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work
퇴근 후 별일이 없으면 그림을 그리러 간다. 2014년 동네 화실의 문을 처음 두드렸으니, 이제 5년 차 수강생이다. '처음'이 유난히 어려운 성격 탓에 스스로 어떤 모임이나 단체를 찾아가는 일이 드물다. 지인 손에 끌려갔던 모임에서도 미친 낯가림 탓에 절친의 품으로 달려가고 말았으니, 그때 '인싸'가 되기는 글렀다는 것을 인정했다. 화실은 달랐다. 어색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았다. 조용히 그림만 그리고 있으면 되었다. 어색한 미소를 보내지 않아도 되고 먼저 말을 건네지 않아도 괜찮았다.
사실 그림을 배운다는 것에 큰 감흥은 없었다. 그동안 퇴근 후 운동을 했다면 이번에는 그림을 배우는 새로운 취미활동이 생긴 정도였다. 항상 뭔가 배워야 하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한국인이라면 영어 공부나 다이어트를 평생 안고 가는 것처럼, 나는 유난히 그런 편이다. 그렇지만 더는 헬스장이나 영어학원을 등록하지 않았다. 돈은 버리는 것이 아니기에.
퇴근 후 수영을 배운 적이 있다. 거의 1년 정도는 수영에 빠져 살았었다. 수영 레슨이 없는 날에도 자유 수영을 가고 영법 동영상을 찾아보고 연습했다. 수영의 가장 큰 매력은 물속에 있는 동안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물속에서 호흡에만 집중하다 보면, 금세 한 시간이 지나가 있다. 1분 1초도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 내 고질병을 고쳤다. 그림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연필로 무언가를 따라 그리다 보면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할 테니까. 하지만 3개월 정도는 그림을 그리는 내내 머릿속에 딴생각투성이였다. 오히려 연필 선을 따라 생각이 점점 길어졌다.
좀처럼 늘지 않는 그림 실력도 별로였다. 대충 따라 그려놓고서는 화실의 선생님이 봐주기만을 기다렸다. 그림의 마무리는 선생님이 설명과 함께 정리해 주는데, 그의 손이 닿으면 그림에 입체가 생기고 선이 깔끔해졌다. 그러다 보니 서둘러 형태를 맞추고 대충 선을 그은 뒤 선생님이 봐주기만을 기다렸다. 언제부터인가 최대한 스스로 마무리를 하려고 한다. 여전히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끝까지 제 힘으로 마치려고 애써본다. 5년 만의 큰 변화다.
그림을 그릴 때 무념무상으로 그리기 신공도 생겼다. '어떻게 그려야 하지?'라는 고민은 하지만, 이마저도 그리는 순간에는 아무 생각 없이 선을 그을 뿐이다. 분명 가득히 밥을 먹고 왔는데, 분명 해가 지기 전에 그림을 시작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허기가 지고 날이 어둡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 가지에 몰두하고 있다는 행위가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수영 레슨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몰입의 순간이 반갑고 새롭다.
오늘도, 퇴근하고 그림을 그리러 간다. 별 일이 없다면 내일도 그럴 것이다. 칼퇴근을 하지 못하더라도, 늦게라도 내 그림을 보고 오는 일이 하루의 낙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