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다가 남의 자존감 긁는 소리
01.
출근하기 싫은 직장이라고 해서 거기에 악의 무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도 때로는 편한 동료들과 점심식사를 함께 하곤 한다. 식욕이 없어진 뒤로 점심식사는 건너뛰는 것이 습관이 됐지만, 가끔은 일부러라도 그런 자리에 참석하려고 노력한다.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들으면 의식 환기도 되고, 다들 비슷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날도 오랜만에 동기들과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였었다. 거기서 한 동생이 내 왼쪽 손목을 보고 그러는 것이다.
- 우와, 이게 언제적 모델이야? 이 시계가 아직도 나와요?
02.
그때 내가 착용한 시계는 일본 유명 브랜드인 C사의 디지털 시계였다.
그 친구가 놀랄만도 했던 것이 워낙 오래된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모르긴 해도 출시했을 당시에는 획기적이었겠으나 지금은 '빈티지'라는 문구를 달고 광고되고 있었다. 나도 처음 이 모델을 발견하고는 아직도 판매한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어릴 적 추억도 생각나서 겸사겸사 사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나에게 시계란 시간만 확인하면 되는 물건인데 이 동생은 그렇지 않았나보다.
- 아이고, 이러지 말자. 이런 게 우리 자존감을 떨어뜨린단 말야.
이번에 나처럼
애플워치로 바꿔요.
03.
- 그래, 그래. 알았어.
나는 그렇게 웃어 넘기려 했는데 이 친구는 집요했다. 아니면 자기가 최근에 산 애플워치에 굉장한 자부심이 있었든지.
- 비싼 거 안사도 돼요. 30만원짜리도 있어. 어때요, 예쁘죠?
- 그래, 예쁘다. 생각해볼게.
- 아냐, 생각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사. 시계가 그게 뭐예요, 정말.
이 친구는 진심으로 속상하다는 듯 내게 부탁을 하다시피 애플워치 구매를 권했다. 그렇다고 나에게 뭐 하나 보태줄 생각은 없을 거면서. 그건 그렇고, 내 시계가 그렇게 볼품없나?
04.
점심시간에 신상 맛집 가기, 왠지 기분 꿀꿀한 날에 입을 예쁜 옷 쇼핑하기, 높은 분이랑 어렵게 잡은 저녁 식사 자리 가기, 소득에 비해 분에 넘치는 해외여행 다녀오기, 아직 그럴 때가 아닌 것 같은데 골프 배우기, 그리고 그렇게 배운 골프로 높은 분이랑 라운딩 가기.
직장생활의 고단함을 그런 것들로 푸는 사람들이 많다. 아마 내게 애플워치 구매를 강권(!)했던 동생도 그렇게 잠시나마 시름을 잊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연 그런 것들을 통해 본질적인 위안을 얻을 수 있을까?
나는 직장 내에서만큼은 그런 것들에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오히려 직장 밖에서는 겉으로 보여지는 행색에 신경쓰는 편이지만, 굳이 회사 안에서 그럴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일할 때 입는 옷이야 어차피 전투복(!)이니까 미적 감각보다는 단정하기만 하면 되고, 시계는 시간만 잘 맞으면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구내식당에서 밥 먹지 않는다고, 오늘따라 더 예쁜 옷을 입었다고, 멋진 시계를 찼다고 해서 회사생활이 해결되는 것이 있다면 나도 얼마든지 그러고 싶다. 그러나 잠깐 기분이야 좋을 수도 있겠지만 직장생활이 또 그런 건 아니지 않은가. 차라리 이번에 애플워치가 너무 잘 나왔으니 애플 주식을 사라고 한다면 또 모를까.
그리고 마음에 담아둔 것은 아니지만,
내 시계가 어디가 어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