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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화가 전성시대

에필로그

by 일요작가

드디어 퇴사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하려고 <어느 날 화가가 되었습니다> 연재를 이어왔나 봅니다. 다음에는 본격적으로 퇴사 후 펼쳐질 새로운 일상을 담은 내용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이야기를 마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출근했고 저녁에는 화실에 갔으며, 자기 전에 이 글을 쓰고 있다. 어쩌면 나는 이 시대의 일요화가일지도 모른다.


일요화가란 미술을 전공하지 않고 생업을 이어가면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말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앙리 루소와 윈스턴 처칠이 있으며, 글을 쓰는 작가 중에서는 프란츠 카프카가 있다


자칭 ‘일요작가’라며, 퇴근과 출근 사이에 그림을 그리고 문장을 쓰며 반전 있는 직장인으로 매력을 뽐냈다. 주변에서 대단하다고 칭찬해 주면 마치 무언가 된 것만 같았다. 그런 나에게 취할 때쯤 정신을 차려 보니 주위에는 무수히 많은 일요화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일요화가 전성시대’다. 유튜브를 하는 물리치료사(심지어 워킹맘이다!), 세계대회를 목표로 자전거 타는 PD, 옷을 만드는 마케터까지, 모두가 본업 말고도 하나 이상의 사이드 프로젝트를 갖고 있었다.


알고리즘이 관심사를 반영한 건지, 아니면 우연의 장난인지 모르겠지만 나의 인스타그램 피드에는 유난히 책을 내는 직장인들이 많다. 1년에 한 권씩 척척 책을 펴내는 그들을 볼 때마다 감탄이 밀려오면서도, 알 수 없는 조바심이 스쳤다. 몇 년째 두 번째 출간을 꿈꾸는 내겐 그저 부러운 존재였다. 부캐로 성공해 퇴사한 이들을 보면서 언젠가 나도 그 길을 따라갈 수 있을까 막연히 기대했다.


나는 직장인에서 전업 작가로 변신을 꿈꾸고 있다. 완벽한 변신을 위해 내년 개인전을 열어줄 갤러리를 찾고 있고 아트페어에 다시 참가할 기회를 틈틈이 엿보고 있다. 초대를 받지 못하면 참가비를 내서라도 전시하고 싶으니, 돈도 열심히 벌어야 한다. 작업은 여전히 고민투성이다. 변화를 주려다 헛손질로 시간을 허비하기도 하고 100호 크기의 캔버스에 도전하고 싶지만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많다. 그런 와중에 부장님은 창립 20주년 홍보 플랜을 짜오라고 한다.


직장인과 화가, 두 정체성 사이를 오가며 글을 썼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이미 화가였으며 오히려 직장인이 부캐라는 듯 써 내려간 대목을 발견했다. 이제 퇴근하고 뭐 하냐는 질문에 더는 망설이지 않는다. 주말에는 작업을 하니 내 시간을 방해하지 말라고 당당히 요구한다.


막상 화가가 되고 보니 화가는 그림만 그려서는 안 되었다. 운동선수가 매일 훈련하듯 작가도 영감을 위한 감각과 경험을 쌓아야 했다. 인문학적 소양도 필수였다. 작업 중에도 독서하고 여행하는 일이 필요했다.


양이 질을 만든다고 하니 더 많은 작품을 완성하려면 작업 시간을 확보하고 마감 시간을 단축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했다. 고흐도, 피카소도 수만 점의 회화를 남겼다. 하물며 내가 고작 주말에도 그림을 그린다고 엄살 피울 수는 없다. 모든 시간을 들이고 온 힘을 다해야만 일요화가를 넘어서 내 길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언젠가 문이 열릴 것이다. 그때까진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도 사랑하려고 한다. 직장은 현재의 나에게 가장 큰 후원자이다. 그렇게 균형을 맞춰 나가다 보면, 언젠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올 거라 믿는다.


생각을 텍스트로 옮기다 보면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정리가 된다. 모두가 함께 그림을 그리고 꿈꾸기를 바라며 시작한 이 기록은, 오히려 전업 화가가 되고 싶은 나의 간절함을 확인시켜 줬다. 그리고 나는 이미 그 길 위에 서 있었다. 꿈은 언젠가 이루어지는 결말이 아니라 바로 이 순간을 살아가는 과정이다.


그림을 그리는 일을 변함없이 사랑한다면 언젠가 이 일로 먹고살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자기 확신은 내가 가진 재능이다. 매일 캔버스와 마주하고 원고를 쓰며 언젠가 그것이 내 삶이 되리라 믿는다.


남의 일이 아닌, 온전히 내 것을 만들어 내는 일은 생각보다 깊은 성취감과 만족을 준다. 그래서 계속해서 하게 되고 함께하고 싶어진다. 어메이징 한 성공기는 아니지만 자신만의 전시회를 꿈꾸는 누군가에게,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응원이 되었으면 한다.


여기서 초보 화가의 우당탕 고군분투기를 마친다.

아니, 진짜 이야기는 이제 시작일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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