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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은 Feb 19. 2024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

이우환 <관계항>

새해가 되어 나이를 세어보던 참이다.

엄마로 14년, 교사로 16년 차. (본투비 나이는 넣어두자)

'일만 시간의 법칙'에 따르면 전문가가 되고도 남을 10년이 훌쩍 넘었다.


한 가지를 꾸준히 했으면 지금쯤 뭐가 되어있어야 하지 않은가?

뭘 꾸준히 하긴 했다. 매일 읽고 쓰는 일.

뭐가 되긴 됐다, 브런치 작가라는 것.


한 가지를 꾸준히 하며 나이가 든다는 것은 꽤 멋진 일이지만, 관심 있는 것에만 뇌회로가 정교화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멋진 중년과 꼰대는 종이 한 장 차이인 것이다.




교사이자 엄마로 10년 이상을 살아온 나에게도 몸에 밴 몇 가지 꼰대 같은 언어 습관이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아이들이 모르는 문제를 물어오면 되묻는 습관.

"뭐라고 쓰여있어?"

"그게 무슨 뜻일까?"

"소리 내서 읽어봤니?"

누군가는 아이들의 메타인지를 자극하는 훌륭한 습관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성질 급한 직진형 인간인 첫째는 이런 종류의 느긋함을 질색하는 것이다.

"아니 엄마! 그만 물어보고 그냥 알려내라고!!"

따라서 이 습관은 첫째의 편도체(파충류의 뇌라고도 함)를 자극하는 습관이라고 해도 좋겠다.


또 하나는 아이가 선택했다고 믿게 만드는 교묘한 대화 기술이다. 일종의 교육적 가스라이팅이랄까?

예를 들면 일단 나가고자 마음먹었다면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나가지 않을래? “라고 묻지 않는다.

“날씨가 참 좋네. 나가서 뭐 할까? 놀이터? 도서관?”라고 묻는 편이 훨씬 낫다.

“안 나갈래요!”를 원천 차단하는 방식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무한한 선택권을 주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편이다.

"네가 알아서 해!"

그 말은 나에게 무책임의 동의어처럼 느껴진다.


아이들이란 무한한 자유 속에서 불안을 느끼는 존재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해 준 그림이 있다.


장욱진, <강변풍경(세한도)> (1987)


제목조차 세상 한가로운 <강변 마을> 이건만, 아이들은 쓰나미가 와서 집을 덮칠 것 같다고 했었지...




"알아서 해!"와 "나를 따르라!" 사이 그 어디쯤에 어른의 적당한 권위가 있고, 아이들이 자유와 책임이 실험할 안전한 공간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편하고 익숙한 것에 점점 더 관성이 붙어 더 많은걸 내 마음대로 하려고 들 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거 다 안 하면 저거 못해!"

"나중이 어딨어? 지금 해야지!"

"수고를 해야 휴식이 달콤한 거야!"

단정적이고 여지를 두지 않는 내 말투가 영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했다.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


이 경직된 사고의 틀에서 나는 과연 자유로운가?


이 질문을 돌직구처럼 날린 작가가 있다.


이우환 <관계항> (링크로 대신합니다)


진짜 돌이다.

작가는 철판 위에 돌덩이를 던져두었다.


인간은 범접할 수 없는 자연의 시간이 층층이 쌓인 돌과, 그 돌에서 추출된 성분으로 인간이 가공한 철판의 만남. 작가의 예술적 의도가 아니고서는 당최 어울리지도 않고 이상하기 짝이 없는 만남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관람객인 우리가 주눅 들 필요는 전혀 없다.

휙 지나가버려도 모를 장소에 무심히 놓인 돌과 철판을 비웃지 않고 진지한 시선으로 멈추어 서면 일단 성공이기 때문이다.

이 범상치 않은 철판과 돌덩이의 관계를 묻기 시작하는 것이 관람의 시작이고, 관객들이 관계를 사유하는 무모한 애씀은 이우환 작가의 예술적 소재가 된다.


공간 사이로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햇살이 비치고, 내가 지나가고, 당신이 지나갈 것을 상상하다 보면 결국 이 작품은 거대한 우주에 먼지 한 톨만도 못한 존재인 나를 끌어들이고 만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천재 작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발꿈치를 들어 올리며 비루한 셀카를 찍던 그때도 나는 분명 한 톨의 초라한 먼지였다.  

하지만 이 작품은 "자네는 참 고귀한 먼지라네!"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이 어색한 조형물 앞에서 이상하게 편안해지는 마음은 그렇게 설명해야 마땅할 것이다.  



이우환 작가에게 돌은 그저 돌이었다. 감히 지나온 세월을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소재.

그래서 돌이다. 우리에게 의미를 함부로 재단하지 말 것을 주문하는 소재.


좋은 것, 나쁜 것, 네 편, 내 편, 고귀한 것, 천한 것.

모든 것을 구분하는 습성이 있는 우리의  좁은 시야를 잠시라도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는 묵직한 공간,  통제할 수 없는 지점을 온몸으로 인정하게 하는 <관계항>은 부산시립미술관에 가면 상설전시로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내가 맞고, 너는 틀렸다.


이 놀라운 작가는 이미 1980년대에 전 세계 예술계에 그 화두를 던졌다.


"근대가 가진 이분법적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는 작가의 인생 자체가 이분법적 세계관의 희생양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어린 시절에는 지배와 피지배의 세계 (일본 제국주의), 1970년대에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이분법적 세계(사상 검증을 위한 중앙정보국의 고문)를 온몸으로 겪었다.


이분법적 세계관은 자신이 생각한 대로 되어야 한다는 오만함을 가진 우리 모두에게 유효하다.

그런 우리에게 그가 묻는다.


당신은 다른 생각을 가진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을 하였는가?



얼마 전 <건국전쟁>이란 영화를 비슷한 맥락에서 관람했다.

극단적 양극화 시대에 이념적 갈등의 뿌리가 된 인물로 지목되어 올바른 평가의 기회마저 처단당한 대통령이 아닐까 궁금헀다.


(아쉬웠던 부분도 있지만) 잘 몰랐던 역사적 사실들을 알게 되었고, 끝까지 조국을 지키고 싶었던 진심은 분명히 전달된 영화라고 생각한다.

영화가 끝나자 대부분의 관객들이 기립 박수를 쳤다.


다시 역사를 돌려 그 어떤 누가 권력을 갖게 되어도 공과 실은 있었을 거다. 나라가 없는 그 혼돈의 시대에 조국을 사랑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을 테니까.

후손들은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알아야 하고, 그것을 토대로 공과 실을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역사적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역사다큐는 존재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선조들의 역사적 평가를 또 다른 이분법의 잣대로 재단하고 또 다른 찬양을 불러일으키는 박수보다는, 그때는 그것이 유효했고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이제는 넓은 마음으로 포용하는 박수소리가 점점 더 커지길!  (이우환 작가와 같은 마음으로) 바라고 또 바라본다.




누군가는 예술가를 치열한 세상을 외면하고 현실을 모르는 존재라고 치부하거나, 예술적인 행위를 그 자체를 말도 안 된다며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늘 경계 사이에 외롭게 서 있는,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선을 가진 훌륭한 예술가들은 그래서 경계를 무너트리는 분명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유태인 피아니스트는 나치를 피해 폐허가 된 집에 숨어 먹고 자고 숨 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었던 나약한 존재 그 자체였다. 우연히 그를 발각한 독일군 장교는 그가 피아니스트라고 하자 뽀얗게 먼저 쌓인 피아노 뚜껑을 들추며 증명해 보라고 한다.

한줄기 빛 속에서 먼지가 흩날리고 그도 장교도 관객도 잠시 숨을 멈춘다. 그리고 삐그덕 거리는 건반과 굳어진 손가락 사이로 구슬프고도 감미로운 쇼팽의 <발라드 NO.1>이 흘러나온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시작된 2차 세계대전, 그가 연주한 쇼팽은 바로 폴란드인었다. 그 곡은 독일군 장교와 피아니스트, 독일과 폴란드, 지배와 피지배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버린다.

애써 눈물을 참던 독일 장교가 흘린 눈물 한 방울과 후에 그가 피아니스트를 위해 베푼 선의들, 그 놀라운 기적들은 분명 예술이 가진 힘이었다.


인간이 가진 사고의 틀을 원천적으로 무너트리는 것은 번드르르한 연설이나 이성에 호소하는 글이 아니다.

무모한 예술적 시도이다.


 

돌고 돌아 다시 나와 이우환의 작품이 만나는 지점.

그곳에는 억겁의 시간이 담긴 돌이 있고, 아이들을 숨 쉬게 하는 공간이 있고, 바람이 넘나드는 창이 있다.


내 말만 맞고 너는 틀렸다고 주장하는
내 머릿속 경계를 무너트리는
분명한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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