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네일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까마귀를 기억하며
나에게 여행은 신포도였다. 높은 나무에 달려있는 포도를 보고, 저건 셔서 못 먹을 거라고 생각했던 여우의 마음. 꼭 나의 마음과 같았다. 대학생 때 흔한 유럽 배낭여행 한 번 가지 않았다. 친구들이 한 달만 갔다 오자고 보챘지만 그때 나는 꽤나 조급했다. 이미 휴학을 한 학기 했고, 언론고시도 1년 안에 끝을 봐야 하고, 그런 나에게 유럽은 큰 의미가 없었다. 친구들은 사진을 보내왔고 나는 이유 모를 승리감을 느끼며 미디어학부 1층 MTC에서 공부했다.
고등학교 때는 원하는 대학에 가기 위해 모든 걸 포기했고, 대학에서는 원하는 직업을 갖기 위해 모든 걸 놓았다. 결국 다 이뤘지만 나라는 존재는 몸 한가운데 구멍이 있는 것 마냥 휘청 저렸다. 나의 영혼을 따뜻하게 덥혀줄 기억도 낭만도 없었으니까. 힘들 때 돌아볼 기억은, 일기장에 내가 남긴 몇 줄의 응원이 다였다. 끝내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게 됐을 때 나는 모든 걸 스스로 놓고 떠났다.
인생은 쉽지 않다. 그렇게 한가롭게 누워있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내 좋아하는 일을 찾았고, 또 경주마처럼 살면서 가고 싶었던 회사로 이직을 했다. 그게 작년 말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숨 쉬고 싶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여행을 떠났다. 강릉으로, 제천으로, 삿포로로, 교토로, 그리고 연말에는 여수와 순천으로 갈 작정이다. 어쩌면 나 여행을 좋아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떠나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가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올해 여름에 삿포로에 갔는데, 다들 겨울이 제맛이라는 곳에 여름에 가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회사 동료들과 함께 떠난 여행이었다. 큰 기대 없이 갔는데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알았다. 나는 여기를 사랑하게 되겠구나. 서울은 10분만 밖에 있어도 등에 땀이 맺힐 정도였다. 그러나 삿포로는 초가을의 선선함을 안고 있었다.
365일 중에 고작 10일 정도만 느낄 수 있는 순간을 그곳에서 한 번 더 만난 것이다. 홋카이도 대학 식물원을 걸어 다니고, 여유롭게 온천물에 몸을 담갔다. 장염에 뱃속이 난리 났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동네를 내 발로 만날 수 있었다. 낭만 그 자체인 겨울 삿포로도 좋지만 나에게 삿포로는 여름의 고장이었다.
<작은 기쁨 채집 생활>이라는 책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가만 보면 나는 늘 때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지냈다." 비슷한 마음이었다. 지금은 일에 더 집중해야 할 때니까, 모의고사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이번에도 1등을 해야 하니까. 그렇게 미루다 보니 행복은 더 멀어진 게 아닐까. 내 마음속에 죄책감을 조금 덜어내려고 한다. 일단 내 인생은 나부터 행복해야 하니까. 혹시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행복에 주저하고 있다면, 같이 한 발만 나가보자고 말하고 싶다. 아직 나도 두렵긴 하지만 말이다.
Series. 20대 직장인의 뿌리 찾기 프로젝트
내 안을 채우고 있는 한 가닥을 찾아보는 과정.
그 한 가닥이 내 노잼을 뒤흔들 수 있다면.
프롤로그_ https://brunch.co.kr/@a0bd4d3b8469449/48
연재 요일 _ 화 / 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