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도 소원은 퇴사
화가가 되고 처음 그림으로 40만 원을 벌었다. 다음 해, 공모전과 아트페어에 참가하면서 판매한 그림값을 더하니 200만 원이었다. 그다음 해에는 2,000만 원을 벌었다. 숫자가 점점 커지는 걸 보며 이대로라면 곧 그림으로 먹고살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들었다.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점점 아까워졌다. 빨리, 조금이라도 더 오랜 시간 작업에 몰두하고 싶었다.
하지만 셈을 하면 할수록 전업 화가의 꿈은 멀어졌다. 부수입이 생겼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온종일 그림만 그리며 살고 싶지만 생활을 유지하고 작품활동을 하려면 제법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나마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이 있기에 신진 작가로서 다양한 도전할 수 있었다. 비싼 물감과 캔버스를 아낌없이 사고, 좋은 나무로 만든 액자도 맞출 수 있었다. 출품작을 포장하고 운송 차량을 부르는 등 전시 준비에도 비용 걱정을 덜었다.
운 좋게 그림이 판매가 되면 수익은 그대로 저금했다. 언젠가 전업 화가가 되었을 때 연금처럼 꺼내 쓰려고 차곡차곡 모아나갔다. 애초에 돈을 벌려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기에 계산도 하지 않은 채 곧바로 입금했다.
그림을 그리고 활동을 하는 데 비용이 점점 커지면서, 급여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특히 전시 초대를 받지 못했던 시절엔, 대관료나 참가비를 부담하며 기회를 만들어야 했다. 그럴 때면 차곡차곡 모아둔 돈을 다시 꺼내 쓸 수밖에 없었다.
월급쟁이한테 이만한 부수입이 또 있을까? 그런데도 하루라도 빨리 전업 화가로 살고 싶은 내게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림 통장의 잔고를 보며 일을 그만두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가늠했다. 구체적인 기준이 필요했다. 최소 얼마가 있으면 만족하며 살 수 있을까?
숨만 쉬어도 나가는 생활비에 작업을 위한 재료비까지, 고정적으로 필요한 돈이 있다. 출근하지 않으면 오피스룩을 살 필요도 없고, 가족여행에서 숙소 비용은 이제 나눠서 내자고 하면 될 일이다. 다른 건 절약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갑자기 전세금을 올려 달라고 하면 어쩌지?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그림으로 먹고살겠다고 결심했다면, 피카소처럼 ‘나는 그림으로 억만장자가 될 거야’라고 포부를 가져야 하는데, 나는 한 번 정점을 찍어본 금액 안에서 가계부를 쥐어짜고 있었다. 피카소처럼 천부적인 재능이 없기에 철저한 계획이 필요했다. 직장인이었던 유명 작사가가 저작권 수입이 연봉을 뛰어넘었을 때 사직서를 꺼낸 것처럼, 나만의 기준을 세워야 했다.
확실히 전시 같은 활동이 많으면 작품이 판매될 확률도 높았다. 팔리지 않더라도 많이 보여야 홍보가 되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 그림과 인연이 닿는 사람이 나타났다. 연봉 2천만 원을 달성했던 해에도 개인전을 두 번 열었고, 아트페어와 아트옥션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이 시기엔 정말 집-회사-화실만 오가며 살았다. 코피가 나면 신호로 여기고 바로 사직서를 낼 각오까지 했지만, 웬걸, 코피는커녕 오히려 에너지가 넘쳤다.
미술은 재능과 취향의 영역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노력한 만큼 결과가 보였다. 인생의 대부분 일들과 다를 바 없었다. 만약 직장에 매이지 않았다면, 더 많은 기회에 도전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활동했을지도 모른다. 회사는 작품 활동에 금전적인 안정감을 주지만, 동시에 자유와 절실함을 앗아간다.
내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는 회사를 원망하며 퇴사만이 답이라 생각하다 보니, 이제 내 꿈이 작가인지 퇴사인지 헷갈린다. 사실 꿈을 방해하는 건 사장님이 아니다. 어쩌면 회사 핑계를 대며 신세한탄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 내가 가장 큰 방해꾼일지도 모른다. 내 시간을 온전히 쓰고 싶다고 하면서도, 가진 시간을 자꾸 원망과 핑계로 허비하고 있다. 그럴 시간에 바라는 인생을 위한 목표를 세우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할 텐데 말이다.
10년 넘게 직장인으로 살아오면서 내가 한 재테크라고는 엄마의 잔소리에 떠밀려 넣은 적금이 전부였다. 그림으로 먹고살 궁리를 하다 보니, 이제야 재테크나 경제 흐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마흔이 넘어서야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진지하게 계획하기 시작했다.
당장은 본업과 작업을 병행하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이다. 퇴사가 꿈이 아니다. 내 꿈은 화가였고 이미 그 꿈을 이뤘다. 자꾸 그걸 잊는다. 퇴사는 도망이 아닌 다음의 단계여야 한다. 단순히 출근이 싫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설 수 있는 기반이 갖춰졌을 때 비로소 내릴 결정이어야 한다.
물론, 오늘도 퇴사하고 싶다. 가슴에 품은 사직서를 던질 그날을 앞당기려면 재테크도 신경 써야겠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작품 활동이다. 좋은 그림을 그리고, 더 많은 전시에 참여해야 한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퇴근과 출근 사이에 틈틈이 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다행인 건, 그림은 나이가 들어서도 그릴 수 있다는 점이다. 직장인의 수명은 언젠가 끝이 나지만, 화가로서의 일은 은퇴 후에도 계속할 수 있다. 그러니 조바심 낼 필요 없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그래서 빨리 퇴사… 아니, 일단은 퇴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