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방 _ 버지니아 울프
아이들이 어느덧 고등학교 2학년과 중학교 1학년이 되었다.
첫째를 낳기 전까지 갓난아이를 안아본 적도 없었다. 가까운 사촌도 없었고, 비교적 일찍 결혼한 터라 친구 중에서도 가장 먼저 아이를 낳았다. 첫째를 출산하고 퇴원해 조리원으로 갔는데, 마침 신생아실 소독 시간이라 아이와 단둘이 남겨졌다. 자고 있던 아이가 갑자기 큰일을 보고는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다. 그 날카로운 울음소리에 당황한 나는 여행 가방을 뒤져 기저귀를 찾았지만, 손이 덜덜 떨려 제대로 꺼내지도 못했다. 결국 나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다행히 조무사님이 달려와 울고 있는 모녀를 진정시키고 기저귀를 갈아주었다.
그렇게 며칠을 버티다 보니 어느새 본래의 성격이 돌아왔다. 시니컬하지만 명랑한 나는 수유실에서 다른 엄마들과 어울리며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퇴원할 때 조리원장님이 “입원할 때 걱정했는데, 잘 이겨내셨네요.”라고 말했다. 무슨 뜻인가 싶어 슬쩍 내 산모 차트를 보니 ‘우울감 있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날, 남편과 축하 맥주를 마시며 웃었다.
“내가 우울감이 있다고? 얜 하필 그때 큰일을 본 거야.”
첫째는, 지금으로 보면 믿기지 않지만, 그 시절 밥 안 먹기로 동네에서 유명했다는 아빠를 닮아 밥을 잘 먹지 않았다. 한 숟가락을 먹이려면 노는 아이를 따라 집안을 돌아다녀야 했고,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는 한 숟가락 삼킬 때마다 모두 손뼉을 쳐야 했다. 몸무게가 작게 나와 정밀검사 대상이 되었던 딸을 보며 나도 덩달아 입맛이 떨어졌다가도 또 허기져 허겁지겁 밥을 먹으며 ‘자식새끼는 안 먹어서 걱정인데, 엄마란 사람은 밥이 넘어가나.’라는 생각에 울다가도 웃곤 했다.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잠도 쉽게 들지 않는 작은 아이가 눈물과 발버둥으로 의사 표현을 하는데, 초보 엄마인 나는 그걸 이해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아이와 단둘이 있는 시간이 두려워지기까지 했다. 게다가 결혼 후 낯선 동네로 이사 와 지인 하나 없이 지내면서 외로움까지 더해졌다. 답답한 날들이었다. ‘국방부 시계가 가듯 육아 시계도 가겠지.’ 자신을 다독였지만, 아파트 방범창이 감옥의 창살처럼 느껴지던 날, 비로소 나도 산후우울증을 겪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자 낯을 가리는 ‘시니컬한 명랑녀’였던 나도 아이 친구 엄마들을 사귀고 조금씩 외출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야 숨통이 트인다 싶던 어느 날, 둘째가 찾아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모셔 왔다고 해야 하나.
철없는 나와 아이까지, 아이 둘을 키우는 기분이라던 남편은 그 와중에도 둘째를 간절히 원했다. 생각보다 아이가 쉽게 생기지 않자, 여행을 겸해 경주의 한 유명한 한의원에 가자고 졸랐다. 한의사 선생님은 첫째가 딸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대뜸 “둘째는 아들이 좋겠네.”라며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약을 지어주었다. 혹시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생리 기간에 먹으라며 보너스 약까지 챙겨주었다.
“아이가 바로 생기면 보너스 약은 필요 없을 테니, 보내주시면 환불해드려요.”
남편과 나는 한의사 선생님의 자신감에 눈을 마주치며 몰래 웃었다. 그러나 약을 다 먹기도 전에 둘째가 생겼고, 우리는 정말 약을 택배로 다시 보냈다. 그리고 몇 주 뒤, 산부인과 의사선생님이 파란색 옷을 준비하라고 말해, 우리 부부를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십여 년 후, 유명한 영화감독이 어느 유튜브 프로그램에 나와 그 한의원에서 약을 지어 아이를 가졌다고 이야기했다. 우리가 갔던 이후로 한의원은 더 유명해졌고, 이제는 약을 지으려면 텐트를 치고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한다. 첫째를 키울 때 그렇게 두려웠던 아기와 단둘이 남겨지는 시간이, 둘째를 낳고 나니 기다려지는 휴식 시간이 되었다. 사람은 필요한 순간이 오면 양손, 심지어 발까지도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존재라는 걸 그때 알았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라는 말을 온몸으로 체험한 시기였다. 한 손으로 정수기에서 물을 따르고, 다른 손으로 어깨에 둘째를 둘러멘 채 트림을 시키는 게 가능했다. 첫째 학원 대기실에서 유모차에 탄 둘째와 함께 졸기도 했다.
갑자기 동생과 엄마를 공유하게 된 첫째와, 엄마 손이 있어야 하는 둘째 사이에서 나는 매일 같이 줄다리기해야 했다. 너무 지쳐서 ‘나는 혼자만의 시간이 꼭 필요한 사람이다. 나만의 시간이 절실하다.’라고 스스로 되뇌었다.
그렇게 십수 년이 흘렀다. 어느새 아이들은 고등학교 2학년과 중학교 1학년이 되었다. 둘째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될 즈음부터는 아이들이 내 손을 덜 타기 시작했고, 나는 오랜만에 자유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시간이 주어지니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 끝은 허무함과 쓸쓸함이었다.
지난 20년 동안 나는 ‘이지영’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살았다. 그토록 찾고 싶어 했던 자유 시간은 생각보다 달갑지 않았다. 이미 전 직장에서 잊힌 지 오래고, 그동안 불린 ‘누구누구 엄마’라는 이름마저 반납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두 아이의 입시라는 마지막 관문. 하지만 그것도 결국 아이들이 넘어야 할 산이다. 내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은 먹을 것 챙겨주는 것과 라이딩 정도뿐, 아이 공부에 깊이 관여하려 할수록 아이와의 사이가 삐그덕댔다. 그러니 한 걸음 물러서서 그 과정을 지켜볼 차례다.
이제는 ‘이지영’이라는 나의 이름을 되찾아야 할 시간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듯이 “여자가 글을 쓰려면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아이들이 자신의 방을 찾아 떠날 준비를 하는 동안, 나도 내 방을 찾아 떠날 준비를 해야겠다. 그 방에서 비로소 ‘누구누구 엄마’가 아닌, 오롯이 ‘나’로 살아갈 수 있기를.
울프는 또 여성들에게 격려의 말을 건넸다. "아무리 하찮거나 방대한 주제라도 망설이지 말고 어떤 종류의 책이든 써보라"고, "여행을 하고 한가하게 지내며 세상의 과거와 미래를 생각해 보고 책을 읽고 공상에 잠기라"고. 그녀의 말처럼, 이제는 나를 위한 시간을 만들어보려 한다. 학교 앞 카페에서 책을 읽고,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고, 그동안 미뤄두었던 글쓰기에 도전해 볼 생각이다. 아이들이 자신의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동안, 나도 내 날개를 다시 찾아 하늘을 올려다보려 한다. 이제 진짜 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