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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두리 Jun 09. 2021

내가 나일 때 좋은거다


토요일 아침, 일어나 가장 먼저 들은 말은 “엄마 놀자.”

보드 게임 하고 싶다는 아들에게 창고 구석에 있던 ‘인생게임’을 꺼내줬다. 생각보다 규칙도 잘 이해하고 예산에 맞게 어떤 집을 살지 고민하는 모습이 기특했다. 아들은 돌림판의 숫자가 큰 게 나올수록 좋아했고 앞서나가니 신나 했다. 연달아 5 이하의 숫자만 나와 한참 뒤에 있는 내 말을 보더니 한마디 했다.

“엄마 잘 살아봐~ 패한테 응원해달라고 하면 되잖아.”     


아침 겸 점심을 먹으며 배지영 작가의 『서울을 떠나는 삶을 권하다』를 읽었다. 전남 장흥으로 내려온 정원씨의 인터뷰 마지막에 이런 글이 있었다.

“여전히 바쁘게 살고 있지만 ‘바쁘게 살아가는 것이 열심히 사는 것의 동의어일까’ 하는 생각을 해요. 열심히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도 생각하구요.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데 필요한 게 뭘까 생각합니다. 더디지만 조금씩 내 삶의 알맹이를 찾아가고 있어요.”     


오후에는 서울 가는 버스를 탔다. 곧 결혼하는 친구의 청첩장을 받으러 가는 길이었다. 몇 년 만에 모인 대학동창 셋, 첫인사는 당연히 “요즘 어떻게 지내?”였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그동안 사회생활과 결혼, 육아에서 터득한 나름의 가치관을 나누며, 열띠게 토론했다.

우리 중 가장 똑 부러지던 한 친구는 요즘 경제책만 읽는다고 했다. 우리 같은 노동자들이 살 길은 주식이라며 ‘우량주에 장기투자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의 행복이 최우선, 자유로운 영혼의 다른 친구는 ‘결혼은 하지만 아이는 모르겠다’라며 만약 아이를 가지게 된다고 해도 독립적이고 창의적인 아이로 키우겠다고 했다.

군산에 살고 있는 나는 집값이 너무 올라 막막하다는 친구들에게 ‘서울을 떠나는 삶을 권했다.’ 그리고 군산의 매력이 얼마나 많은지 아냐고 외쳤다. 진짜 외쳤다. 그 때 좀 취해있었다.     


그 날 하루가 나에게 물었다. 잘 살고 있냐고. 아니, 내가 나에게 물었다. 지금 어떻게 살고 있냐고.     


다음날 나는 책장에서 김민섭 작가의 『대리사회』를 꺼내 읽었다. 김민섭 작가는 지방대 시간강사와 대리운전기사로 살아가며 겪은 ‘대리노동’의 현장을 기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대학교 사무실의 내 책상에는 펭수 얼굴과 함께 이런 글이 붙어있다.     


내가 나일 때 좋은거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삶의 기준은 ‘나를 잃지 않는 것’이다. 친구들에게 지방으로 오라며 외친 것도 원하지 않는 경쟁에서 멀어져 자신을 찾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는 의미였다.      


내가 나일 수 있었던 건 ‘나’라는 나무가 넘어지지 않게 하는 튼튼한 뿌리를 부모님으로부터 받고 그 힘으로 ‘혼자’ 잘 버텨왔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높은 곳에서 멀리 보고 있을 때는 그랬다. 그러다 문득 아래를 봤는데 말없이 지지대가 되어 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친정집에 갔다 돌아오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남편은 ‘좋은생각’을 사서 나에게 건넸다.


“에세이를 쓰면 이런 거 읽어야지. 투고해서 돈도 벌고 살림살이도 벌어와야 돼.”     


에세이 쓰기모임을 하고 집에 돌아가면 아들은  샤워한 뽀송뽀송한 얼굴로 나를 맞아준다. 거실바닥에는 개어진 빨래가 있고, 주방엔 스팸과 달걀 껍질이 있다. 남편은 그렇게 무심하게 나의 읽기와 쓰기의 시간을 응원하고 있다. 쇼파에 누워 야구를 보고 있는 남편의 엉덩이를 토닥거려준다.


또 내곁에는 약간의 실수에는 낙담하지 않는 힘을 물려주신 부모님, 일하는 며느리를 위해 흔쾌히 자신을 내어주시는 시어머니, 존재 자체로 내가 멋진 사람이어야 할 이유가 되는 아들, 나라는 사람 그대로를 좋아해주는 동료와 친구들도 있다. 남들과 비교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결코 알지 못했을 사실이다.      


앞으로도 내 인생의 주체는 내가 되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조금 느릴 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인생에 어떤 패가 있는지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어떤 공간에서는 대리인생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대로의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함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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