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같은 시작, 다른 항로

by 츤데레달언니

우리가 인연을 만나는 것은 대부분 학창 시절이나 회사, 동호회처럼 어떤 소속을 통해서다.
그간 나의 소속은 중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회사였다.

회사를 떠나고 보니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대부분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되고,
일부만을 나의 궤도 안에 남겨두는 연습을 하게 되었다.
그때, 이상하게도 모여준 회사 친구들이 있다.


같이 일해본 적은 없다.
우리는 그룹 공채로 같은 시기에 채용되어, 각기 다른 계열사에서 회사 생활을 시작한 동기들이다.
동기들이지만 나를 제외하고는 일찌감치 퇴직해 이미 다른 길을 걷고 있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의 대화가 종종 수십 년 전의 추억에 머무는 것과 달리,
이 친구들과의 대화는 늘 현재형이다.
회사 생활의 시작, 결혼과 육아, 퇴사와 커리어 전환, 각자의 성장과 흔들림.
아이들을 성인으로 길러내는 일, 남편의 은퇴를 지켜보는 아내의 시선,
50대 중년 여성으로 갱년기를 건너는 이야기, 부모님의 병구완,
그리고 언젠가 맞이할 우리의 노후까지.

삶의 단계마다 자연스럽게 공감대가 쌓여 있다.


회사 생활을 같이 시작했기에 우리는 늘 곁에 있지는 못했어도,
각자의 인생에서 중요한 이벤트나 ‘게이트’ 앞에서는
서로가 어떤 삶을 마주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정확히 32년 전 2월,
우리는 S그룹 여성 공채 해외영업 부문으로 뽑혀 한 달간 합숙 교육을 받았다.
아침 구보, 분임토의, 시험, 지방 출장, 마지막엔 수십 km 행군까지.
그 한 달은 꽤 진했다.

그 시간을 함께 버틴 뒤, 우리는 각 계열사로 흩어졌다.
은재는 전자, 제니는 화학, 경희는 물산으로 배치되었다.


그 시절 동기들 중에는 해외에서 자란 친구들이 많았다.
나는 한국 밖이라곤 어학연수 말고는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틈에서 잘 섞여 있었다.
아마도 그때의 나는, 잘 적응해야겠다는 마음 하나로
사람들 속으로 더 들어갔던 것 같다.


회사에 배치된 뒤에도 우리는 꽤 자주 만났다.
각자의 회사 이야기, 처음 만난 상사 이야기, 설레는 연애 이야기까지.
끈끈하게 엮여 있던 시간들이 분명히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그땐 “회식도 회사 생활”이라며 매일같이 자리에 앉아 있어야 했고,
술은 마시되 취하지 않은 척하는 기술을 다들 연마하고 있었다.
그 시절은 정말 지금과 달랐다.


제니는 해외영업 사원으로 일하다가 어느 날 홀연히 사표를 쓰고
통역대학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동시통역사로 바쁘게 살다가 남편을 따라 해외를 오가며 지냈고,
지금은 한국에 정착해 자기 세계를 단정하게 지키며 살고 있다.
최근에는 퇴직 후 집으로 돌아온 남편을 양팔로 안아주며
“그동안 고생했어”라고 말해주었다고 했다.


은재는 나와 같은 전자에서 영업을 하다 퇴사 후 미국으로 떠나 MBA를 마쳤고,
돌아와 HR 임원이 되었다.
지금은 퇴직 후 전문 코치로 새로운 커리어를 살고 있다.
늦둥이 딸이 수험생이라 올해는 일을 조금 줄이고
딸 뒷바라지를 하겠단다.
돌이켜보면 나는 바빠서 딸 수험생 시절에도
크게 신경 써주지 못했는데, 그 이야기가 유난히 부러웠다.


경희는 워킹맘으로 가정과 일을 타고난 계획성으로 잘 꾸려가다,
주재원으로 파견된 남편을 따라 싱가포르에 살았다.
귀국 후에는 아들을 위한 대치동 생활을 무사히 지나왔고,
그 장성한 아들은 지금 모 대기업에 취직해
우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경희는 지금도 바지런히 오전에는 성당 봉사를,
오후에는 지역에서 이름난 영어 강사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입사 후 초반 몇 년을 자주 만나다가,
각자 해외로 흩어지며 5년에 한 번쯤 얼굴을 보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온전하게’ 다시 만나기 시작한 것은
내가 퇴직한 이후다.
벌써 3년이 되었다. 퇴직 이후에야 가능해진 시간들이다.

이 만남은 우연으로 시작했으나, 결국은 필연이 되고 있다.
이 모임에는 이해관계가 없다.
각자 삶을 나누고, 서로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해주는 모임이다.
그래서 우리는, 만날 수밖에 없다.


우리는 3년 전 모임 이름을 “블루”라고 정했고,
2년 후 함께 해외여행을 가기 위해 매달 회비를 모으고 있다.
참고로 ‘블루’는 파란 피 같은 거창한 뜻은 아니다.
그날 조니워커 블루를 마시다가, 그냥 그렇게 정해졌다.


회사를 떠나며 나는 많은 관계와 헤어질 결심을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헤어질 결심을 하는 순간 다시 만나게 되는 인연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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