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2년 전, 딸아이의 유치원 졸업식이 있었다. 그것이 처음으로 부모가 참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유치원 행사였다. 코로나19로 인해 딸이 유치원을 다니던 3년 중 2년 동안은 행사 참석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공개수업은 고사하고 부모들이 감격해서 울 수밖에 없다는 학예회도 동영상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졸업식은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감사했다.
아직 병아리 같기만 한 이 꼬맹이들이 이제 초등학생이 된다니.
운동장에 줄을 맞춰 서 있는 아이들을 보니 감개무량하다는 표현이 피부로 와닿았다. 졸업식 행사 중에는 아이들이 부모님들에게 상장을 수여하는 행사가 있었다. 대표로 몇 명의 어린이가 일어서서 상장 내용을 읽는데, 많은 아이들이 다음과 같은 내용의 발표를 했다.
- 돈 버느라 고생하시는 엄마에게 이 상장을 드립니다!
- 항상 일 하시느라 고생하는 엄마, 아빠 키워주셔서 고마워요!
처음엔 귀엽기만 하다가 나중에는 웃프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직 내 아이가 엄마, 아빠가 밖에서 돈 버느라 너무 고생하는 것처럼 느끼는 게 싫었다. 물론 아이가 노동이나 돈의 가치를 하찮게 여기는 것도 원치 않지만 말이다. 아직은 철없어도 될 나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그간 정말 고생했던 기억들이 떠올랐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힘들었었다. 돈 벌기가 아니, 돈 벌면서 아이 키우기가.
02.
딸아이가 유치원을 다니는 동안, 아내는 탄력근무제도를 이용해 정시보다 늦게 출근하면서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었다. 나는 정시 퇴근을 해서 유치원에 아이를 픽업하러 가는 역할이었다. 정시보다 2~3분만 늦게 나와도 러시아워에 갇혀서 유치원에 도착하는 시각은 기하급수적으로 늦춰졌다.
그야말로 전쟁 같은 3년이었다.
가령 퇴근 무렵 걸려오는 전화를 무심코 받았다가 진땀 빼는 일이 허다했다. 직장에서는 오늘 연락 와서 오늘 처리해 달라는 일도 많았지만, 지금 연락 와서 지금 처리해 달라는 일도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퇴근 시간에 임박해서 급히 처리해야 하는 업무지시를 받을 때면 그야말로 낭패였다.
정 안되면 주변 동료한테 구원요청을 부탁한 적도 있었지만, 그것도 매번 되는 일은 아니었다. 어떤 야박한 동료는 냉정하게 거절할 때도 있었다. '너는 놀러 나가면서 일은 왜 내가 해야 하냐'며 따져 묻는 사람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해야할 작업까지 다 끝내놓은 데이터를 취합만 해달라는 건데도 못해줍니까?'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나는 늘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다. 또한 그걸 따져 물을 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30분 아니, 딱 10분이라는 시간만 더 준다면 될 일인데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서 울면서 일한다는 육아 선배들의 말이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 무심하게 움직이는 시계바늘을 보며 아빠만 기다리고 있을 아이 생각에 피가 말랐다.
03.
그런가 하면 갑자기 잡히는 의미 없는 출장, 회식도 지뢰처럼 내 발목을 붙들기 일쑤였다. 사무실 회식이나 출장이 잡히면 나도 모르게 신경이 곤두섰다. 그날은 아이 픽업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내와 함께 동선에 대해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을 못해도 비난을 받지만 회식에 빠지는 괘씸죄는 그것대로 부담이 컸다. 좋아서 가는 회식도 아닌데 불참할 때마다 동료들에게도 괜히 미안하고 눈치가 보이기도 했고 말이다.
회식이나 출장 등으로 인해 내가 아이를 찾을 수 없는 날에는 아내가 오후 반차를 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반차도 하루이틀이지 무한정 제공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아내 역시 직장인으로서 급한 업무가 있으면 그조차도 어려워지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회식날엔 007 작전을 방불케 하는 작전을 펼친다. 회식 당일에 내가 아이를 찾아서 회식 장소 근처에 대기하고 있는다. 그러면 퇴근한 아내가 우리 쪽으로 와서 아이만 태우고 집으로 가는 식이었다. 그래도 약속된 시간보다 1~20분 정도는 늘 늦어서 '죄송합니다' 소리를 해야 했다.
출장이 있는 날은 어떻게 했냐고?
그런 날엔 아내가 무조건 휴가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불필요한 출장은 일절 가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사무실에서의 내 이미지는 공공연하게 현장 가기 싫어하는 사람으로 취급받는 듯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 직무상 출장이라고 해봐야 현장견학 수준의 일과를 보내며 인적 네트워크를 돈독하게 하는 것인데, 물론 여유가 된다면 가서 나쁠 건 없겠으나 애석하게도 나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정말 없었다.
04.
매일 같이 이런 악전고투를 치러야 정시퇴근이 가능했다. 그렇게 해서 유치원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신발장에 남아있는 신발이 몇 켤레인지부터 확인했다. 딸아이 외에 다른 친구들의 몇 명이나 살펴보는 것이다. 아직 유치원에 친구들이 많이 남아있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면 딸이 덜 외로웠을 테니까.
하지만 신발장에는 신발이 3켤레 이상 있은 적이 없었다. 대부분 육아 도우미를 고용하는 것인지 유치원 종일반에 아이 맡기는 부모님들이 거의 없었다.
'아니, 맞벌이는 우리 집 밖에 안 하나?'
그런 의문이 들 정도였다. 유치원에 2명이 남아있으면 그중 하나는 우리 딸이었고, 1명이 남아있다면 그 1명이 우리 딸이었다.
- 오늘은 친구 아무도 없었어.
내가 꼴등으로 도착한 날엔 딸은 조금 뾰로퉁해진다.
- 에잇, 오늘은 실패다! 미안해, 내일은 아빠가 더 일찍 와볼게. 아빠 기다리는 동안 혼자 뭐 했어?
- 블록 놀이 했어.
- 안 심심했어?
- 응, 재밌었어. 선생님하고 얘기도 했어.
- 좋아, 그럼 내일 아빠 몇 등으로 와볼까?
- 음~ 꼴등으로만 안 오면 돼.
- 좋았어!
유치원에
1등으로 도착하기
딸을 픽업하러 다니는 3년 동안, 내가 가장 1등으로 하고 싶었던 게 그것이었다.
순간순간 힘든 때는 많았지만, 그래도 세 식구가 즐겁고 행복하게 고군분투했던 것 같다. 어느덧 딸아이는 초등학생이 되었고, 나의 짧은 육아휴직도 벌써 3달이 채 남지 않았다. 그래, 앞으로도 잘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