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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윤헌 Dec 05. 2023

혜택

혜택     

 ‘바르게 산다는 것’과 ‘잘 사는 것’이 어떻게 차이가 날까? 과정을 중시하는 것, 결과를 중시하는 것의 차일까? 아니면 첫 시도부터 방향이 틀리는 것일까? 인간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 맞을까? 유덕한 삶과 배려하는 삶은 공통점이 무엇이고 틀린 점은 무엇일까? 우리는 수많은 의문점을 가지고 살면서도 범부(凡夫)들이 공통으로 추구하는 삶의 목표는 최고의 의사결정 기구에 참여하여 자기 독보적인 영향력으로 수많은 업적과 실적을 쌓고 주변인의 인정과 찬사도 받으며 가족의 건강과 본인의 탁월성도 사회적으로 성취하고 가장(家長)으로 존중받으며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싶은 인물이 되는 것이 가장 높은 현실의 꿈일 것이다.     

 선생님으로 시작한 세월이 30년이 되었다. 참 오랜 세월을 한 곳에서 활약했으니, 전문가로 손색이 없어야 하지만 대부분의 일에 미흡함을 느끼며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이 한 치도 가까이 다가오지 못함에 늘 고심하고 고민하던 일들이 실타래처럼 헝클어져 페르세우스의 날카로운 칼로 싹둑 잘라내지 않으면 매듭을 풀기 어렵다는 판단이 선다. 고질적인 문제가 왜 30년 동안 느끼지 못했단 말인가? 아니면 고질적인 문제가 아닌데 내 마음이 변해서 내가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 지점에 달성하기 어려우므로 나타난 개인적인 문제일까? 아마도 둘 다 아니라고 나는 부인하고 싶다. 나의 개인적인 심정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문제와 교직의 폐쇄성에서 오는 문제와 사학의 교직 농단에서 오는 문제이기에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풀기 어려우므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학교 현장에서 어떤 일을 기획하고 실천하는 최고 의사 결정에 가장 영향력을 발휘하는 곳은 교장임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아직 교장의 권한이 막강하기에 쉽게 ‘갑(甲) 질’을 한다. 갑(甲) 질을 하면서도 그것이 갑(甲) 질인지도 모르고 행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대다수라는데 문제가 있다. 그래도 우리 교육 현장이 카오스(Chaos)로 점철되지 않는 것이 신기하다. 수학 능력 시험이라는 국가시험 덕분에 교과 내용의 중요성은 사교육에 넘겨준 지 오래되었으면 인성 교육이라도 제대로 시켜 주어야 하지만 아직 일제 잔재로 생각되는 교문 지도에 엉성하고 쓸모없는 교칙을 핑계로 치마 길이나 화장을 단속하는 시대착오적인 사고로 ‘창의적인 사회인’의 배출을 내건 학교 목표에 역행하는 것도 모르고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대다수의 월급쟁이 교장을 몰아내고 바른 교육의 초석이 되는 교장을 선임할 수 없을까?     

 어떤 능력을 검증받아야 할까? 공립은 교육청의 이권에 따라 무작위로 교장을 발령 낸다. 연수 점수에 의하거나 경력에 의해 공정하게 발령 낸다고 하지만 그것이 더 큰 문제이다. 교장 공모제란 좋은 틀을 적용하면 된다. 어느 학교 교장 임기 8년을 보장하며 그 고등학교를 어떻게 운영하고 경영할 것인지를 계획서를 받는 것이다. 시골이면 시골 나름대로 맞춤식 교육이 필요하기에 전문가가 필요한 것이다. 서로 간의 인맥이나 사회생활의 적응이 빠른 자가 좋은 자리가 아닌 교육적 소신과 그 학교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여 교육 혁신을 할 수 있는 능력 있는 교장이 필요하리라. 사립은 공립보다 더 암울하다. 교사 중에 성실하고 기획력이 좋아 공평하고 객관적 실력에 의해 승진하는 예도 가끔 있지만, 어쩌면 가장 질이 떨어지고 재단 관계자와 인척이나 아부의 극치로 학생에게 인정 못 받고 교사에게 외면당한 자들이 차지하는 자리가 교감, 교장 자리라고 교육 현장에서 비아냥을 들은 역사가 오래되었다. 이런 분들이 교육관이 있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교장이란 사람이 탁월한 신의 능력처럼 되면 많은 문제점이 도출되겠지만 탁월은 물론이고 능력도 없고 교사를 아우르는 능력도 없고 교사나 학생에게 인정도 받지 못하는 교장이 더 많은 문제점이 될 수 있다. 교사나 학생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의 탁월함이 있는 자는 자신을 좀 내려놓으면 되지만 그 능력이 없는 사람은 단시간에 그 능력을 끌려 올릴 수 없기에 더 문제가 된다. 어느 영화에서 난파선 구명보트에 정원 이상을 살려내고도 승선한 사람들에게 고발당하여 감옥 벽에 쓴 글이다. ‘God is man, Man is god’ 이런 사람은 탁월성이 있기에 많은 사람을 구하고도 벌을 받았다. 그래도 얼마나 대견한 사람인가?     

 교직 초창기는 열심히 하면 종국에는 교감, 교장에 승진되어서 명예롭게 교직을 떠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집과 학교를 오가며 방학도 없이 학생 지도에 최선을 다하며 충실한 삶을 유지하여 교장으로 신임도 받았다. 교직 경력이 쌓이고 교장이 몇 번 바뀌면서 집단속에 소외감이 서서히 밀려왔다. 내가 경북 출신이라 경남의 모 대학 출신들의 저항은 받았지만, 학생 지도에 전심전력했고 성과도 좋은 편이라 괘념치 않고 묵묵히 교직에 충실했지만 ‘진인사대천명(盡人事 待天命)’이란 희망은 산산조각이 났다. 승진한 사람들과 비교하여 내가 더 잘했다는 감정적 주관적 판단이 아니라, 정량적, 정성적 평가가 나쁘지 않은데 승진의 가까이 가보지 못했다. 나에게 문제가 많은 것을 안다. 인사권자에게 최소한의 예의 인사라도 해야 하는데 거의 인사권자 가까이 가서도 안 된다는 결백이 나의 존재 이유처럼 마음을 굳혔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아도 청탁에 의한 승진은 죄악이란 신념이 문제다.     

 교감 교장이 못 되어 이틀 정도 마음이 아팠다. 내 능력이 부족한가?라는 의문점 때문이다. 그러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교직 30년 동안 가장 큰 혜택을 본 사람이 나란 사실에 요즘은 매일 웃음이 난다. 입사할 때 보통은 재단이나 교장에게 인사로 얼마의 정해진 금액을 내는 것이 불문율인데 나는 그것만큼은 내 자존심 문제라 생각하여서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교직을 할 수 있는 혜택을 입었고 30년 동안 누구의 간섭이나 지적 없이 자주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진학시키며 오랫동안 학생들 진로지도와 인성 교육에 몸담아 왔기에 졸업생들이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두 번째 혜택이다. 현재의 우리 학교 분위기에서 관리자가 되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관리자가 되어 내 교육관을 펼치지 못해 밤새워 고민하다가 스트레스로 마음의 병에 들지 않는 것이 혜택의 세 번째다. 내가 나의 교육관을 펼쳐 보지 못하는 수모를 회피하려는 것이 아니다. 지면을 통해 말할 수 없는 많은 것이 산재해 있기에 내 교육관을 펼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타 등등의 혜택이 많이 있지만, 교직에서 3가지 혜택으로 마무리한다.     

                                              2018.5.9. 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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