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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이 Oct 29. 2021

[교행일기] #78. 주인을 잃은 사무용품

주인을 잃은 사무용품


나뭇잎이 온전히 힘을 잃고 땅으로 바닥으로 떨어질 준비를 하려는지 알록달록한 색에서 갈색빛이 맴도는 불투명한 색으로 다들 변해 있었다. 앙상한 나뭇가지를 준비하기 위해 겨울을 그렇게 또 나기 위해 자연의 섭리에 따라 그들은 움직이고 있었다. 대비란 그런 것이다. 지난 1년이란 시간이 연이의 인생에서 참 굴곡진 삶이었다.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인생의 멀미에 속이 메슥거리기도 했고, 이제는 더 이상 못 버틴다고 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기도 했다. 그러다 다들 도움을 줘서 이제 살 만해졌다.


계절마다 느끼는 감정들이 다 달랐던 것처럼 다시 처음 마음이 있었던 계절로 돌아왔다. 연이는 주말 동안 쌓였던 책상의 먼지며 모니터, 키보드, 마우스를 물티슈로 닦으면서 책상 위에 올려진 작은 컵에 담긴 온갖 필기구에 눈이 꽂혔다. 그 컵도 누군가가 물컵으로 사용하다가 컵의 주변이 조금 깨지면서 필기구 통으로 변신한 것이었다. 1년 간 그곳에 있었는데, 연이의 눈에는 밟히지 않았다. 아니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저 마음에 드는 몇 개의 볼펜과 형광펜, 그리고 제일 중요한 4B연필만 있으면 하루 종일 일을 할 수 있었다.


손을 뻗어 필기구 컵을 연이의 눈앞으로 끌었다. 이면지를 두 어장 책상 위에에 깔고 필기구 컵을 엎었다. 모나미 볼펜부터 검정·파랑·빨강의 플러스펜, 언제 딸려 들어갔는지도 모를 클립 여러 개와 모양과 키가 다른 가위, HB 연필 몇 자루, 형광펜, 그리고 학교 행정실에는 쓰지 않을 것 같은 붓펜과 붓펜 잉크통,이 이면지로 쏟아졌다. 필기구 컵 안쪽 바닥은 이미 모나미 볼펜에서 나온 잉크가 흥건하게 흘러나와 있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단단히 굳어있었다. 흘러나온 잉크는 여러 필기구에 묻어 있어서 물티슈로 닦아냈고 필기구 컵은 버려야 했다. 하나씩 뚜껑을 열어 필기구 상태를 점검했는데, 하나같이 나오다 말고 형광펜은 이미 생명을 다한 지 오래였다. 두 어 자루만 사용 가능했다.


대대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필기구 통이 있던 자리에 3번 캐비닛에 사용하지 않아 잠들어 있던 오픈서류함을 놓았다. 맨 아래는 품의, 중간은 원인행위, 맨 위에는 지출결의. 이렇게 인쇄를 하고 아스테이지를 붙이고 그 뒤에 양면테이프를 붙여 서류함 칸 밑부분에 하나씩 자리를 배정해주었다. 생명이 다한 필기구 컵은 보내주고 잠들어 있던 서류함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연이가 OO초등학교에 있을 동안 잘 부탁한다.




ABOUT "교행, 학교다녀오겠습니다 시즌 3"


5년 전 연이가 교행직 합격 후 행정실에서 근무하면서 겪는 또는 겪을 만한 일을 '수필형 소설'로 작성한 글이다. 시즌 1(연이의 경험), 시즌 2(연이의 마음) 달리 연이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모든 것에 초점을 둔 시즌 3(연이의 기억)는 연이가 겪는 고민을 생생하게 전달하여 교행직을 그저 워라벨을 위해 들어오려는 공시생들과 교육행정직 공무원에 대한 궁금한 일반인에게 조금은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발행하고 있다.


#교행, #교육행정직, #교행일기, #학교, #직장생활, #연이, #따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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