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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은 Jan 29. 2024

태양같이 빛나는 아이

칼 라르손, <아뜰리에의 리스베스>

<아뜰리에의 리스베스> (1897)


스웨덴의 화가 칼 라르손이 그린 자녀들의 그림을 보면 한 번씩 흠칫 놀라고 자주 아련해진다. 아이들만이 지닌 표정과 부모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랑스러움이 그림 속에 묻어있다.


남들 보기엔 다 똑같아 보이는 아이 사진 수 백장씩 휴대폰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 부모 아닌가?

하물며 그 시절 칼 라르손은 손으로, 수채화로 그 놀라운 일을 해냈다.

사진이 귀했던 시절, 아이들이 지닌 찰나의 표정을 기억하고 그것을 손으로 그려내는 일은 화가 아빠인 그에게 얼마나 큰 행복이었을까?


칼 라르손에게는 무려 8남매의 자녀가 있었다.




겨우(?!) 삼 남매를 키우는 나는 오늘 최악의 기분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예민해지는 포인트가 제각각인 삼 남매를 키우려면 최대한 사전 방지 전략을 세우지만, 예상치 못하게 세 아이가 동시에 빵빵 터지는 날이 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둘째는 오늘 학원을 마음대로 빠지고, 밥투정을 하고, 해야 할 공부를 하지 않아 한바탕 진이 빠진 터였다.


그 와중에 눈치 빠른 막내가 숙제를 스스로 하겠다고 일기장을 펼쳤다. 도움 요청도 없이 1시간이나 걸려 겨우 일기장을 덮는가 했더니 내일 받아쓰기 퀴즈가 있다는 말이 생각났나 보다. 막내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칭찬받아도 모자랄 막내인데) 내 언성은 점점 높아졌다.


그 와중에 첫째는 처음으로 부모 없이 떠나는 일본 여행을 준비 중이었다. 괴로워하는 막둥이와 그 옆에 심란하게 앉은 내 옆에서 “용돈은 아직 왜 안 주냐, 짐을 어떻게 싸야 하냐”   눈치 없이 자꾸 묻는다. 과제는 아직 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시간은 벌써 아홉 시.

누구라도 말을 꺼내면 폭발할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


1학년 막내는 아직 숙제 중이건만, 벌써 잘 준비를 마친 둘째가 같이 누워서 이야기하자며 옆에서 무기한 농성 중이다. 자꾸 언제 들어가냐고 묻는 통에 나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아이는 책상을 탁 치면서 일어났고, 들고 있던 유리컵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와장창!

동시에

빵!! 

트리거 폭발

이게 무슨 짓이야!!


분명 아이 걱정은 나중이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아이를 향해 터져 버린 분노에 잠시 오은영 선생님을 떠올렸지만, 이런 날에 뭐 오은영 선생님이라고 무사했을까.


화남을 온몸으로 발산하며 깨진 유리를 치우고 나는 아이들에게 잘 자란 인사도 없이 맥주 한 캔을 깠다.




칼 라르손은 평소 둘째 리스베스를 태양같이 빛나며 주변에는 반짝이는 웃음이 가득한 아이라고 묘사했다. 그의 작품집을 보면 어른이 된 리스베스의 모습까지 감상할 수 있다.

(이소영 <칼 라르손, 오늘도 행복을 그리는 이유>에서)


그날 나는 그림 속 리스베스의 웃음을 보다 울컥해 버렸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다시 생각해 봐도 그것은 미련한 후회였다.

유독 웃음 많고 천성이 다정한 우리 둘째가, 둘째라는 이유로 기다림에 익숙하다 못해 분노가 쌓여버렸구나.

나. 때. 문. 에.

태양같이 환하게 태어난 아이에게 어둠을 알려주었구나.

나. 때. 문. 에.


참 희한하다. 세 아이에게 동시에 시달리는 날엔 나도 아이가 되어버린다. 아이들이 서로 자기 마음 좀 알아봐 달라고 아우성일 때, 아무도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 나는 분노한다.




나에게 칼 라르손의 그림은 마냥 예쁜 수채화 그림이 아니다. 아이들과 무슨 심각한 일이 있어도 다시 돌아갈 일상을 꿈꾸게 하는 그림이다.


초(!) 다자녀 가정인 그의 집이라고 그런 날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결국 폭풍우은 지나가고 어김없이 이런 일상은 찾아온다.

<늦잠 꾸러기의 아침 식사> (1900)

밥상 앞에 앉아서 투정 부리는 아이가 너무나 사랑스러운 그런 순간말이다.


칼 라르손 부부는 실제로 그림처럼 일상을 꾸려갔다.

스웨덴에는 여전히 그들이 행복하게 살았던 집 ‘릴라 히트나스’가 보존되어 있으며, 인테리어에 소질이 있었던 아내 카린 라르손과 함께 꾸몄던 그 집은 유명한 ‘이케아’의 창업 아이디어가 되기도 했다.



시간이 돈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시간이
소중해진다.

정여울, <문학이 필요한 시간> 중


가족 간의 동화 같은 화목함보다, 일상을 사랑하는 삶이 되길 꿈꾼다.

완벽하려고 애쓰기보다, 아무래도 다 괜찮아질 거라 웃을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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