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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툰 Sep 13. 2023

자기애? 개나 줘버려!

  01.


  당신은 자기애가 큰 사람이군요?

  

© giulia_bertelli, 출처 Unsplash


  처음 그 얘기를 듣고 어리둥절해졌다. 직장에서 마음을 터놓고 지내던 몇 안되는 동료가 한 말이었기에 더더욱 할 말을 잃을 수 밖에 없었다. 동기이자 형이었던 그 사람은 내가 휴직을 내기까지의 과정을 전해듣고는 대뜸 그렇게 말했다.


  자기애? 자기애라고?


  딸아이가 무심코 입에 넣은 반찬에서 양파만 쏙 골라 빼내듯이 나는 못내 그 단어가 삼켜지질 않았다.


  


   02.


  휴직을 결심했던 날, 나는 급히 오후 휴가를 내고 정신과를 찾았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내 안의 뭔가가 고장이 났다는 건 확실했다. 외상이 아니니까 내상일 것이고, 정신이나 마음에 문제가 생긴 것이라 추측되어 정신과부터 찾은 것이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어떤 증상이 발현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때 나를 서서히 잠식해가던 절망감과 좌절감이 나를 완전히 집어 삼키고 나면, 그 이후로는 내가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병원까지만 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아직 생존본능이 남아있을 때 거기까지만 하고 나면 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03. 


  사실 그조차도 몹시 귀찮고 피곤하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벌써부터 나를 죽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경각심으로 병원에 전화했고, 가장 빠른 시간대로 예약을 잡은 것이다. 내가 아는 나는 결코 약속을 어길 사람이 아니므로 그렇게 해놓는 것만으로도 안전장치를 한 것처럼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 calina, 출처 Unsplash


  나 하나 어떻게 되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내 가족들은 누가 지킨단 말인가? 그런데 이런 나에게 자기애가 큰 사람 같다고?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제 발로 정신과에 찾아가냐고?


  그렇다. 겉으로는 웃어 넘겼지만 사실 나는 매우 화가 났었다. 그리고 항변하고 싶었다.



  그건 내 가족을 위한 것이었다고요.
자기애 따위의 것이 아니라!


  04.


  하지만 나는 왜 그렇게까지 기분이 상했던 것일까?


  설사 그 모든 게 가족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한들 그게 뭐가 나쁘단 말인가. 직장에서는 동료나 상사를 위해 일하고, 집에서는 가족만을 위한다고 믿고 싶었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 모든 불편한 상황을 야기한 것은 내가 아니라 실은 내 가족때문입니다.' 라는 핑계라도 대고 싶었던 것일까?


  '서툰씨는 자신의 감정이 없는 사람 같아요. 자신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제3자에 대해 얘기하는 것처럼 보여요.'


  문득 심리상담사의 조언이 떠올랐다. 어떤 것을 봤을 때 '좋다, 싫다' 감정 표현 연습하기. 그리고 나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기. 그래, 조금씩 연습해봐야겠다.



© ruthson_zimmerman, 출처 Unsplash


폐를 끼쳐 송구합니다만 
모두 '나'를 위한 것입니다.
 
이걸 '자기애'라고 표현하신다면?
네, 정확히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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