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꿀한 날엔 사주쟁이의 말을 떠올린다. 한때 주기적으로 사주를 봤다. 하는 말이 뻔한데도, 사주에 매달렸던 이유는 단순했다.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기 위해서였다. 운명에는 뭐라도 적혀있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었지만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너덧명의 사주쟁이들에게 똑같이 들은 말은 하나 같이 마흔 넘어 잘 된다는 것. 이십대 후반에 만난 사주쟁이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명줄이 길다고, 좋은 거라고, 어떻게든 마흔 셋까지는 살라고 했다.
기이하게도 죽고 싶은 날이면, 그 말이 메아리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반복되는 가위와 무기력과 울증과 분노, 서글픔에 지쳐 있던 날이었다. 명줄이 짧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거 같다, 그날의 나는. 내가 미치지 않을 거라는... 이상한 귀신들이 날 괴롭히지 않을 거라는 확신도 필요했다.
-끼는 있네, 그쪽 팔자는 아니야, 글쓰는 거 예술하는 거 그쪽으로 풀려, 걱정하지 마
-명줄? 오래 살면 좋은 거지 뭘 그래?
-마흔 셋까진 살아, 꼭.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떻게서든 살아.
-마흔 셋이 넘어가면 누구든 이름을 다 알 정도가 될 거야.
너무 오래돼서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 말들 중에 떠오르는 말만 옮겨보면 이렇다. 오래 산다는 말에 나는 아이처럼 투정부렸다. 왜, 왜요!! 하자마자 사주쟁이는 "길어, 그냥 더 볼 것도 없어"라고 말했던가.
돌아온 답은 퉁명했지만 따듯했다. “오래 살아, 생각 하지도 마.” 오래 산다는 말에 화가 치솟았다. 지금까지도 힘들었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힘겹게 버티며 살아야 한다는 걸까 싶어서. 동시에 마음 한 켠이 후련했다. 선택지 하나가 사라져서. 어차피 나는 스스로를 죽일 순 없는 사람이다.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하는데, 길게 산다면 죽음에 대해서야 더 생각할 이유가 없어서였다.
허나 이날 이때까지 나는 참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죽음의 감각에 대해 생각한다. 어느 날엔 오른 손목 부위가 조인 것처럼 시큰거리고, 또 어느 날엔 목이 어딘가 메었다가 풀려난 것처럼 답답하다. 마치... 언젠가의 내가, 이 생에 태어나기 전의 내가 그와 같은 일을 한 적 있는 것처럼 환상통처럼 아프다.
나는 따듯하게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이었고, 한 만큼 뭐든 된다고 믿는 성실한 사람이다. 안부를 묻고, 따스한 인사를 건네고, 안위를 챙기고, 말 한마디 더 건네주는 거 많은 에너지가 든다. 다만 나도 그런 종류의 따스함을 받아보고 싶은 사람이어서 기꺼이 했다. 내 사람이라 생각되는 이에게는 이해의 범위를 상식선 이상까지도 했다. 부족하더라도 조금씩 나아지면 그 노력과 성실에 크게 감동했다. 나 스스로에겐 결과, 성과가 보장되지 않는 노력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채찍질했으면서 타인에겐 관대했다. 역설적이게도 타인을 믿지 않아서다.
우습게도 나 역시 믿지 않아서다. 나를,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나의 감정을, 마음을, 슬픔을, 우울을 믿어주지 않고 이해해주지 않는 나여서. 나약한 게 싫어서, 타인과 나를 둘다 믿지 못해서 나는 매사 성실했다. 일을 할 때도, 사람을 대할 때도, 애인을 사귈 때도. 나는 내가 참을 수 없는 범주를 넘어서, 내 에너지가 모조리 다 바닥 난 뒤에도 가라앉아 있는 비축분까지 모조리 다 긁어 쓰고 나서야 멈추는 사람이었으니까.
살아오는 동안 내가 한 선택에 후회나 미련이 없는 건 이러한 내 성향 덕이었고, 내가 지금 마음속에서부터 곪아서, 살아 있어야 함을 인정하는 것에 너무도 힘들어하는 것 역시 이러한 내 성향 탓이다.
마흔이 넘으면 좀 달라질까... 하는 생각을 한다. 어제는 내게 너 정말 고생했다 라는 말을 또 한번 해주었다.
<사이코지만 괜찮아>라는 드라마를 보며 나는 펑펑 울었다. 스스로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방법을 모르던 두 사람이 서로, 또한 자기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내용이어서다. 생각해 봤는데 내가 ’한결 같이‘ 내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든 변하지 않고, 성실하며 책임감 있는 사랑을 원하는 건 내 안에 나를 ’그렇게‘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해서다. 그 ’사랑‘을 너무도 받고 싶은데, 누군가 그 ’사랑‘을 내게 보여준다면 나 역시 따라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다.
언제나 열심인 사람이어서, 최선을 다한다는 게 기본값인 나여서 나는 늘 부족한 사람이었다. 몸이 아파서, 마음이 병들어서, 그냥 기분이 좀 그래서 해이해지는 순간 나는 나를 미워했다. 똑같은 사람이 되기 싫다는 이유를 들어 불성실한 사람에게도 나만은 성실하게 대했다. 의미없는, 낭비일 뿐이다. 머리로 알면서도 마음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은 그런 세상이어서인 거 같다. 따듯하고 안온하며 성실하고 서로 헤아려주는, 어느 순간이 와도 내 사람만은 내가 끝까지 믿어주는 종류의 세계 말이다.
내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자주했다. 울적하고 분개하고 눈물을 흘리는, 스스로를 믿지 못해 눈망울이 흔들리는 사람을 볼 때면 힘줘서 말했다. ”그런 날엔 나를 떠올려. 널 못 믿겠다면 날 믿어. 나는 널 믿고, 나는 널 아껴. 나는 빈말 하지 않는 사람이야. 내가 네 곁에 있어.“ 듣고 싶던 말이었다. 허나 듣지 못한 말이기도 했다. 또한, 스스로에겐 잘 해주지 못하는 말이기도 하다. 지금도... 나는 나 스스로에게만은 이 말을 하지 못한다.
인정하자, 나는 너무 지쳤다.
일에, 일상에, 관계에, 매 순간에 나는 긴장하며 살았다. 온몸에 힘이 꽉 들어간 채로 주위를 살피며 상황과 사람에 맞추려고 부단히 애썼다.
나를 믿지 못해서, 나를 사랑하지 못해서. 그래서 이런 나를 누군가 조건 없이 사랑해주는 날이 온다면, 그 사랑을 내면에 품게될 때가 온다면 그 감정과 눈빛과 표현과 말들을 기억해서 나에게 해줄 거라 생각했던 거 같다. 내가 끝없이 이런 종류의 사람을 기다린 건... 내가 뭐든 빠르게 배우는 사람이어서다. 책도, 영상물도 말고... 나는 늘 현장에서, 면 대 면으로 배우며 장점을 빠르게 흡수하는 사람이어서다. 하지만 결국 내가 날 따듯하게 품어주지 않으면, 내가 갖고 있는 감정의 에너지를 실속 없이 타인에게 허비하는 일을 반복하면 그런 사랑을 만나기 어렵다는 걸 너무도 잘 안다.
그렇지만, 어떻게...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나를 있는 그대로 품어줄 수 있을까. 채찍을 휘두르지 않고, 목표와 허들을 깔아두지 않고, 어떠한 성취도 해내지 못한 매일의 나를 어떻게 마냥 따스하게 지켜볼 수 있을까. 어떤 마음으로, 어떤 시선으로, 어떤 눈빛으로, 어떠한 말들로... 어렵다.
나에겐 칭찬이 너무도 낯설고, ’너는 그대로 아름답고 가치롭다‘는 말 역시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으로는 잘 모르겠다. 태어난 모든 생명은 그대로 가치 있다는 명제는 알겠는데, 그 가치라는 걸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좋은 걸 먹고 좋은 걸 사고 흥겨운 걸 보는 종류의 욕망은, 돈을 내키는대로 쓰는 형태의 사치는 순간의 쾌락과 기쁨과 도파민을 만들어내지만 지속성이 길지 않다.
생은 길다.
짧은 거 같으면서 긴 생을, 단단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 안의 가치를 알아봐 주고, 내가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뿜어내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 걸까.
오늘은... 나를 재촉하지 않기로 한다.
스피드에 집착하지 말고 천천히 걸어, 올라보자. 그때의 니 호흡, 코에 닿는 바람의 숨결, 풀의 냄새, 각기 다른 꽃의 모양, 바위의 생김, 발에 닿는 대지의 감촉... 풍성하게 느껴보자. 걷다가 지치면 잠시 나무 그루터기에 기대어 쉬자. 크로키북을 꺼내 풍경을 스케치하듯 그려보자. 이상해도 괜찮아, 어떻게 보면 그대로 예쁜 모양이잖아. 그러한 것들... 니가 사유하고 경험하며 사고하는 세상,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쓰자. 제대로 살풀이하자. 하고 싶은 걸 맘껏 해내고 날뛰어보고 나야 여한이 없는 거야, 그러니... 맘껏 울어도 돼.
기대치 않은 열매가 더 너를 기쁘게 할 거야.기쁨과 쾌락이 순간에 불과하단 것에 서글퍼해도 좋아, 그래도 고여 있진 말자. 슬픔과 불안과 분노와 울증도 어차피 순간일 뿐이란 걸 생각하면 마음이 홀가분해 지잖아. 순간과 영원을 오가자. 글로, 너는 그럴 수 있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 그러니 제발. 너를 속박하지 마. 목줄을 조이지 마. 얽어매지마. 너는 이미 자유롭고, 자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