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 디톡스는 나의 힘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학부모들의 세계에서 ‘아이의 성적’은 곧 내 성적표이자 서열이다. 시험이 끝나고 성적표가 나오면, 엄마들 사이에서도 보이지 않는 줄 세우기가 시작된다. 학부모 모임에서 성적이 좋은 아이를 둔 엄마는 마치 자연계의 최상위 포식자처럼 군림한다. 그녀 주변에 엄마들이 몰려들고, 그들의 눈빛에는 간절함이 묻어난다.

“어떻게 공부시켜요?”

“학원은 어디 다녀요? 문제집은요?”

이 질문은 일종의 의식이다. 마치 신도들이 교주에게 비법을 구하듯, 성적 최상위권 엄마에게 던지는 찬양과도 같다. 하지만 대답은 늘 한결같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알아서 해요. 학원도 별로 안 다녀요.”


그 순간, 주변 엄마들은 ‘에이. 그럴 줄 알았다’하는 표정이다. 집에 와서 아이에게 슬며시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 엄마가 안 알려주는데, 네가 친구에게 슬쩍 물어봐.”


반면, 성적이 낮은 아이를 둔 엄마들의 존재감은 늘 희미하다. “어디 학원 다녀요?”라는 질문이 날아오면, “우리 애는 그냥 집에서 공부해요”라는 대답과 함께 대화는 끝이 난다. 아무도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더군다나 “우리 애는 공부보다는 다른 걸 좋아해요” 같은 말은 어딘가 이상한 분위기를 만들 뿐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떤 부모들은 아이의 성적을 자랑하지 않는 척하면서도, 은근히 흘린다.

“아니, 영어가 이렇게 쉬우면 등급은 어떻게 나눈다고 해요?”라든가,

“얜 맨날 실수해요. 이번에 문제 쉬웠는데, 실수로 틀리니 너무 속상하네요.”


겸손한 척하지만, 그 말속에는 ‘우리 아이에게 이 정도는 기본이야’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 말을 듣는 그 기본도 되지 못하는 엄마들의 마음에 생채기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아이들의 성적 줄 세우기가 있는 한, 학부모 세계에서 질투란 너무나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이제 비교하지 말고 내 아이에게만 집중해야지 하다가도 누군가에게 “이번 시험 정말 어려웠죠?”라고 묻는다. 이는 무심한 척하며 상대 성적을 떠보려는 것이다. “우리 애도 그 문제 틀렸어요”라는 말은 동질감을 가지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너희 집 아이는 몇 개나 틀렸니?’라는 계산이 깔려 있다. 이 정도면 질투가 아니라 스포츠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질투는 인간의 ‘마음의 평정’을 깨뜨리는 불행의 씨앗이다. 인간이 질투한다는 것은 스스로 얼마나 불행하게 느끼고 있는가를 말해 준다. 그리고, 타인의 행위를 끊임없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얼마나 권태에 사로잡혀 있는가를 보여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질투를 행복의 적으로 간주하여 이를 없애도록 궁리해야 한다.


오랜만에 가족들과 부산 여행을 갔을 때였다. 책 읽기만으로 명문대에 보냈다는 어느 아빠의 블로그에 새 글 알림이 왔다. 아이를 상위 몇 퍼센트로 만들어준다는 카페에서 컨설팅한다는 안내가 올라왔다. 이렇게 공부시키니 5등급에서 1등급이 되었다는 유튜브 영상도 올라왔다. 용궁사 경치에, 경포대 바닷바람에, 광안대교 야경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가족과의 소중한 시간이 집중하기 어려워 이 모든 알림을 꺼놓았다.


짧은 여행 후에 유난히 마음이 가뿐했던 것은 그것 때문이었을까. 나는 서울에 와서도 꺼놓은 알람을 켜지 않았다. 별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의 성적이 떨어진 것도 아니다. 학부모 모임에서 성적 이야기가 나와도 ‘그렇구나’ 하고 넘겼다. 아이가 친구와 성적을 비교해도 예전처럼 불안하지 않았다. 나의 질투 디톡스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쩌면 나의 모든 경쟁과 신경전은 아이들에게는 그저 주의를 분산시키는 배경 잡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부모가 주인공이라 착각하는 무대에서, 정작 아이들은 조용히 퇴장할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무대 뒤에서 부모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엄마 주연의 이 드라마, 언제 끝나지?’


질투가 불행의 씨앗이라면, 질투에서 벗어나는 것은 곧 행복을 향해 가는 길일지도 모른다. 그 길 위에서, 나는 조금 더 가벼워진 마음으로 내 아이를 바라보기로 했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아이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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