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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툰 Sep 20. 2023

회사는 왜 호구를 좋아할까?

  01.


  나는 리로 약 3년간 일 했었다. 동기들에 비해 비교적 빨리 과장을 달았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만약 누군가 내게 '그 시절에 제일 생각나는 게 뭐야?' 하고 묻는다면 한 가지는 확실히 답할 수 있다. 그 시기에 승진을 앞두고 가열하게 달리는 팀장을 만나 고생한 기억밖에 없다고 말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만큼 굴렀던 때가 없었던 것 같다.



© austindistel, 출처 Unsplash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르고 돌아보니 그것이 내 삶의 자양분이 되었다. 그때 나를 눈여겨보던 간부들이 승진심사 때 알게 모르게 도움을 주었을 것이고, 십 수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배웠던 업무 스킬 덕분에 어딜 가서든 한 사람 몫은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코피 터지며 일하던 시절에도 연애를 했고 결혼까지 했다. '안된다는 건 거짓말'이라던 당시 팀장의 말이 그렇게 싫었는데 내가 스스로 증명한 셈이다. 여담이지만 지금 그 팀장은 지금 내가 가장 의지하는 형님이 되었다.




  02.


  승진을 위해서는 시쳇말로 목숨을 걸어야 했다. 대리였던 나는 아직 승진 대상자 리스트에 올라가기엔 이른 시기였지만 팀장은 달랐다.


  그러고 보면 당시 팀장도 사활을 걸고 야심 찬 프로젝트를 진행한 셈이었다. 승진을 위해서는 남들보다 튀어야 했고, 그러려면 임팩트 있는 아이템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팀장은 그 프로젝트를 낚아채는 것에 성공했지만 그만큼 리스크는 있었다. 상당히 큰 예산이 투입된 만큼 회사도 부담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사업의 아우트라인을 그리는 것까지도 힘들었지만, 실제 계약 체결까지 가는 단계는 마른 수건을 쥐어짜는 과정이었다. 나를 포함해서 4명의 인원이 팀장을 중심으로 거의 TF팀처럼 그 프로젝트에 참여했었는데, 그 팀원들은 이미 모든 힘을 소진했음에도 팀장은 조금 더 가보자고 다그치는 것이다.


© luisviol, 출처 Unsplash


  팀원들은 지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팀장에게는 승진과 앞으로의 직장생활의 명운이 달려있었으나 팀원들에게 보장된 반대급부는 없었으니 말이다.




  03.


  팀장은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과장은 더는 못하겠다며 대놓고 배를 째는 등 미친 척을 서슴지 않았고, 중간서 허리역할을 하선배 대리는 숨겨왔던 육아휴직 계획을 공개했다. 


  그 휴직이라는 것도 당장 신청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여차하면 신청하겠다는 것이니 '더 이상 나 건드리지 마'라는 협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다고 멋모르는 신입을 즉시 전력으로 투입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과는 뻔했다. 업무 파악이 어느 정도 되어 있고, 미혼이라 야근도 자유로워 보였던(누구 마음대로?) 남자 대리가 팀장의 오른팔로 당첨된 것이다. 


  그래, 그게 바로 나였다.


  다른 팀원들의 서포트는 계속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2인 체제 프로젝트로 전환되었다. 다행히 일은 잘 마무리되었다. 팀장은 영전하여 박수를 받으며 부서를 떠났고, 나 역시 그때 잘 받아놓은 평정을 바탕으로 동기들보다 빠르게 승진했다. 그래봤자 고작 1년 빠른 것이었으므로 잃어버린 워라밸에 비해 의미 없다고 생각했지만.


  


  04.


  재미있는 것은 내가 승진하며 타 부서로 이동하는 과정에 있었다. 그동안 내가 맡았던 일 중에 수당관리 업무가 있었는데 그 일을 맡겠다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돈을 만지는 일이라 민감하기도 했던 탓에 좀처럼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 업무의 후임자를 찾기 위해 자그마치 부서회의까지 2차례나 진행하는 과정에서 나는 속으로 '이게 이럴 일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이걸 군말 없이 해왔던 나는 뭔가?'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그리고 내 업무를 이어받은 후임자는 계약직이었는데 인계를 받던 중 돌연 사표를 써버렸다. 부모님도 아니고 외할머니께서 편찮으시다나? 실제 그 친구의 사정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아마 업무부담 때문일 거라는 짐작밖에 할 수 없었다.


© simmerdownjpg, 출처 Unsplash


  재밌는 것은 이후 새롭게 내 업무에 배정된 사람은 갑자기 육아휴직을 나가버렸다는 사실이다. 내 입장에서는 할 만큼 했기에 다행히 더 이상의 인수인계로 피곤할 일은 없었다. 나중에 일했던 부서에 가보니 내 업무를 3명이서 나눠하게 된 사실을 확인하고는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부서 회의를 해야 하고, 퇴직하고, 휴직을 나가야 할 만큼 맡기 싫은 기피 업무를 그동안 나 혼자 다 하고 있었구나.'




  05.

 

그래서
네가 동기들보다 빨리 승진한 거야.
좋게 생각해.

  그때의 설움을 꺼내기라도 하면 주변에선 모두 그렇게 얘기한다. 물론 그 상황을 내 의지로 피할 수 있었던 처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선택권이 있다는 가정 하에 '수년 간의 무너진 워라밸'과 고작 '1년 빠른 승진'이라면 그걸 흔쾌히 맞바꿀 사람은 몇이나 될까?


  물론 그걸 바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 아마 다른 팀원들도 나와 같은 계산이 섰으니 업무를 받지 않으려 회의를 하고, 휴직을 하고, 퇴직을 했겠지. 그리고 가장 충성심이 높은 아니, 내구성 좋은 녀석을 골라서 승진을 시킨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그 친구도 몇 년 뒤 번아웃으로 고꾸라져버릴 줄이야.


© alex_andrews, 출처 Unsplash


  어쩌면 사람마다 에너지 총량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다. 물론 개인의 노력과 역량으로 그 총량을 키워갈 수도 있겠지만 보통은 타고난 대로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한정된 에너지를 어떤 시기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승진 타이밍이 1~2년 빨라지거나 늦어지는 게 아닐지. 


  물론 이것은 '을'의 입장인 우리 같은 사람들이 '알아서 잘' 관리해야 하는 문제일 뿐이다. 어느 쪽이 됐든 회사는 타격이 없다. 그런 자리에 지원하겠다는 에너지 충만한 '호구'는 얼마든지 널려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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