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지 않을 거예요

필로스

by 이뉴

‘예람워십’이라고 갑자기 유명해진 찬양 팀이 있다. 그들이 낸 찬양 중에 ‘혼자 걷지 않을 거예요’라는 찬양이 비-기독교권 음악 차트에서 1위를 한 적이 있다. 못 들으신 분들은 한 번 들으시면 좋겠다. 이 곡이 1위를 한 것에는 큰 의미가 있다. 기독교적인 가사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며, 교회에서나 불릴 법한 노래가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주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요즘 음악의 흐름이나, 에세이들의 흐름이 위로와 공감,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 극복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니, 이런 찬양 팀의 곡 하나에도 폭발적인 반응이 생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정은 ‘에로스’만큼이나 중요하다. 우정에 관련된 역사적인 많은 일들이 있었음을 우리는 수도 없이 많이 듣고 전했다. 일상생활에서도 친구는 가족만큼이나 중요한 관계이다. 하지만 좋은 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반대로, 내가 좋은 친구가 되어 주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마음도 잘 맞아야 하지만, 친구 간의 적당한 선을 유지해 주는 것도 필요하다. 또한 상호 간의 예의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학부 시절,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은 친구가 있었다. 저번 글에도 언급되었지만, 한 차례 사건 이후 나는 학교에서 좁은 인간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보니 소위 변두리에만 머물렀었다. 요즘 말로 ‘인싸’ 친구들과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 가끔 수업이 겹칠 때나 인사하는 정도가 다였다. 특히, 재수 없는 과들에 속한 엘리트 집단들과의 괴리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친구가 딱 그런 부류였다. 인사만 하는 친구로 지내다가 어떻게 가까운 친구가 되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나는 인생의 어지간한 풍파는 몸으로 깨부수며 온 사람이었고, 그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귀하게 자란 도련님이었다. 하지만 그도 인생의 여러 어려움들을 겪으면서 나름 생각이 많아지고 변하게 되었다. 그렇다 보니 인생의 어느 한 지점에서 딱 만나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만 할 뿐,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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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의 나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은) 몹시도 불안한 삶을 이어갔다. 단 한 번의 배부름과 부유함을 누려보지 못했고, 여기저기 뚫려 버린 구멍들을 메우며 살기에 급급한 처지였다. 그가 힘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와중에도 거의 매일을 찾아갔다. 폐인이 되기 직전의 상태여서 찾아가서 들어주기도 하고 놀아주기도 했다. 검단에서 서울 한복판을 오가며 나도 힘들었다. 하지만 그냥 마음이 시키는 대로 출근 도장 찍듯이 다녔다. 결국 그는 다시 재기할 수 있게 되었고, 깊은 수렁에서 살짝 올라와 인생을 그래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내 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나도 그와 만나면서 수렁에서 올라온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 일을 그만두어야 하나 싶었다. 박봉 아니, 거의 자비량(자비량은 교회의 목회, 교육, 전도, 선교 사역에 있어서 목회자 및 사역자가 교회나 해당 단체에 소속되거나 단독으로 활동할 때 어떠한 사례나 대가를 받지 않고 자신이 해결하는 방식을 말한다.) 수준으로 일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내 깨달았다. 이것이 내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변하고, 힘을 얻고, 다시 일어나는 모습을 통해서 나 또한 보람을 느끼고 더욱 경험이 쌓이는 것을 조망하면서 행복했다는 사실에 ‘천직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패의 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의 글 “나는 너의 위로가 필요하지 않아!”라는 글에서 나오듯이 그와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일련의 실패들이 더욱 단단해진 관계를 만들었다고 확신한다. 삶 속에서 만나는 수많은 어려움들과 그 지점에서 만나는 많은 관계들이 더욱 혼란스럽게 할 때도 많지만, 그래도 진정한 친구가 있다면 조금은 걱정을 덜어도 좋다.


그들이 당신과 함께 걸어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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