. 티켓팅도 해두고, 호텔도 예약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날짜만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기대가 컸을까. 갑자기 회사가 바빠지면서 휴가가 잘려 버렸다. 조금 한가해지면 가라고 하긴 했지만, 사실상 못 가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매우 실망감이 커졌고, 분노로 가득 찼다. 납기일을 맞춰야 하는 일은 중간에 잠깐 짬이 날 때가 있다. 그때 친구랑 우연찮게 시간이 맞아 여름휴가로 남해를 다녀오자고 했다. 그런데 하필 태풍이 올라오고 있었다. 어쩌겠는가. 그래도 가야지.


다행히 비를 몰고 오는 날씨 요정인 필자에 대적한 말한 친구의 기운 덕분에 태풍이 올라오는 것인지 아닌지 잘 모를 정도로 날이 좋았다. 적어도 점심 식사를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기운이 금방 쇠해졌는지(?) 비가 미친 듯이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볼 것은 봐야 하고, 해야 할 것은 해야 하는 휴가에 미쳐 버린 사람들의 오기는 말릴 수 없었다. 쫄딱 맞으면서 숙소로 돌아갔을 땐, 그 친구도 나도 그냥 서로를 보고 웃으며 욕만 날렸다. 그래도 엄청 낭만적이었으니 대만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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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론이 사고 싶었다. 무일푼 수준으로 일하고 있던 때, 몇 달을 모아서 작은 드론을 하나 샀다. 교회 내 작은 다락방에서 숨 죽이며 설명서도 보고, 영상도 찾아보며 공부를 했다. 간신히 몸 하나 눕힐 공간에서 숨통이 트이는 순간이었다. 교회 근처 들판에서 몇 번 시 운전을 해보고 인천대공원으로 갔다. 가을의 인천대공원은 많은 사람들로 몰린다. 환상적인 단풍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연신 셔터를 눌러댄 뒤, 드론을 꺼냈다. 처음 사진 찍을 때 느낌이 났다. 무언가 이목이 집중되는 것 같았다. 웅웅대는 소리와 함께 손바닥보다 조금 큰 드론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평화로운 산책에 내가 방해가 되는 것 같았다. 쑥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핸드폰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래서 ‘드론 드론’ 하는구나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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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사실 뭐 별 것 있겠는가. 잘 먹고 잘 놀고 누가나 다 평범한 그런 일상들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 아니겠는가. 내 인생만 이렇게 힘들고, 내 인생만 이렇게 불쌍한 것인가에 매몰되면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었다. 아픔이 적어서도 아니고, 상처가 없어서도 아니다. 힘든 일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도 아니고, 경험이 적은 것도 아니다. 뭐랄까,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결국 이런 일들도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고 보면 모든 인생을 소중하고 특별하지만, 지극히 평범하다. 어차피 죽음으로 완성되는 인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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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 가을은 충분히 익어가는 계절이다. 곡식들은 태양의 강렬한 빛과 미친듯한 폭우 속에서도 버티고 버티어 내어 우리들의 밥상으로 올라온다. 학생들은 날이면 날마다 찾아오는 시험으로 머리를 쥐어뜯어가며 괴로워하지만, 그것이 곧 10대와 20대의 경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임을 깨닫는다. 직장인들은 1년 내내 수고한 나에게 물질로, 정신적으로 보상하는 계절이다. 그렇게 조금씩 익어가고 완성되어진다. 거창한 새해의 목표는 이미 세우는 순간부터 이루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몇 년 후에 보면 그 목표를 이루어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 이 모든 것이 익어가는 과정이다. 인생도, 경험도, 인격도 익어가는 이 좋은 계절은 소중하게 써야 한다. 나의 사진 생활도 느리지만 조금씩 아주 천천히 성장하고 있으니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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