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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이 Dec 04. 2022

[단미가] #16. 허공에 흩어진 '공허'

단어의 의미가 가슴으로 다가올 때 #16

허공에 흩어진 '공허'


순백의 끝이 없는 길이 펼쳐졌다. 바닥도 천장도 사방의 벽도 모두 하얘서 어디가 바닥이고 천장이고 벽인지 모를 경계가 모호한 그런 길이 연이 앞에 놓였다.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연이의 움직임을 집어삼킨 걸음은 이내 소리마저 하얗게 지웠다. 


여기는 어디일까? 현실이 아닌 것은 익히 알겠지만, 연이의 꿈속일까 무의식일까? 여하튼 이런 생각들이 하나둘 생길 때마다 이내 사라지고 없어졌다.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 무념무상의 상태가 된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런 생각조차 하지 않는 상태가 그 경지의 끝이 아니던가.


다리가 휘청했다. 현실로 돌아온 연이는 이내 벽을 짚었다. 뭔가 골몰을 할 때면 그 순백의 상태에 빠지곤 했지만, 요즘 들어 쉴 새 없이 찾아오는 통에 연이는 고개를 저으며 커피믹스로 정신을 차리려 하고 있었다. 커피 향이 잔의 김을 타고 공기 중에 흩어지고 있다. 


무언가 내주고 받지 못하는 그런 상태가 되고 나면 공허 그 자체가 온몸에 휘감으며 텅 비어버린 마음이 되어버린다. 


일찍 잠에 빠진 것도 아닌데 밤 한가운데 연이는 쉬 다시 잠에 들지 못했다. 화장실에 다녀와 방문을 열었는데, 방문 너머에 순백의 그 장소가 펼쳐졌다. 연이의 마음은 그곳으로 가지 말라고 하지만, 연이의 다리는 이미 방문 너머의 그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들어서고나자 방문은 스스로 닫혀 순백에 감춰졌다. 소리도 빛도 그곳에는 사라져 버리는 온통 하얀 세상. 일단 가보기로 했다.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 들리는 소리는 이곳에는 무음의 연속이 된다. 움직이고 있다고 느낄 뿐 진짜 움직이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보이는 것이 눈으로 보는 것인지 아니면 느껴지는 것인지조차 분간을 할 수 없다. 연이의 손도 발도 없는 듯하다. 이곳에는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은 의식의 흐름일지도 모르겠다.


한참을 그렇게 유영하듯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까지 보이지 않던 장면이 아니 한 아이가 보였다.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웅크려 앉은 아이는 그저 어깨만 들썩이고 있었다. 소리의 진동이 허용되지 않기에 그 아이의 울음소리는 연이에게 닿지 않았지만, 그 들썩임은 연이에게는 익숙한지 곧바로 그 아이의 슬픔이 전해졌다. 아이의 어깨를 토닥토닥해줬다. 아이가 연이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안겼다. 아이를 안은 연이는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 아이의 들썩임은 이내 수그러들었다. 

그 아이는 연이를 바라보았다. 연이는 고개를 끄덕여줬다. 한 번 더 품을 파고들고는 연이의 품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커피의 김은 아직 공기 중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연이는 그저 옅은 미소로 커피잔을 들었다. 

연이의 생각들이 공허 속에 흩어지는 것처럼 커피의 김은 공기 중에 빨려 들어 허공에 흩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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