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리퍼 같은 편안함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아이가 벗어놓은 실내용 슬리퍼를 빨려고 보니, 아이의 발 모양에 맞게 닳아있었다. 슬리퍼를 신고 밖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집에서 기껏해야 신고 얼마나 걸었을까 싶은데, 매일 아이의 무게에 눌리다 보니 자연스레 닳아간 것이 신기했다. 하루하루 반복된 작은 힘이 이렇게 흔적을 남긴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했다.


어릴 땐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지겹고 또 지겨웠다. 핸드폰도 없고, 어린이 프로그램도 정해진 시간에만 방영되던 시절이라 더욱 그랬다. 학교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와 숙제하고, 또 자고. 그 단조로운 루틴이 나를 지치게 했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야 그 반복이 내게 안정감을 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일상의 지겨움 때문에 어린 시절의 내가 하늘을 바라보며 구름 모양이 어떤 동물을 닮았나 상상하기도 했고, 같은 패턴이 반복된 벽지를 멍하니 바라보기도 했다. 아버지가 가져다 준 ‘어린이새농민’이라는 잡지를 외울 때까지 읽다가 잠이 들기도 했다. 그 평화로움의 밑바탕엔 지루했던 일상이 자리잡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매일 달리며 조금씩 목표를 높여가는 과정을 이야기했다. 그는 스스로 대단한 마라톤 주자는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어제의 자신을 조금씩 극복해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장거리 달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경쟁자는 결국 과거의 자신이라는 것이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단어 하나 외우기도 어렵고, 수학 문제를 풀 때마다 막막하지만, 매일 조금씩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문제들이 더 이상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다. ‘어렵다’라고 생각했던 개념들이 점점 익숙해지고, 마치 내 발에 맞게 길든 슬리퍼처럼 편안해진다. 한 달, 두 달, 1년이 지나면 그 시간이 쌓여 분명한 변화를 만들어낸다. 신을수록 발 모양에 따라 형태를 바꾸는 슬리퍼처럼, 공부의 반복도 결국 힘이 된다.


나는 학창 시절 체육 시간이 있는 날이면 혼자 기우제를 지낼 정도로 운동을 싫어했다. 달리기는 느렸고, 뜀틀은 너무 높아 보였다. 대학에 가서 가장 좋았던 점이 체육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을 정도다. 젊을 때야 운동 없이도 괜찮았지만, 마흔이 되니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헬스장에 등록하고도 처음 여섯 달은 ‘오늘은 가야 하는데… 정말 가기 싫은데…’ 하는 고민으로 시간을 보냈다. 다녀오면 뿌듯했지만, 결국 미루다가 가지 못한 날엔 스스로 패배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다 문득 아이들이 공부하기 싫어하는 마음도 이와 비슷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에게 꾸준한 공부 습관이 중요하다고 닦달하던 내가 부끄러웠다.


어느 날, ‘할까 말까’ 고민하는 시간을 아예 없애기로 했다. 그 대신 아침에 아이들 식사를 차려주자마자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하기 싫다는 생각이 날 쫓아올 새 없게 헬스장으로 바삐 향했다. 너무 피곤한 날엔 ‘일단 가서 앉아 있다 오자’는 마음으로 나섰는데, 막상 가면 결국 운동을 하게 됐다. 무엇보다도 ‘오늘은 갈까 말까’라는 고민이 운동 자체보다 더 큰 스트레스였다는 걸 깨달았다. 반복은 몸에 익는다. 몸에 익으면 고민과 번민이 줄어든다.


공부도 그렇지 않을까. 중고등학생 중 공부 스트레스 없는 아이가 얼마나 될까.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을 보면 기계적으로, 고민 없이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목표가 뚜렷한 아이들도 있겠지만, 먼 미래의 꿈이 오늘의 자신을 책상 앞에 앉히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습관이 되고 루틴이 되면 시작하는 게 훨씬 쉬워진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은 진부하지만, 작은 습관 하나가 더 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옳다.


어른들이 지옥같은 출퇴근길을 견디는 것도, 해도해도 표나지 않는 집안일을 쳇바퀴돌 듯 하는 것도 그들의 학창 시절, 작은 반복을 통해 자기 통제와 인내를 배웠기에 가능한 것이라 믿는다. 누구도 반복의 힘을 피해 갈 수 없다. 성공한 연예인도, 사업가도, 운동선수도,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소설가도 마찬가지다. 모두 지루한 연습과 끊임없는 반복을 거쳐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다.


오늘 하루는 어땠냐는 나의 질문에 아이가 말한다. “엄마, 오늘도 어제같이 똑같은 하루지 뭐.” 나는 미소 지으며 대답한다. “그래. 지겹지? 하지만 그 하루가 쌓이면, 너도 너에 발에 꼭 맞는 슬리퍼를 갖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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