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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이 Aug 26. 2021

[교행일기] #52. 문화 냉동인간

문화 냉동인간


"연 주무관님! 새로운 영양사님도 오셨는데, 퇴근 후에 우리끼리 조촐하게 차 한 잔 해요."


솔이 주무관이 연이에게 뜻밖의 제안을 했다. 오늘은 특별히 남아서 할 일은 없었기도 했고, 집에 돌아가면 또 원격으로 일을 할 게 뻔했다. 그것을 조금이나마 줄이려고 해도 남아 있는 일에 대한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뭔가 변화가 필요했던 차에 솔이 주무관님의 제안은 아주 매력적이었다.


모이는 사람은, 김 주무관님, 연이, 솔이 주무관님, 영양사님 요렇게 4명이었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아주 예쁜 카페가 생겼다며 거기를 장소로 정했다. 오전 업무를 시작하고, 점심식사를 했더니 벌써 3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학교에 있는 시간은 정말 빨리 간다. 그래서 일의 순서를 잘 정해서 해야지 안 그러면 이 일 조금 저 일 조금 하다보면, 오늘 한 일을 적어보면 오늘 하루 종일 뭐 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가 된다.


퇴근이 시간이 되자, 행정실의 모든 컴퓨터의 전원이 꺼져 있나 살펴보고, 문서 캐비닛과 이동서랍이 잠겨 있는지 확인을 했다. 그 사이 솔이 주무관님은 보안점검부에 최종 퇴청자의 사항을 기입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연이는 블라인드를 내려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도록 하고 행정실의 형광등 전원을 내리고 문을 닫아 자물쇠를 걸어 잠갔다.


낮시간에 퇴근할 수 있는 직업은 몇 되지 않는다. 급여는 사기업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적지만, 그것과 별개로 석양이 지는 예쁜 하늘을 보면 행정실에서 교문으로 걸어오는 내리막길은 연이에게는 이 직업을 선택해서 얻은 가장 소중한 선물이 되었다.


솔이 주무관님, 연이, 김 주무관님. 이렇게 조르르 옆으로 줄을 서서 교문으로 내려오니 영양사님은 교문과 가까운 곳에 급식실이 있어서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인천 2호선이 개통하고 학교 근처에 역이 생겼다. 학교 건너편을 가려고 학교 앞 사거리에서 신호등을 기다렸다. 아직은 뜨겁게 도로를 비추는 지고 있는 해를 피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새로 생긴 카페는 정말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연이가 그 사실을 몰랐던 이유는 있었다. 일단, 그곳이 카페인 줄 몰랐다. 이름이 낯설었다. 영어는 확실히 아니었지만, 프랑스어인지 아니면 이탈리어나 스페인어인지 알 수 없는 이름만 덩그러니 쓰여 있었다. 카페 문은 검은색 철제에 통유리로 되어 있어 무거울 줄 알았는데, 보기와는 다르게 가볍게 밀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어두운 시멘트색이 그대로 있고, 천정에는 배관이 다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기존 인테리어 상식을 넘어서는 독특한 양식인가 하는 생각이 들려고 하는데, 생각해보니 카페에 대한 정형적인 인테리어는 그저 TV 드라마나 영화의 정보가 전부라는 것을 연이가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서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메뉴판을 보는데, 커피의 종류가 그렇게 많고, 차의 종류의 가짓수가 다양한지도 그때 처음 알았다. 맞다. 그러고 보니 연이는 카페에 온 적이 없었다. 연이를 제외한 세 사람은 모두 자신이 마실 것을 골랐다. 마자그란, 카페봉봉, 코코넛 딜라이트. 연이는 어차피 다 모르는 것이라 그들이 고른 것 중 고르기로 했다. 뭔가 '딜라이트'라는 단어로 마시면 기분이 좋을 것 같은 그런 느낌에 연이는 그들을 따라 골랐다. 솔이 주무관님이 여기에 허니브레드까지 주문하고 각자 우리가 처음 자리 잡은 곳으로 돌아왔다.


잠시 후 나온 음료마다 예쁜 잔과 컵에 담겨 나왔고, 문양이 독특한 파란 접시에 허니브레드란 것이 올려져 있었다. 딜라이트는 마치 커피믹스를 타 놓고 얼음을 띄운 것 같았는데, 마시니 그 달콤함에 정말 기분이 좋았다. 커피도 마실 줄 몰랐던 연이가 학교에 와서 실장님이랑 점심식사 이후 커피믹스를 타서 마셨고, 지금은 코코넛 딜라이트를 마시고 있다. 그리고 난생처음 르쿠르제 접시에 허니브레드가 나온 것을 봤다.


그 접시 이름이 르쿠르제 접시인 줄도 몰랐다. 그냥 파란 접시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연이의 문화지식이 탄로 나는 시점이었다. 세 사람은 연이를 보며 놀라워했다. 사실 카페에 대한 기억도 없고, 허니브레드도 몰랐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것도 '터미네이터 2'가 마지막이었다. 그렇다. 연이는 '문화 냉동인간'이었다.


알바만 하던 연이가 공시생 생활이 길어지면서 사실 문화생활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요즘 트렌드도 잘 모르고 커피나 차를 좋아하지 않아 요즘 흔히 잘 나가는 공차, 스타벅스 이런 곳도 모르고 드마리스, 쿠우쿠우 같은 뷔페는 간판으로만 봤지, 뭐 하는 곳인지 몰랐다.


연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배우고 싶은 것에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나, 내가 관심 없는 분야에는 정말 어린아이처럼 모든 게 처음이었다. 르쿠르제, 허니브레드, 공차 등 이런 단어들에 생소함이 없는 사람들도 글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거나 종이와 펜으로 책상에 앉으면 뭐를 써야 할지 몰라 펜을 잡았다 놓았다 하는 것이랑 매한가지다. 그냥 관심사가 다르니까 연이에게 익숙한 일이 남들에게는 생소한 것이 될 수 있다.


연이는 그들을 통해 점점 문화생활도 배우고 또 한 번 성장하고 있었다. 문화 냉동인간이 해동이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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