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이방인

이기주의 언어의 온도

날이 하루아침에 따뜻해졌다. 어제까지 분명 패딩을 입고 다녔는데, 오늘은 바람이 봄 냄새를 싣고 와서 콧속을 살랑거렸다. 사람들은 패딩을 벗어 팔에 걸친 채 걸어 다녔다. 구청 옆 주차장 도로. 주말엔 주차가 무료라 한산했다. 차도로 걷는 딸의 소매를 붙잡아 인도 안쪽으로 걷게 했다. 몇 걸음쯤 걸었을까. 인도 경계석에 한 청년이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덥수룩한 머리카락에 고개를 푹 숙인 청년. 봄바람이 불어도 그의 머리카락은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바스러질 듯 작은 체구의 어머니가 그 옆에 서서 아들의 뒷머리를 가만히 쓸어내리고 있었다. 아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은 꽤 오랫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은 듯했다. 청년의 손끝은 떨리고, 신발 끈은 풀려 있었다. 손등에는 무수한 상처 자국이 있었다. 그는 봄바람도, 따뜻한 햇살도, 세상이 돌아가는 속도도 느끼지 못한 채 자신만의 시간 속에 갇혀 있는 듯했다. 그는 어디에서 걸려 넘어진 걸까. 어느 돌부리에 부딪혀 이렇게 멈춰 서게 된 걸까.

봄바람에 날리는 어머니의 머리카락은 세월의 풍파에 단백질과 윤기를 빼앗긴 듯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져 있었다. 가장 센 파마약을 발라 세월을 붙잡듯 간신히 웨이브를 잡아놓은 듯했다. 봄바람이 불자 어머니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힘없이 흔들렸다. 그러나 아들의 뻣뻣한 머리카락은 봄을 거부하듯 미동조차 없었다.

청년의 존재가 마음을 시리게 했다. 그의 고요한 좌절 앞에서, 나는 문득 삶의 무게를 느꼈다. 그는 언제쯤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시간이 얼마나 흘러야 어머니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아들의 바지에 묻은 먼지를 털어낼 수 있을까.

작가 이기주는 『언어의 온도』에서 편찮으신 어머니가 링거를 다 맞고 안정을 되찾은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자기 소임을 다하고 장렬하게 사그라진 링거액이 대견해 보였다." 그리고 "자기 몸을 소진해 가며 자식을 살찌우고, 다시 일으켜 세우는 그 링거액이 부모라는 존재를 쏙 빼닮았다"라고 했다.

세상 모든 어머니는 죄인일지도 모른다. 자신조차 살아가기 힘겨운 이 세상에, 언제 어디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지 모르는 세상에, 벌거숭이 핏덩이를 내어놓은 죄. 걸음마를 하다가 넘어졌을 때, 자전거를 타다 넘어졌을 때, 장성한 청년이 되기까지 어머니는 얼마나 자주 아들의 머리를 쓸어내렸을까. 어릴 적의 아들은 엄마의 품에서 자신의 안전함을 확인하고 곧바로 다시 골목길을 내달렸을 것이다. 어머니의 품이 있는 한, 세상에 위험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런데 이제, 노인의 문턱을 넘은 어머니는 자식에게 해 줄 것이 없다. 더 이상 손을 잡아 일으켜 줄 기력조차 없다. 그래서 남은 단백질과 윤기를 짜내듯, 손끝으로 조용히 그의 머리를 쓸어내린다. 그 손끝의 따스함이 마지막 위로인지, 아니면 오랜 죄책감의 고백인지 나는 알 수 없어 마음이 먹먹해졌다.

책에서 이기주 작가는 어느 어머니가 발달장애가 있는 아이의 손을 끈으로 자기 손과 묶은 모습을 보고, 그 줄이 마치 히말라야를 오르는 산악인의 로프 같다고 했다. 그들만의 신성한 봉우리를 향해, 산악인들처럼 아득하고 특별한 여정을 걷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부모와 자식은 누구나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팽팽하게든, 느슨하게든. 자식의 아픔을 알아차리지만, 고통을 달래줄 방법이 없고, 부모의 노쇠함을 바라보며 가슴이 시리지만, 가는 세월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나는 그날의 청년과 어머니를 오래도록 떠올렸다. 삶이란 결국 이렇게 흘러가는 것일까. 간신히 일어선 우리를 기어이 주저앉히는 순간이 오고, 그 앞에서 부모와 자식은 서로의 끈을 붙잡고 서성인다. 언젠가 저 청년도 다시 일어설 것이다. 주저앉은 자리에서 긴 시간을 보내더라도, 언젠가 바람이 그의 등을 살며시 떠밀어줄 것이다. 어머니의 손길이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어 아들을 일으키고자 했듯이, 삶 또한 우리에게 그런 순간을 선물할 것이다.

"엄마. 저 남자분은 왜 저기 앉아 있을까? 힘든 일이 있나?"라고 묻는 딸아이의 손을 힘주어 꼭 잡았다. 아이도 대답하듯 손에 힘을 준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붙잡으며, 이 길을 함께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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