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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툰 Sep 05. 2023

노감정 기계가 뭐가 나빠요?

번아웃 회사원의 감정연습

  01.


  회사를 휴직하면서 시작했던 것이 2가지 있었다. 


  하나는 수영이었고, 다른 하나는 심리상담이다. 수영은 꼭 배우고 싶었던 것이었고, 심리상담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치료의 일환이었다. 휴직을 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직장에서 겪은 심리적 충격 때문이었으니까. 


  이제 자유형은 제법 하는 편이고, 심리상담은 오늘이 벌써 네 번째였다. 이제는 상담사에 대한 믿음이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르지 않고 매주 루틴처럼 그녀를 찾아가게 되는 것을 보면 말이다.


© priscilladupreez, 출처 Unsplash
과연
이게 도움이 되긴 하는 걸까?

  두 번째 상담을 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그런 의구심이 들었는데 말이다. 첫번째 상담에서는 나를 장기고객으로 유치하고 싶어하는 상담사의 세속적 욕망이 느껴졌고, 두번째 상담에서는 초점을 잃고 헛다리 짚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다음 번엔 상담사를 바꾸든지, 아예 관둬버려야지'


  그런 결심을 하기도 했었던 내가 또 이 자리에 앉아 같은 상담사를 만나고 있다니. 실상 이것 말고는 매달려볼 수 있는 방법이 딱히 없긴 하다. 매일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보내는 것 같은데도,


  - 지난 주는 어떠셨나요?


  그런 식상한 멘트로 시작하는 상담이 네 번이나 이어져온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




  02.


  - 제가 서툰님과 대화하면서 가장 의아한 점이 뭔지 아세요?


  상담이 조금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쯤 상담사는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 자신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자기 감정이 없다는 거예요. 마치 남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 이를테면 휴직을 한 지 1달이 지난 사람에게 후임자가 업무질문을 위해 연락하는 경우가 있나요? 상식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 보통은 그렇지 않습니다.


  - 있다고 해도 흔하지 않을 것 같아요.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사람이 대체 어디 있어요?


  그녀는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나는 그녀가 마치 나의 든든한 지원군 같이 느껴져서 기분이 괜찮았다.


  - 그렇긴 해요.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면 전임자를 배려하기 위해서라도 연락하지 않죠.


  - 그래요! 만약 후임자로부터 매일같이 업무 문의가 들어오면 저는 굉장히 기분이 나빴을 거예요. '네가 나한테 월급이라도 주고 있니?'라고 되물을 거 같아요. 굉장히 무례한 겁니다. 휴직을 나간 날부터는 연락하면 안되는 거예요. 그런데 서툰님은 그 연락을 받고 첫 느낌이 어떠셨나요?


  - 문자내용을 보니까 금방 알려줄 수 있는 거라서.. 알려줬어요.


  - 또 '있었던 사실'만 말씀하시네요. 저는 그때 '기분이 어땠는지'를 묻고 있답니다. 화가 났습니까?


  - 분노라기보다는.. 글쎄, 짜증이 났다고 할까? 맞아요. 짜증이 났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이런 것에 감정소모 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흘려버리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 바로 그거예요. 화가 나면 화를 내고, 짜증이 나면 짜증을 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상담하면서 제가 일관적으로 느끼는 것은 '서툰님은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에요.


  - ......


  - 한마디로 회사에서의 서툰씨는 감정이 없어요.


  상담사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나는 그녀의 말에 비로소 '내가 원한 것이 되었구나'하고 생각했다.



© lucajns, 출처 Unsplash


회사에서는
노감정 기계가 되기.



  03.


  말 그대로 회사에서는 아무 감정없이 기계적으로 일하겠다는 게 내 모토였다. 로보트처럼 말이다. 그 이유로는 여러가지를 들 수 있다.


  우선 내 감정은 한정된 내 자산이기 때문이다. 마치 소모품의 성격과 닮아있는 것이다. 사람의 감정은 끊임없이 솟아나오는 샘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직장에서 감정소모를 많이 한 날이면 집에 와서는 할 말도, 그럴 힘도 없다. 충전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까. 오래 사용한 휴대폰이나 컴퓨터를 꺼두듯이 잠이라도 자고나면 조금은 충전되는 것이 느껴진다.


  또한 회사생활을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공적이든 사적이든 감정을 갖고 사람들을 대해봐야 좋을 일이 없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소통한다고 느꼈던 사람으로부터 오히려 상처받거나, 약점을 잡혀 이용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마지막 이유는 실상 감정으로 해결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사람은 회사생활을 함에 있어서 필살기가 '정치'인 경우가 있다. 사내정치야말로 고도의 감정게임이다. 그러나 나는 정치가 나의 주특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다. 업무처리에 있어서도 감정을 빼는 편이 더 효율적인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가져온 자료가 엉망이면 거기에 실망하고, 화낼 시간에 내가 해치워버리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내 감정은 아껴뒀다가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눌 뿐, 다른 곳에서 불필요하게 낭비하지 말자고. 나는 '노감정 기계', '로보트'가 되기로 결심했었고, 직장에서는 어떤 감정도 갖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만이 내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사생활이 힘들 때마다 생각했다.



언제쯤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노감정 기계가 될 수 있을까?

  상담사의 말에 따르면 나는 마침내 그런 로보트가 되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사실에 감개무량하다기보다는 뒷맛이 썼지만 말이다.




  04.


한 번 생겨난 감정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아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 흘려보냈거나, 휘발되었다고 믿겠지만 그렇지 않아요. 그 나쁜 감정들은 어딘가에 축적되어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번에 그 모든 감정들이 터져나온 겁니다.


  그녀가 일부러 모질게 말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 감정을 자극하기 위함이었을까?


  - 감정이란 건 잠깐 참고 나면 사라지는 거라 믿었는데 아니었군요.


  - 맞습니다. 그것들이 다 어디로 가겠어요? 그리고 중요한 것! 서툰님은 말로 표현을 하지 않는 분이시죠. 그럼 이 쌓여있는 감정들이 어디로 가는지 아세요?


  - 글쎄요.


  - 몸으로 표현되는 겁니다.


  - 몸으로...


  - 번아웃, 공황 장애 같은 방식으로요. 그리고 겉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그 조직에서 없어지는 거예요.
투명인간 아시죠?
'없는 사람'을 과연 누가 배려해줄까요?




  그러면서 그녀는 나에게 테이블에 있는 컵에 담긴 물을 마셔보라고 했다. 그녀의 지시대로 나는 내 앞의 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 물이 차갑습니까?


  - 아니오. 미지근합니다.


  - 그래서 좋습니까?


  그때 그녀는 약간 심술궂은 표정을 지어보였기 때문에 처음엔 장난을 치는 거라 생각했다. 내가 머뭇거리자 그녀는 다시 한 번 물었다.


  - 물의 온도가 적당한가요, 아니면 마시기 싫은가요?


  - 괜찮아요.


  - 그건 좋다는 뜻인가요?


  - 예, 좋습니다.


  - 좋아요. 그렇게 표현해보세요. 오늘부터 모든 사물과 현상을 보면서 연습해보는 겁니다. 좋다, 나쁘다, 싫다.


  그렇게 심리상담과정에서 첫번째 숙제를 받아왔다. 나는 마치 아이가 처음 말을 배우듯 감정표현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자면, 표현하지 않으면 누구도 내 존재를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회사에서 생존하기 위한 목적으로 스스로를 기계로 만들었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런 나를 인간으로써 바라봐주진 않았던 것 같다. 도무지 말이 안되는 업무지시를 내리고, '저 사람이 어떻게든 하겠지' 하고 엉망인 데이터를 던지곤 했으니까.


© rocknrollmonkey, 출처 Unsplash


하여,
다시 인간으로 되돌아가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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