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툰 Sep 08. 2023

그 남자의 수영팬티가 짧아지는 이유

삼각팬티 입고 출근하기

  01.


  그 남자의 새하얀 수영 팬티.


  월요일 아침, 수영장에 들어서자마자 내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지난주까지만 해도 나와 같은 무릎 근처까지 오는 4부 길이의 수영복 바지를 입었었다. 그런데 오늘은 핫팬츠와 다름없는 2부짜리 수영복을 입고 온 것이다.


  고작 4부에서 2부로 바뀌었을 뿐인데 이렇게 사람이 달라 보이다니. 흡사 수영강사의 분위기까지 나는 것이 그의 자태는 실로 늠름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나의 내면 깊은 곳에는 숨길 수 없는 아니꼬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 timmossholder, 출처 Unsplash




  02.


열등감!

  내가 그의 눈부신 색상의 수영복에 반감을 가지게 된 이유는 굳이 내면을 탐구하고 성찰할 필요도 없었다. 그것은 명백한 열등감으로부터 유발되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속한 초급반에서 최고의 실력을 가진 그는 이미 2주 만에 자유영을 마스터하고 배영 연마에 한창이었다. 


  아, 그때 나는 뭐 했냐고? 


  그가 0.7미터 수심의 물살을 가르며 고속정처럼 치고 나갈 때, 나는 발차기 연습을 했다. 킥판을 붙들고 50분 동안 발차기를 하면 먹은 것도 없는데 헛구역질이 난다. 그걸 참고 두어 번 더 레인을 왔다 갔다 하고 나면 강사가 이제 집에 갈 시간이라고 알려준다.




  03.


  - 한 칸 뒤로 자리 옮겨도 괜찮을까요?


  가끔 강사가 그런 제안을 해올 때가 있다. 수영을 시작하고 나서 자주 듣게 되는 멘트다. 실력이 늘어서 나보다 수영속도가 빨라진 사람은 내 앞으로 간다. 바꿔 말하면 내가 뒤로 밀려난다는 뜻이다. 


  이게 참 민감한 것인데 실력차이가 그대로 드러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군소리 없이 강사의 말에 따르곤 했다. 그리고 다행히 이제 나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었다. 한 사람, 두 사람 내 앞으로 보내다 보니 나는 더 이상 밀려날 곳이 없는 곳까지 와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지금 다니고 있는 수영장 초급반 중에서도 최하위권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 


 


  04.


  나는 그래도 기뻤다. 나의 최우선 과제였던 물에 뜨기에 성공했고, 놀랍게도 나는 아주 조금씩, 정말 조금씩 실력이 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내가 분명히 체감하고 있었지만 워낙 비밀스러운 현상이었으므로 강사나 다른 회원들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훗.


  그런데 우리 초급반 우등생은 어떤가? 보기에도 민망한 2부 팬티를 입고 나타나서 만천하에 '내가 1등이다'라고 포효하는 듯했다. 그 꼴을 보자니 괜스레 배알이 꼴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내 눈에 또 한 사람이 포착되었다.



  저건 또 뭐지...?


  05.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하얀 팬티남과 함께 초급반 선두를 다투는 한 여성회원이었다.


© lazybonesaustralia, 출처 Unsplash


  그녀는 새파란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온 것이다. 다들 주말에 쇼핑이라도 다녀온 것일까? 그녀의 수영복에는 마치 이온음료 광고에라도 나올 법한 가을하늘의 푸르름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나는 몸을 풀면서 나란히 서서 농담을 주고받으며 스트레칭하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실력이 비슷한 그 둘은 통하는 것이 있는지 종종 수영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곤 했었다. 그 또한 내 질투의 대상이었음은 당연했다. 목표치가 낮다 한들 나도 잘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 둘을 보며 내 속에 들끓고 있던 못난 감정은 어느새 사그라드는 것이 느껴졌다. 잘하니까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니까 그것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그 애정의 대상이 수영이라면 표현수단이 수영복 말고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못난 나'는 서서히 희미해지고, 순수하게 그들을 부러워하는 나만 남게 되었다. 못난 내가 허공으로 사라지며 말했다.



© chrisjoelcampbell, 출처 Unsplash
이건 배신인데.


  06.


  한때는 나도 그들 같았던 적이 있었다. 수영장이 아닌 회사에서. 입사 후 약 10년 동안은 그랬던 것 같다. 회사에 투신하는 것이 당연한 책무라 믿었고, 어떤 일이든 '쟤한테 맡기면 그럴듯한 결과물이 나온다'는 평판을 듣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앞에서 빌빌 대는 선배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고, 뒤에서 스포츠카처럼 쫓아오는 후배들은 '그래봤자 넌 거기까지야'하고 여유 있게 따돌리는 게 가능했었다. 



만약 회사 출근복장이 
수영복이었다면? 


  나는 보란 듯 손바닥만 한 삼각팬티를 입었을 것이다.




  07. 

  

  아이가 태어났을 때부터였다. 일보다는 가정에 더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부터 온몸을 담갔던 회사에서 한발 빼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업무에 소홀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본격적으로 평점관리를 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 번아웃이라니. 휴직이라니.


  처지가 이렇게 되고 보니 평소 내 앞길 막고 있는 것만 같던 선배들이 이해가 되었다. 일이든, 정치든, 술이든, 골프든 자신이 가진 무기를 활용하여 나름 하는 데까지 하면서 거기까지 간 것이다. 지금의 내 입장에서는 중도하차 없이 수십년을 쉬지 않고 그 자리까지 갔다는 것 자체에 존경심이 들기까지 했다. 


  그런 한편 내 뒤에서 틈이 보이면 언제나 풀 엑셀 밟기 위해 대기 중인 후배들도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솔직히 아직은 그들에게 따라잡히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면서도 내가 여기서 더 속도를 높일 수 없다면 서서히 길을 비켜줘야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내가 반듯하게 닦인 길 위의 장애물처럼 보일 수 있을 테니까.


  실상 길은 이미 비켜준 것이나 다름없다. 휴직계를 내며 나는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고꾸라졌고, 그들은 경쟁상대가 하나 사라져서 내심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수영장에까지 와서 승진 생각이라니. 아무튼간에 지금 나는 수영에만 집중하면 된다. 


  오늘도 나는 수심 0.7미터에서 발버둥 칠 것이다. 어제보다 1미터라도 더 전진하기 위해. 헛구역질이 나고 강사가 이제 집에 가도 좋다고 할 때까지.



© talahria_rose, 출처 Unsplash






 







이전 03화 렉스턴 차장의 비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