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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뉴 Nov 09. 2022

가을이 뽐내는 색

나의 색

  쓸데없이 아침은 상쾌하고 저녁의 노을은 환상적이다. 오후 두 시의 하늘은 왜 이렇게 파란지 훌쩍 떠나고 싶게 만든다. 가을은 단연코 자연이 그들의 아름다움을 뽐내기에 가장 훌륭한 계절이다. 이 무렵 사람들은 산으로 들로 소풍을 나간다. 도로는 꽉 막히고 조금이라도 유명한 곳이라면 사람으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파가 몰리는 이유를 증명한다. 어느덧 다가온 가을을 부랴부랴 만끽하려면 한시가 급하다. 이내 겨울이 오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 역시 우리나라 사계 중 가을을 가장 좋아한다. 초등학생 때만 해도 나름 짧지 않았던 가을이 이제는 피부로 느껴질 만큼 짧아졌다. 더욱 애틋해졌달까. 짧은 만큼 더 좋아하게 되었다. 또한 가을은 색이 분명해진다. 봄에게는 추운 겨울을 뚫고 나오는 여린 잎들의 강인한 생명력에 반하는 반면, 가을에게는 겨울을 준비하는 그 모습에 반한다. 마른 잎이 되어 떨어지기 직전, 강렬한 색 한 번 보여주는 그 모습을 말이다.



  사람에게도 가을이 보여주는 강렬한 색만큼 뚜렷한 색깔이 있다. 사람은 모두 특별하고 귀한 존재들이기에 각자가 가지고 있는 색깔 역시 존중받아야 한다. 나는 지난 수년간 나만의 색깔에 대해 존중받지 못했다. 나는 대중적으로 어우러지는 색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나는 늘 따지고 물었고, 집단에서는 그것을 불평이라고 말했다. 오늘이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야 한다는 고귀한 가치를 지키며 살아야 한다고 믿었기에 최선을 다해 살았다. 그것은 겉보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다소 과할 수 있다고 나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쉬운 것과 어려운 것 중에서 대부분 어려운 것을 택하는 나를 사람들은 바보라고 불렀다. 어떤 책에서 말하는 '엑스트라 마일(extra mile)'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사회에서는 이런 나를 '센 사람'으로 몰아갔고, 그렇게 굳어져 몇몇의 집단에서는 '센'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 불편한 동행이 몇 해 째 이어지고 있다. 상사들 입장에선 골칫거리지만, 버리기는 아까운 계륵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얼마 전, 나의 이런 고민을 동료 형과 함께 나누게 되었다. 그 형은 나의 문제를 특별하게 보지 않았다. 서로 불편한 관계면 손해 보는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말이다. 전혀 공감되지 않았다. 해결도 되지 않았다. 당연한 것 아닌가? 결국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나에게 있다는 인식이 당연하게 깔려 있는데 말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러고 싶지도 않다. 나의 색깔을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는 사람들을 원망했다.  




  반대로 나는 그들을 색도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했다. 무색을 자처한 사람들. 보고도 못 본 척. 자신의 잘못을 타인에게로 전가하는 뻔뻔함. 차라리 이런 사람이라면 나쁜 사람이라고 여기고 말겠다. 무색의 사람들은 반응도 없다. 삶의 여유가 많아서 그런 것인지 그저 흘러가는 대로, 되는 대로 산다. 옆에서 보기에 고구마를 크게 한 입 베어 물고 목 막혀 컥컥되는 상황이다. 자신의 존재를 조용하게 지키고 있으니, 가히 사회에서도 건들 일도 낙인찍을 일도 없다.


  처음에는 부러웠다. 관계적으로 볼 때 그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단순히 내 기준에서만 흐리멍덩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가진 색을 유연성이라고 착각했다. 유연함은 현시대에 필요한 덕목 중 가장 중요한 덕목인데, 나에게서 그것은 찾을 수 없다. 시간이 지나 알게 된 사실은 무색은 유연함이 아니었다. '무'의 색을 가진 '그런' 사람일 뿐이었다. 오히려 유연함은 강렬한 색채를 지닌 사람에게 있다는 사실을 여러 책과 매체를 통해 배우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부러지지 않고 잘 살아온 것을 보면 나에게도 유연함은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 나는 색에 대한 고민이 많아진다. 사실 어떤 사람의 색깔에 대한 문제는 곧장 관계적인 부분으로 이어진다. 매사에 열정적인 사람이라도 다 좋은 평가만 받는 것은 아니고, 매사에 시키는 대로만 하자는 사람도 다 나쁜 평가만을 받는 것은 아니다. 관계적인 측면에서 좋고 나쁨은 명확하지 않다.  


  나는 과연 어떤 색깔을 가진 사람일까? 서로 다른 집단과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할 때 발생하는 색의 간극은 왜 생겨날까? 그렇게 스스로를 흔들며 살아온 날 수가 몇 년이다. 이게 맞는 걸까? 이래도 되는 걸까? 어느새 자신감이 뚝 떨어진 나의 풀 죽은 색깔은 이리저리 흔들리며 낙엽이 된다. 그것은 곧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불확신으로 바뀌어 더 조심스러워지거나 혹은 더 공격적인 사람으로 바뀌게 된다. 나의 잃어버린 색, 강렬했던 그 색은 가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나 보다. 그만큼 나만의 색을 갖는다는 것은 중요하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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