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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 Apr 25. 2022

시간의 기록을 담는 아름다운 노트- 스마이슨과 렛츠

7학년 새 학기의 시작과 함께 학교에서 스터디 플래너를 받았다. (공기관에서 뭐든 학생들에게 좋은 것을 줄 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학교에서 나누어주는 모든 종이류는 재생지였던 것이 당연했던 나에게 새하얀, 색색의 다양한 A4 종이에 예쁘게 인쇄된 유인물을 나누어 주는 것만으로도 놀라움이었는데 그 스터디 플래너는 정말로 나에게는 문화적 충격이었다. 기존의 노트 사이즈와는 다르게 조금 더 큰 사이즈의 크기에, 겉 표지가 상하지 않게 플라스틱 커버가 씌워져 있었고 그 안은 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일러스트가 가득한, 좋은 질의 노트였다. 학생들은 그 안에 과제를 기입할 수 있었고 나머지 공간에는 원하는 것들을 쓸 수 있었다. 일 년 내내 그 노트를 신줏단지 모시듯 들고 다니며 단 한 번도 글씨를 날리지 않고 곱게 사용해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대로 들고 있었다. 그전까지 나는 한 번도 노트를 끝까지 써 본 적이 없어서 늘 혼이 났었다. 노트는 쓰다 보면 절반을 넘기기 전에 새것을 쓰고 싶었고, 쓰다 남은 노트가 쌓여있었다. 나는 자라면서 오해를 많이 받았다. 타인에게도, 가족을 비롯한 주변 어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미움을 많이 받고, 사랑받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를 정확하게 파악한 어른이 없었다.(모두가 내 에너지를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었던듯싶다) 내가 나이가 들어가며 내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서 나도 이제서야 과거의 나를 조금씩 이해하는 중이다. 내가 불성실하거나 물건을 함부로 써서가 아니라 무언가 망가지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글자가 틀리거나, 글씨체가 나빠지거나, 노트의 표지가 상하면 나는 그 노트가 더 이상 쓰기 싫어졌다. 활발하고 부주의했기 때문에 일반 노트는 너무 쉽게 망가졌지만 미국 학교에서 나눠줬던 스터디 플래너는 튼튼했다. 스프링도 쓰다가 삐져나오거나 변형이 없었고 튼튼한 플라스틱 커버가 있었기 때문에 겉도 상하지 않았다. 종이의 질도 좋아 중간에 찢어지지 않아서 일 년을 사용했는데도 끄떡없었고 무엇보다 예쁘고 귀여운 디자인 때문에 오래오래 아껴 쓸 수 있었다. (나는 백 프로 마음에 들 때 그 물건을 아끼는 것 자체를 즐거워한다.) 그를 시작으로 나는 굉장히 열심히 계획을 필기를 하는 습관이 생겼다. 학교를 졸업하고도 그 습관이 계속되어서 매일 일과 시작 전에 그날의 스케줄을 필기하고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도 시간 단위로 필기해서 남기는 그 시간은 나의 하루의 소소한 즐거움이다. 

도쿄에서 처음만난 렛츠 다이어리

2017년 11월 도쿄에 갔을 때 긴자 이토야 스토어에 갔었다. 연말이라 다이어리들을 판매하고 있었고 거기서 렛츠 다이어리를 처음 만났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은 남색인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예쁜 글자가, 또 한 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조합인 남색에 금색 글씨 조합이라 다른 것은 볼 필요도 없이 그것으로 정해서 용도별로 여러 개 구매했다. 한 해 동안 너무 만족스럽게 사용해서 그 다이어리 구입을 핑계로 그 다음 해도 다이어리를 구매하러 도쿄에 갔다. (렛츠 다이어리는 영국 브랜드이다. 다 핑계인 것이다) 그다음 해는 검은색으로 구매했고, 또 그 다음 해는 빨간색으로 구매했다. 그 해에 구입하는 노트들은 다 같은 색으로 구매해서 사용해왔기 때문에 색상만 보더라도 언제 썼던 노트인지를 알 수 있는데 그렇게 쌓인 노트들을 한 군데 모아두면 눈으로 느껴지는 시간의 흐름은 마음으로 느껴지는 것과는 또 달랐다. 렛츠 다이어리에는 매우 다양한 종류의 다이어리를 구매할 수 있고 일반 노트도, 특수한 목적을(5년 다이어리, 여행, 게스트 북 등) 가지고 쓰는 노트들도 많다. 재질과 색상도 다양하고 세일 기간을 이용해서 직구를 해도 좋다. (일본에서 판매되는 렛츠 다이어리는 일본 지하철 노선, 공휴일 등이 일본어로 쓰여 있고, 직접 구매를 하면 영어로 쓰여있다) 

스마이슨의 노트, 다양한 글귀가 새겨진 표지가 매력이다.
스마이슨의 나일블루 다이어리

원래 가장 좋아했던 다이어리는 영국의 스마이슨 (Smythons) 의 제품이었다. 지금도 스마이슨의 제품을 무척 좋아하고 노트도, 작은 소품류도 모두 즐겨 쓴다. 스마이슨의 제품은 렛츠 다이어리보다는 더 고가이고 만듦새도 다르다. 렛츠 다이어리는 매우 잘 만들어진 깔끔한 기성품의 느낌이고 스마이슨의 노트는 완전한 핸드메이드 느낌의 제품이다. 종이의 질감도 다르다. 렛츠 다이어리는 일반적인 좋은 질감의 종이이고, 스마이슨의 노트는 매우 얇은 종이인데, 살짝 푸른빛을 띄고 있고 종이를 넘길 때 스마이슨의 로고가 우아하게 비치며 얇게 금박이 씌워진 테두리는 노트를 덮었을 때 노트의 위, 아래 그리고 옆쪽을 아름답게 빛내준다.(굉장히 간지러운 표현인데 정말 그러하다) 노트 안의 글씨체도 렛츠 다이어리보다 더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한눈에 영국 제품의 느낌 ( 나의 주관적인 느낌이다)을 느낄 수 있다. 다양한 디자인과 색상을 고를 수 있고, 양가죽이지만 쉽게 상하지 않게 가공되어 부드러우면서도 내구성이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 스마이슨을 상징하는 나일블루는 너무 아름다운 색인지라, 그리고 ‘예쁜 글씨’를 정말로 좋아하는 나에게(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예쁜 글씨가 쓰인 모든 것이다) 섬세하게 쓰인 반듯한 스마이슨의 서체는 너무나 매력적이다. 다이어리나 다른 제품들을 구매하면 나일블루 컬러의 상자에 넣어서 남색 리본으로 포장을 해 주는데 그 아름다움은 정말 압권이다.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하나로 모아놓은 브랜드이다.) 각 나라를 대표하는 브랜드들은 그 브랜드 고유의 색도 있지만 만들어진 나라의 정서도 어느 정도 반영이 되어 있다. 프랑스의 에르메스, 이탈리아의 페라가모, 캐나다의 룰루레몬, 미국의 나이키, 그리고 영국은 스마이슨이다.(버버리 미안하다. 요즘 버버리는 더 이상 예전의 버버리가 아니다. 버버리 프로섬을 없앤 순간 내 마음속 버버리는 죽었다.) 깃털처럼 가볍다고 표현해둔 종이는 너무 아름답지만 사실 너무 얇아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을 줘 글자를 세게 쓰면 앞 장의 펜 자국이 보이기도 하고,(잉크는 비치지 않지만 눌러쓴 흔적이 남는다) 무엇보다 쓰기가 너무나 조심스럽다. 나는 기능보다는 아름다움이 우선이 되는 사람이라 그것이 불편하거나 싫지는 않지만 누구나 좋아할 만한 제품은 아니다. 렛츠 다이어리는 합리적인 가격에 단정한 매력이 있는 제품이고 누구라도 쉽게 사용할 수 있고 여러 권 구매해도 크게 부담스럽지 않아 스마이슨보다 쓰는 재미는 덜 해도 그 만의 매력이 있다. 

나의 첫 스마이슨 노트. 지금은 보이지 않는 로얄블루 색이다.

시간이 지나면 남는 것은 사진이라고 한다. 사진도 일기장도 잃어버리거나 버리면 그만이지만 지나간 시간의 물리적 증거가 남아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위안이 될 때가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흐려지는 기억도 있고, 더 뚜렷해지지는 않아도 존재의 부재가 더 날카로워지기도 한다. 지나간 시간을 붙잡고 어쩔 줄 몰라 했던 때가 있었다. 인식론 강의 시간에 후설의 현상학을 배울 때 한순간을 기점으로 내 시간이 영원히 두 갈래로 쪼개어지는 것 같은 경험을 했다. (망치로 얻어맞는 것 같다는 표현은 이래서 나온 것 같다. 정신 차리라고 망치로 얻어맞고는 두 동강이 나 그제서야 제대로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다.) 시간이란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줄기 같아서 내 과거와 현재가 모두 하나로 이어져 있고 끊임없이 계속된다는,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로부터 단절된 것이 아니며 나의 과거의 총합이 곧 오늘날의 나 이니 지나간 시간을 붙잡으려는 발버둥을 멈추어야겠다 생각했다. 지나간 시간을 붙잡고 어쩔 줄 모르고, 지나갈 시간을 붙잡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것은 지금도 비슷하다. 그러나 예전만큼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무너져서 모든 것을 놓치지는 않는다. 물줄기를 멈출 수도, 잡을 수는 없으니 지금의 내가 내 지나간 모든 시간과 추억의 증명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며, 오늘의 내가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사랑하는 할아버지의 살아있는 유산이라는 것을 위안 삼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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