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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이 Sep 15. 2021

[교행일기] #62. 쉽게만 생각했던 기록물 폐기

쉽게만 생각했던 기록물 폐기


단풍이 든 잎에 밤새 떨어진 기온에 이슬이 앉았다. 녹음이 푸르르던 열대야 풀풀 풍기던 찌는 듯한 더위에 활짝 고개를 든 푸른 잎들이 하나 둘 색을 달리하며 계절의 순응하고 있다. 언제 반팔을 입고 다녔나 할 정도로 기온은 하루가 다르게 겨울과 맞닿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그런 계절이 오면 열기를 내뿜던 계절이 생각나는 법이다. 내년의 여름을 생각하며 연이도 긴팔에 카디건까지 입고 10개월째 다니던 학교 가는 길을 따라 발을 옮기고 있었다.


학교에는 전자결재가 도입된 이래로 많은 기록물이 생산이 되지 않는다. 기록물이라고 해서 다른 것은 아니다. 컴퓨터로 처리되는 전자기록물과 전자기록물로 모두 대치할 수 없어 남아 있는 비전자기록물이 있다. 전자결재로 진행하지만, 모두 첨부파일로 넣어 진행할 수 없거나 지출결의서처럼 남겨놔야 하고 각종 점검일지나 보안점검부, 당직일지, 지문인식이 되지 않을 때를 대비한 초과근무 수기대장 등 전자가 아닌 비전자기록물이 존재한다. 이런 비전자기록물은 보존기간이 저마다 가지고 있다. 대부분은 5년이지만, 10년, 30년, 준영구, 영구도 존재한다. 이 중 대부분에 차지하는 5년짜리 보존기간을 가진 기록물에 대한 보존기간 만료로 폐기대상이 되는 경우 폐기가 될지에 대한 심의가 진행이 된다.


한 달 전 즈음 기록물 폐기 대상 목록 작성하는 공문이 왔고 전임자가 남긴 엑셀로 정리된 비전자기록물 대장에서 보존기간이 만료한 기록물을 보고 작성하여 공문을 보냈다. 며칠 전에 페기 기록물 대상이 선정이 되었고 그 선정된 기록물에 대한 폐기 날짜가 학교마다 잡혔다. 학교에서는 목록에 선정된 기록물을 일정한 형식에 따라 묶고 기입하여 폐기 날짜에 맞춰서 중앙현관에 내놓으면 일단 교육지원청에서 보낸 차량에 싣고 가고 기록물 담당자는 따로 폐기장소를 이동하여 폐기 목록과 실제 폐기기록물과의 대조작업을 통해 이상 여부를 또 한 차례 검사를 받아 최종적으로 폐기가 되었다.


연이는 폐기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출장을 상신했다. 대부분 혼자 가거나 사회복무요원을 동반해서 가는데, 연이가 신규이다 보니 실장님이 본인이 따라가 주겠다고 했다. 한편으로는 실장님이 가서 어느 정도 얘기를 해주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니 좋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실장님과 쌀쌀한 날씨에 동반하는 것이 떨림에 떨림이 있었다. 추위로 인한 떨림과 새로운 일에 대한 떨림과 실장님이 신규에게는 역시나 어렵기에 생기는 떨림이 공명효과를 일으켰다.


폐기장소는 초등학교가 있던 자리였다. 새로운 곳으로 이전을 하면서 남겨진 자리였는데, 비어 있어서 활용하기  좋은 장소였다. 버스를 타기도 하고 지하철을 이용하여 출근하던 연이와 달리 차로 출근하는 실장님의 배려로 편안히 춥지 않게 폐기장소로 이동을 했다. 새로 생긴 지하철역 근처에 위치한 곳에 아주 오래된 구식 건물의 이제는 철거될 초등학교 눈에 들어왔다. 회색빛과 빛바랜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 이곳저곳은 오래전에 학생들의 온기를 빼앗겨 버린 듯했다. 교문에 들어서자마자 연이의 눈에 보인 것은 운동장과 건물 사이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여러 줄로 놓인 수많은 기록물이었다. 어마어마한 양을 폐기해야 하는 학교를 보고 그나마 많지 않은 개교가 오래되지 않은 OO초등학교에 감사했다.


아직은 우리 차례가 아니라서 실장님은 교육지원청에 나온 분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연이는 OO초등학교의 폐기 기록물이 어디에 놓였는지 살폈다. 다행히 건물 안쪽에 놓여 있었다. 기록물 폐기 과정은 교육지원청 기록물 담당자가 혼자 진행할 수 없어서 교육지원청에서도 타과의 지원을 받았다. OO초등학교 폐기 기록물을 대조해주는 분들은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가 아직 안 온 모양이었다. 건물 내부는 퀴퀴한 냄새와 기록물로 인한 먼지가 자욱해서 연이는 잠시 밖으로 나와 신선한 공기를 맡고 싶었다.


차가운 공기가 폐 깊숙이 들어왔다. 아까 들어올 때 보았던 줄지어진 기록물 사이로 다른 학교 기록물 담당자와 교육지원청 기록물 담당자가 비교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폐기기록물 대상 목록과 일치하지 않는 기록물을 찾아 학교 담당자는 이 기록물과 저 기록물 사이를 바쁘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 사이에 연이를 부르는 실장님의 음성이 들렸다. 아마도 OO초등학교 차례가 되었나 보다. 30분가량 진행이 된 폐기기록물 대상 목록과 실제 폐기 기록물의 비교 작업은 그렇게 순식간에 맞춰졌다. 다행히 여러 번 학교에서 맞춰보고 와서 빠르게 끝났다. 3시 이전에 와서 3시 30분에 진행되어 4시 조금 넘어서 끝나 실장님 차로 움직이던 연이는 눈이 동그래졌다. 오전부터 연이가 끝마치고 갈 때까지도 아까 바쁘게 손을 움직이던 주무관님과 교육지원청 기록물 담당자는 그곳에 있었다.


학교 설립연도가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보존하는 기록물이 많아지는 것은 어쩌면 숙명이다. 연이는 쉽게만 생각했던 기록물에 대해 한층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고, 추운 날씨게 고생하던 그들을 뒤로하고 실장님의 제안이 들려왔다.


"연 주사, 추운데, 국밥 한 그릇 하고 퇴근하지?"




ABOUT "교행, 학교다녀오겠습니다 시즌 3"


5년 전 연이가 교행직 합격 후 행정실에서 근무하면서 겪는 또는 겪을 만한 일을 '수필형 소설'로 작성한 글이다. 시즌 1(연이의 경험), 시즌 2(연이의 마음) 달리 연이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장소에 초점을 둔 시즌 3(연이의 기억)는 연이가 겪는 고민을 생생하게 전달하여 교행직을 그저 워라벨을 위해 들어오려는 공시생들과 교육행정직 공무원에 대한 궁금한 일반인에게 조금은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발행하고 있다.


#교행, #교육행정직, #교행일기, #학교, #직장생활, #연이, #따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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