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vs 철학 제5장, 7장, 8장을 중심으로

언제 다 읽을 수 있을까?

by 회색철학


철학 vs 철학

강신주가 쓴 철학 vs 철학은 총 66장으로, 서양철학과 동양철학 각 3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마다 강신주는 철학적 쟁점을 정해 대립되는 철학자가 어떻게 논리를 펼쳤는지를 비교한다. 그의 견해가 다소 첨가되어 조금은 편향되게 설명되지만 각 쟁점별 대립되는 철학자들의 이야기는 흥미롭다. 1,5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양과 중간중간 관련된 내용을 찾아보느라 완독이 언제 가능할지 싶기에, 읽는 도중 흥미로웠던 3개의 장을 중심으로 리뷰를 써보고자 한다.


제5장 (데카르트 vs 파스칼)

제5장에서 강신주는 데카르트와 파스칼로 대립되는 이야기를 담았다. 중세시대에서 르네상스시대로 넘어가는 배경 속에, 신이라는 절대적 존재 아래 존재하던 인간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시선을 돌리는 과정 속에, 그 토대를 마련했던 데카르트와 그 논리를 조금은 비웃듯이 의견을 펼친 파스칼에 대한 이야기이다.


두 철학자의 이야기의 대립은 그들을 대표하는 두 문장으로 대립된다.


데카르트의 한 문장,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와 파스칼의 한 문장,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는 그들의 많은 이야기를 대변한다.

데카르트의 문장은 신의 이름 하에 존재하던 인간의 존재성을 인간 자체로 존재하기 위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제 1명제로, 생각한다는 것 그 자체가 그 존재를 설명한다고 이야기하며, 인간의 이성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반면 파스칼의 문장은 인간을 이성만이 아닌 심정(감정)에 휘둘리는 나약한 존재로 격하하며, 신의 필요성을 이야기한다.


데카르트의 문장과 이어진 그의 심신이원론 등 그의 이야기는 파스칼과 같은 많은 이들의 반론을 불러일으켰으나, 데카르트의 문장을 통해 인간이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인문정신을 다시 발전시키는 근대철학을 탄생시켰다는 점은 자명하다.


데카르트에 의해 신에서 해방된 주체가 탄생했지만, 이는 타인의 탄생 또한 의미한다. 각자의 세계관을 가진 개인들은 이제 서로 간의 관계와 소통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제7장 (스피노자 vs 라이프니츠)

제 7장에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이야기는 타인과의 소통이 가능한지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먼저 스피노자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에 의해 이원되었던 정신과 육체를 하나의 삶으로 바라본다. 스피노자는 타자와의 소통은 하나의 삶을 증진시키는, 정신이 원하는 의지와 정신과 육체가 원하는 충동, 욕구에 의해 선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따르며, 의지, 충동, 욕구를 충족시키는 기쁨, 쾌감, 유쾌함을 주는 타자와 연대하는 방식으로 소통을 해나가야 한다고 이야기하며 타자와의 소통이 주체적으로 가능하다는 입장을 이야기한다.


반대로, 라이프니츠는 타자와의 소통이 주체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이야기한다. 라이프니츠의 ‘창이 없는 모나드(공간 또는 실체)‘는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창이 전혀 없는 그의 논리를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우리에게 발생하는 모든 사건들은 우리가 바라보는 결정된 영화와 같은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것일 뿐이며, 타자의 이야기, 심지어 자신의 이야기에도 개입할 수 없는 개인은 1인실 영화관의 관중일 뿐이라며 운명론적인 자세를 취한다.


이 둘의 이야기는 이 장의 ’고찰‘에서 다뤄지듯이 관계의 외재성과 내재성으로 대립된다. 스피노자는 소통이 가능하며 그 방법은 기쁨의 원리라 설명해나가고, 라이프니츠는 타인과의 만남에 따른 결과가 이미 관계에 내재되어 있으며 이미 정해져 있기에 타인과의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이야기한다.


라이프니츠의 이야기가 참신하다고 강신주가 언급한 것과는 달리, 그 이후의 장에서 라이프니츠가 거론되지는 않는 듯하다. 제 8장은 스피노자에 의해 제기된 선함에 대해 다룬다. 그저 충동, 욕구, 의지를 따르는 것이 선하며 그를 만족시켜주는 타자와 연대하라니? 누구라도 반기를 들만하며 논쟁거리가 될만하다.


제 8장 (흄 vs 칸트)

제 8장의 제목인 ‘선함은 언제드러나는가?’ 에 대한 물음에 답하기 전에, 강신주는 선함을 규정할 수 있는 도덕과 윤리에 대해 먼저 이야기한다. 스피노자, 니체, 푸코가 따르는 도덕과 윤리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도덕은 사회적으로 규범된 옳고 그름이자 선과 악을 구분 짓는 잣대이며, 윤리란 개인의 판단에 따른 좋고, 싫음에 따르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단순히 좋고 싫음으로 결정된다는 이들의 윤리는 그 혁명성에 따라 훼손되거나 공감을 받지 못하며, 흄과 칸트의 윤리에 대한 기준의 논쟁이 주요하게 대립된다.


흄과 칸트의 윤리학은 각각 ‘동정심의 윤리학’과 ’자율의 윤리학‘으로 불린다.


흄은 개인의 경험에서 타인의 경험을 추론하는 과정 속에 생기는 사후적 감정인 동정심에 주목하며 윤리적 근거로 삼는다. 즉, 동정심 없이 이성만으로 윤리적인 주체가 될 수 없으며, 이는 이성이 정념의 지배를 받는다는 이야기이다.


반면, 칸트는 흄에게 ’동정심이 들지 않는 상대를 돕지 않는 것은 윤리적으로 선한가?‘라고 반문하며 그의 자율의 윤리학을 펼친다. 윤리란 동점심 같은 변덕에 노출된 수동적이며 감정적인 차원이 아닌, 감정이 상하더라도 항상 그 보편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즉, 윤리적인 행동은 자신의 준칙에 의거해, 행동을 하기 전 자신을 보편적으로 바라보고 결정된 행동이라고 설명한다. 비록 이후 프로이트의 초자아와 같은 정신분석학에 의해 공격받는 칸트이지만, 그의 윤리에 대한 개념은 동정심보다는 보편적인 윤리를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흄과 칸트의 이야기는 상당히 대립적이지만, 강신주는 그 둘의 윤리학에 공통점 또한 존재한다고 바라본다. 둘은 주체가 윤리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배치되었지만, 둘 모두 주체가 윤리를 결정한다는 주체의 윤리학을 펼친다는 것이다. 즉 윤리를 결정하는 흄의 감정이나 칸트의 결단이 모두 ‘일인칭’적이라는 것이다.


주체의 윤리학과는 다른 타자의 윤리학이란 타자를 삶의 짝으로 긍정하는 것으로, 강신주는 원효의 이야기로 짧게나마 설명한다. 원효는 ‘스스로 조심해서 선을 행하지 않으려 노력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는 악을 행하라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정한 선과 악을 멋대로 타인에게 행하지 말라는 의미이며, 타자의 고유성을 존중하라는 의미로 설명된다. 즉, 타자의 윤리학은 타자의 고유성과 자기의 고유성이 모두 긍정될 수 있는 균형 지점을 찾는 것이다.


마무리

강신주는 각 장에서 대립되는 이야기 속에 철학자들이 이어나가는 이야기들을 담아나간다. 각 장에는 물론 두 철학자들만이 아닌 그 철학자들과 관계된 철학자들과 이야기를 담으며 어렵게 느껴졌던 철학사를 한 번에 느껴볼 수 있게한다. 물론 그의 책이 모든 철학이야기를 담는 것은 아니기에, 중간중간 궁금한 점들을 검색해 보며 다른 책도 읽어보아야 한다는 점에서 아주 친절한 책은 아니지만, 철학의 흐름을 훑어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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