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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윰윰 Aug 02. 2023

세상엔 만날 수록 벅찬,<마이너스 인연>도 있나 봐

둘이면 '함께' 행복해진다 생각하기 쉽지만, 둘이어서 에너지를 빼앗기는 경우도 있다. 스트레스를 만들어내는 관계, 그것을 <마이너스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인연이 있다면, 둘보다는 각자... 서로 혼자의 삶을 사는 것이 더 이로울 터. 하지만 연이 끝나는 순간에는 언제나 고달프다. 

요즈음 나는 모든 종류의 중독에서 멀어지려 하고 있다. 음악, 숏츠, 술, 음식 등 나도 모르는 새 습관화된 쾌락에서 멀어지고자 하는데 오늘 이 글을 쓸 때만큼은 좀 들어야 하겠다. 오늘의 곡은 Lana Del Rey - Young and beautiful 이다.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사람을 좋아한다. 잔정이 많다. 기본적으로 타인을 볼 때 그 사람의 장점을 보려고 노력한다. 기가 막히게 장점을 찾아내서는 '그것'을 크게 봐준다. 물론,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 단점이나 약점도 보인다. 이것은 내가 보려고 보는 것이 아니다. 


글쎄... 어려서부터 예민했던 내게는 '날 선 촉' 같은 게 있었다. 첫인상에 사람이 판단되곤 했다. 첫인상에 병들었다, 이상하다 판단된 사람은 여지가 없었다. 그 시절 나는 어째서 첫 눈에 보이는, 그 인상을 벗어나는 사람이라곤 한 사람도 없을까 고민하곤 했다. 


첫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신체가 강건해도 정신이 병들어 있는 사람들... 어린 시절의 나는 어쩌면 알고 있었다. 자기연민만이 발달한, 남 탓을 잘하는, 피해의식이 거세서 어느 한 구석이 썩어 있는 사람들은 멀리 해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몰랐던 것은, 내가 자신들을 피한다는 걸 그들 역시 안다는 부분이었다. 그들은 집요하게 나를 괴롭혔고, 자꾸만 내 일상에 끼어들려고 했다. 대체로 그런 종류의 사람들의 뒤치닥거리를 하는 사람이 나여서 더 힘들었고, 이제는 '거리두기'를 티나지 않게 하는 걸 배워가고 있다.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기억력이 좋은 편이다. 딱히 보려 하지 않아도 기억된다. 상사가 있을 때만 다가와서 친근한 척하고, 마치 일을 도와주는 '척'을 하며, 먹을 것 사주겠다는 농짓거리를 날리다가 상사가 없을 땐 제 일마저 다 떠넘기고 대충대충 일처리하며, 본인 일까지 하느라 죽을 것 같은 내게 "뭐 그런 엄살을 떨어?"라는 시선을 날리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 말이다. 외관상 둥글둥글하고 웃는 얼굴이기에, 필요할 때마다 다가가서 좋은 사람인 '척' 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넘어가줬을지도 모른다. 


어떡할까? 보이잖아, 상사가 자리에 없던 시절엔 단 한번도 온 적 없단 걸 기억한다. 상사가 나와 자리가 가까워서 좋은 팀장인 '척'을 하기 위해서 그랬단 것도 기억한다. 갑자기 내 자리로 다가와서 친한 척을 한다면 '여지'가 없었다. 이런 종류의, 앞뒤가 다른 행동과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종류'의 사람을 정말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이 필요할 땐 다가와서 온갖 아양을 떨고, 아닐 땐 뒤에서 들리란 듯 뒷담화를 까는 사람들을 학창시절에도 무수히 겪었다. 


내 죄라면, 융통성이 다소 부족한 FM 범생이었다는 거였다. 밥맛일 수 있다. 선생님의 총애를 받고 있는, 뒷담화를 들리게 해도 딱히 뭐라 하지 않는 애에겐 아무렇게나 대해도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 시절에도 그걸 알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밥맛처럼 느껴진단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순간에도 그들을 미워하지 못했다. 나는 누군가를 나쁘게 보거나, 미워하지 못한다. 고작...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가겠지, 딱 그모양 그꼴로 살다가 죽어버릴 것들한테 에너지 쓰지 않을 거야!'라고 외칠 뿐이다.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허나 나는... 에너지를 많이 쓰면서, 신경을 끄지 못하고 살아 왔다. 


처음엔 <이해>를 하려 했던 것 같다. 어떻게 한 사람이 한 입으로 두 말을 할 수 있는 건지,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어떻게 저다지도 많이 할 수 있는 건지, 책임감이 눈꼽만큼도 없는 저 자를 사람이라 볼 수 있는 건지, 자신이 진짜 '객관적으로'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건지(그 정도로 머리가 마비된 건지), 저딴 식으로 한 것도 열심히 했다고 '자조'하는 건지... 따위의 것들 말이다. 


내가 '말의 무게'를 짊어지고 사는 사람이어서(실제로 나는 진짜 결심이 서기 전까진 말하지 않는다, 내가 한 말은 무조건 지켜야 하기 때문에 확단이나 확언을 잘 하지 않는 편이다) 또한, 내가 선택한 사람이든 일이든 최선을 다해서 끝까지 해내는 종류의 사람이어서,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 나를 끝없이 학대하며 몰아세웠던 종류의 사람이어서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아니다. 


한때는 나르시스트에 가까운(모든 일이 기승전 내 탓이었고 자기 기분이 우선이었던 자기중심적 사람) 사람과 친하게 지냈고, 지금은 멀어졌지만 거기에 무수한 시간이 걸렸다. 4-5년이었다. 그 관계에서 나는 너무도 고통 받았고, 내 모든 행동과 언행, 말과 표정 등등에 대해서 예민하고 민감하게 반응했다. 뭘 하든 자기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배려가 아니며 나는 이상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벗어나온 뒤에는 친구 관계에서 그랬던 적은 없지만 연인 관계에서도 힘들었다. 내가 내 인내를 끝에 끝까지 다 퍼내서까지, 그 사람과 함께하려고 노력하는 종류의 사람이어서다. 사람은 누구나 다르고, 사람이 사람을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바뀌는 건 본인, 스스로가 하는 일이다. 허나... 사람이 다른 만큼 연인관계에 있어선 부딪힐 수밖에 없다. 


주로, 연락이나 표현, 만남의 패턴에 관한 문제다. 


웬만한 건 넘어갈 수 있고 맞출 수 있지만... 이것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그 사람에 대한 내 애정이 식을 정도의 '것'이라면 조율해야 한다. 나의 연락 패턴은 단조롭고, '지킬 것만 지켜지면 되는 종류'의 루틴화된 것이었지만 그게 맞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일단 나는, 규칙적인 안부를 묻는 것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누굴 만나는지 최소한 알려주는 것이 상대에 대한 배려이며 '성실'이라 생각한다. 한결 같이 성실한 배려만이 '사랑'을 지속시킨다고 본다. 나는 안정된 연락의 패턴과 서로를 생각한 '소통'이 베이스로 깔려야만 연애를 이어갈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다. 


평일 기준, 출근했을 때와 점심시간 그리고 퇴근 때만 주기적으로 지켜져도 좋다. 먼저 출근한 사람이 인사하고 다음에 출근한 사람이 인사한 뒤로는 일이 바쁠 수도 있고, 딱히 회사에서 개인 연락 하기 싫을 수도 있으니 안 해도 좋다. 


점심에는 뭐 먹는다, 당신은 뭐 먹냐는 안부인사가 '서로를 생각해주는 거'라 나는 생각한다. 솔직히 점심에 뭐 먹는지 메뉴가 매일매일 궁금할 리는 없잖아, 그냥... 너를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다. 밥을 챙기는 거지, 끼니를 챙기는 '정'이다. 


그러고 중간에 틈 생기고, 짬 나서 이야기하고 싶으면 자유롭게 하면 되지만 안 해도 무방하다. (이를 테면 회사에 있다가 병원에 간다거나, 출장을 간다거나 하는 등의 이슈가 생기면 연락하면 좋단 의미다, 나 역시 그렇게 함) 퇴근할 때는 이제 퇴근한다, 하루 잘 마무리해가냐... 정도의 인사 그리고 집에 도착하면 도착했다고 남겨주는 것, 상대와 자주 만날 수 없기에 그냥 서로 상대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전해주는 거라 생각한다. 


퇴근 이후에 친구를 만나거나 동료와 밥을 먹거나, 일정이 있다면 그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줄 수 있는 게 아닐까. 친구를 만난다면 만난다, 뭐 먹을 거다 하고 난 뒤로는 연락이 안 되도 좋다. 자리를 옮길 때, 집에 올 때 연락해주면 그뿐이다. 뭘 하고, 어딜 가는지, 지금 상태가 어떤지 정도는 서로 알아야 '정' 아닐까. 




나는 상대가 불성실하고, 상대가 내가 최소한 해줬으면 하는 점을 지켜주지 않더라도 상대와 똑같이 행동할 수 없는 종류의 사람이다. 이 사람이 만날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발을 걸쳐놓고 다른 사람을 찾아헤맬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상대의 불성실, 상대의 태도와 관계 없이 내가 할 도리는 해야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성실은 해야 하는 사람이다 보니 더욱더 소진된다. 


어째서 난, 쓸데 없는 사람에게 쓸데 없는 종류의 '성실'을 다할까. 왜 열심일까. 어째서 한 사람을 선택하면 그 사람에게 최대한으로 따듯해지고 싶은 걸까. 심지어 나에게 돌아오는 게 100 중에 20도 되지 않더라도... 사람이 100을 주면 60 정도는 받길 기대하는 게 사람인 건데... 나는 그것을 기대하고 실망하길 거듭하면서 너무 많이 지쳤고 종국엔 기대조차 하지 않으면서 내 할 도리를 했다. 


내 주위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특히 친구의 경우) 그, 나의 한결 같은 성실과 표현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 뿐이다. 그러지 않은 사람들은 언제든 내가 참다가 서서히 멀어지거나 결별을 통보했다. 내 입에서 '잘 가라'는 말이 나올 때는 재고의 여지가 없다는 말과 같다. 나는 섣불리 그런 종류의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실제로 진짜 힘들었던 한 회사에서 퇴사하겠다고 했을 때 선임이 물어본 적이 있었다. 정말이냐고, 그래서 내가 한마디했다. "제가 이전에 한번이라도 그만두겠단 말 한번이라도 한 적 있나요..." 하고. 선임이 "그래, 넌 그런 적 없지"라고 말했다. 말실수로라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연인 관계에서도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이 오기 전까지 그만하자는 말은 하지 않는다. 내게 있어 그것은 금기다. 그 말이 내 입밖으로 나가는 순간, 그 사람과 나는 결별이기 때문이다. 


근데... 나는 너무도 많은 인내의 에너지를 써왔다. 내가 돌려 받지 못할 걸 뻔히 보면서도 내가 선택한 사람이라 기꺼이 감내했다. 친구든, 지인이든, 연인이든... 에너지를 쓸수록 소진되고, 종국엔 '안녕'을 고할 사람이라면... 그러한 마이너스 인연이라면 이제, 더 깊어지기 전에 도망쳐야 마땅하다. 


그 에너지를 나에게, 내 사람에게 쓰는 것이 좋다. 이제 3번의 기회 그 이상은 주지 말자. 3번의 기회라고 말했지만 나는 늘 그보다 더 많은 기회를 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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