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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윤헌 Mar 26. 2024

참사랑

 60대 중반인지라 머리가 희끗희끗한 창덕은 사장실 소파에 앉아 두 시간 가까이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 표정이 약간 흥분된 상태인 듯도 하고 고민이 많은 사람의 표정도 간간이 비친다. 수첩에 만년필로 무엇을 쓰기도 하고 다시 고개를 천장을 응시하다가 멍한 표정의 모습도 보인다. 큰 움직임 없이 그렇게 앉아 있더니 갑자기 손뼉을 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하늘 향해 두 팔을 뻗어 올리고 만세 시늉을 하더니 종종걸음으로 화장실을 향한다. 참았던 오줌을 배설하고는 기분 좋게 사무실로 돌아와 자기의 안락한 의자에 앉아 컴퓨터 마우스를 손가락 끝으로 조금씩 움직이며 입가에 옅은 웃음기를 띄기도 하고 턱 운동하더니 입을 마구 돌려 턱 운동도 하면서 한 손으로 턱을 쓰다듬기도 한다. 소파에 앉아 만년필로 써 내려가던 수첩을 응시하고 또다시 컴퓨터 화면을 응시한다. 아침에 출근하여 커피 한잔 마시고 전화 통화 몇 사람과 하고는 내내 자기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누가 보면 새로운 사업 계획서를 비밀리에 만드는 모습이다. 오늘따라 직원들이 결재 서류를 가져오는 사람도 없다. 창덕이 아주 기쁘게 작성한 서류는 1박 2일간의 여행 계획서이다.     

 홍창덕은 경북 군위에 태어나 유년 시절을 고향에서 보내고 청소년기부터 대구에서 학교에 다니다가 1980년 초에 K 대학교 기계공학과를 졸업했다. 창덕의 아버지가 창원에 정착한 것은 마산에 수출자유지역이 형성되어 철강 기술자로 한국 굴지의 기업에 취직하여 가족이 모두 이사를 했기 때문이다. 창덕이 고등학교 입학하고 아버지가 마산에 정착한 것이다. M고등학교 전학하려고 하였으나 대구가 교육 도시라 하여 대구에서 자취 생활하면서 고등학교에 다니도록 한 것이다. 창덕의 아버지도 마산에 끝까지 정착한다는 보장이 없었기에 그리 결심한 것이다. 창덕의 아버지는 수출자유지역의 철강업체에 취직하여 기술도 연마하고 돈도 모아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계획도시로 만들어진 창원국가산업단지 안에 있는 방위 산업체에 알루미늄 부품을 만들어 납품하는 작은 중소기업체를 만들었다. 창덕의 아버지는 매사에 성실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남다른 식견이 있어 내실 있는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창덕도 아버지 닮아 성실하고 영민하여 말썽 한 번 부리지 않고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대구의 K 국립대학교 기계공학과에 입학하였다. 대학 4학년 마치고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나이가 가야 한다는 해병대를 지원하여 학사 장교로 입대했다. 진해에서 훈련받고 포항에 배치받아 군 복무를 끝내고 서울 쪽으로 취업을 생각하다가 아버지 공장이 있는 창원을 선택했다. 창원은 1970년대 중반 기계공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며 방위 산업체를 활성화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계획된 도시였다. 전시에는 비행기 활주로로 사용하기 위해 창원대로를 왕복 10차선을 만들기도 하였다. 지금이야 출, 퇴근 시간에 차가 막히지만 70년대 말에는 황량하기 그지없는 도로였다. 

 창덕은 창원에 있는 대우 그룹 소속의 알루미늄공장에 기사로 취직하였다. 직원은 생산직 근로자 300명쯤 되고 사무직원이 50명쯤 되는 비교적 큰 공장이었다. 창덕은 어머니가 해 주시는 따뜻한 밥을 먹고 마산에서 출, 퇴근했다. 그 당시에 근로자 대부분이 구 도심지역의 마산에 거주했다. 성실하고 근면한 아버지와 인품이 유덕한 엄마 밑에서 자란 창덕의 인품도 남달랐다. 공장의 나이 많은 사람은 누구든지 창덕의 예의 바른 행동을 칭찬했고 현장의 반장들이 창덕보다 나이가 많아도 창덕의 일에 대한 지시에 수긍하고 따랐다. 젊은 기사와 숙련공 반장의 갈등은 거의 없었다. 평상시에는 기사가 시키는 대로 반장이 현장의 일을 진행해야 했기에 기사와 반장의 갈등은 늘 있었다. 창덕이 입사하고는 그런 갈등이 거의 없었다. 창덕은 키도 176cm에 훈남형이라 공장 내에 결혼 대상자 1순위였다. 생산직 아줌마들도 자기 옆집의 아가씨를 소개해 주겠다고 했고 사무실 근무하는 아가씨는 창덕을 흠모의 대상으로 삼았고 부장들은 자기 사위 삼으려고 할 만큼 인기가 좋았다. 이 당시만 해도 대졸 사원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창덕은 주변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대학 시절 사귀던 여자와 결혼했다. 창덕의 아내는 미모는 그리 뛰어나지 않고 평범했지만, 재치가 있고 자기를 꾸밀 줄 아는 아가씨로 음악학과를 졸업하였다. 집안이 아주 좋았다. 그 당시 여대생이 별로 없던 시절 사립 H 여자대학교의 음악학과 피아노를 전공하여 졸업할 정도로 집안이 부자였다. 창덕의 아내 집안은 친인척이나 사위가 전부 의사 집안으로 처음에는 창덕과 사귀는 것을 반대했다. 창덕이 아내와 결혼을 결심하고 장인어른이 될 사람에게 인사하러 가던 날에 팔공산에서 대간첩 소탕 훈련을 마치고 대대장의 지시로 바로 휴가를 나왔는데 카빈총을 가지고 아내 될 사람 집에 인사하러 갔던 것이다. 눈초리가 매섭고 짧게 자른 해병대 머리가 인상적인데 그 당시에도 해병대 하면 그리 좋은 인상보다는 거칠고 사고 치는 군인으로 인식되던 시절이다. 창덕의 눈빛과 현관 입구에 세워 놓은 총을 보고 교재와 결혼을 허락했다고 한다.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군 제대 후 바로 취직하고 결혼식을 올렸다. 27살이었다. 그 당시에 여자 나이가 27살에 시집을 가지 않으면 노처녀로 흉이 되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도 어느 정도 재산가였고 처가 집도 재산이 좀 있어 두 사람은 그 당시로는 파격적인 24평 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꾸몄다. 둘은 행복했고 아내는 곧 임신하고 아들을 출산하고 또 3년 후에 딸을 출산하여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갔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창덕이 38살에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과로에 심장마비가 온 것이다. 공장 일이 바빠도 직원을 늘리기보다 아버지가 혼자 다 처리한다고 밤낮없이 일만 하시다가 아침에 일어나니 뻣뻣한 사체(死體)가 되신 것이다. 향년 63세이다. 24살에 장가가서 25살에 창덕이 낳고 남동생 2명, 여동생 1명을 낳아 정말 유복하게 키워 자식들이 자신의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장가들고 시집가서 손자들 재롱떠는 것 보며 살아야 할 아버지가 일에 너무 집착하시다가 그만 참변을 당하신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면 눈앞이 캄캄할까? 이런 일을 천붕지통(天崩之痛)이라고 할 것이다. 

 창덕은 동생과 상의하여 고향에 아버지를 모시기로 하고 장례식을 무사히 치렀다. 회사에서 전도양양하던 창덕은 형제와 협의하여 자기가 공장을 이끌어가겠다고 했다. 첫째 남동생은 철학 박사로 대학에 근무하고 둘째 남동생은 검사 보직을 받아 근무하고 여동생은 교사 부부로 살고 있어 자기밖에 맡은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알루미늄공장이라 창덕이 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창덕은 어머니에게 같이 살자고 하였지만, 어머니는 혼자 살 것이라며 거부하였다, 그래서 어머니 집 가까운 곳에 이사하여서 손자들이 수시로 할머니에게 갈 수 있도록 조치했다. 창덕이 아버지 공장은 상속받아 재무 상태를 보니 부채가 제로였다. 창덕은 아버지에 대한 경외심이 더 높아진 것이다.      

 하루는 아버지 친구가 찾아왔다. 

사무실에서 쭈뼛쭈뼛하시더니 고개를 숙이며 “내가 자네 아버지에게 돈을 빌렸네” 하시며 

“지금은 어려우니 조금만 더 참아, 주면 안 되겠나?”

창덕이 “얼마를 빌렸습니까?”

“자네 아버지가 무슨 말 안 하시던가?” 

“오천만을 빌려서 오늘까지 갚기로 했다네.”

이 당시 오천만이면 마산에서 24평 아파트 한 채 값이다. 그런 돈을 빌려주고도 친구라는 이유로 계약서 하나도 안 쓰신 분이 아버지였다. 양심적인 아버지 친구이기에 찾아온 것으로 보였다. 창덕은 아버지 친구에게 안심시키며 돈이 되는대로 갚으시면 된다고 하면서 너무 감사하다는 말도 했다, 창덕은 돈을 빌려 간 사람이 분명히 더 있을 거란 생각으로 캐비닛을 찾아보았지만 돈 빌려준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창덕은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헤아려 더는 채무 관계에 신경을 쓰지 않고 사업에 몰두하기로 했다. 그 덕분에 기업은 무럭무럭 성장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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