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윤헌 Mar 27. 2024

참사랑

 1960년 2월 12일 새벽 6시 아직 새벽 바닷바람이 차갑게 느껴지는 남포동 조산원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크게 울려 퍼진다. 3번째 출산이라 그런지 어젯밤 늦게 조산원을 찾아왔는데 약간의 진통이 있었을 뿐 그리 힘들이지 않고 여자아이를 출산했다. 첫째 아들 출산에는 거의 혼절 상태까지 갔고 둘째 딸 출산도 머리가 커서 그런지 상당한 난산이었는데 이번에는 2.96kg의 조그마한 아이라 그런지 아주 쉽게 출산한 것이다. 남편은 부산 세관에 근무하며 청렴보다는 세파에 조율하면서 살았는지 수시로 돈을 가져와 부잣집은 아니지만, 일상적인 소비는 늘 넉넉함은 유지하고 살았다. 그 당시에 남편의 직장이 든든하면 맞벌이를 포기하지만, 산모는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초등학교 교사 봉급은 9급 공무원과 비슷한 봉급이지만 농사짓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입이었기에 남포동 골목 안에 큰 집을 지니고 살았다. 보통 방 3칸이면 한 칸을 세를 주었지만, 셋방의 아이들과 다투는 것이 싫어 한집안만 살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유복한 가정에 1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난 아이 이름이 윤세령이다.      

 세령이는 작은 체구로 태어나 어릴 적 잔병치레를 많이 하였고 세령의 부모는 갖은 보약과 비타민 영양제를 많이 먹였으나 초등학교 입학할 때 다른 아이들보다 체구가 왜소하고 공부도 다른 아이들을 따라가지 못하자 한해 유급시켰다. 이것은 세령이 엄마가 교사이기에 발 빠른 결정을 한 것이고 훗날 아주 좋은 결정이 된 것이다. 태어난 연도 보다 한해 후에 학교에 가니 체구도 비슷하고 학교 성적도 중간 이상이 되었다. 보약과 영양제를 많이 복용한 탓인지 성장 속도도 다른 아이들과 비슷하여 세령의 부모는 근심 걱정이 줄어들고 돈이 주는 기쁨과 행복에 만족했다. 몸이 약해 걱정이 되었지만, 세령의 미모는 인형같이 귀엽다는 표현을 주변 사람이 자주 했다. 건강하지 않았기에 돌발적인 행동이 적고 차분하게 움직이고 남의 행위를 빙그레 웃으면 쳐다보는 아주 예쁜 소녀로 커 왔다.      

 인류의 역사가 어느 정도 정착하면서 부잣집에서는 자녀의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한다. 조선 시대에도 양반집 자녀들은 아주 어릴 적부터 교육에 시달려야 했다. 우리나라도 좋은 중학교에 입학 시험이 있던 시절에는 초등학교부터 개인 과외를 받았다. 경제적으로 넉넉했던 세령이 집에서는 오빠와 언니는 중학교 입학시험으로 진학했고 세령이는 무시험으로 중학교 입학하였지만 가난한 아이들이 할 수 없었던 피아노 교육이나 글짓기 과외를 받았다 세령이 어머니는 신여성답게 미래를 예측하여 딸의 교육에 매진했다. 세령 엄마의 노력 덕분인지 오빠는 부산의 국립대학교인 P 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항공사 대기업에 취직하여 영어 교사와 결혼해 비교적 넉넉하게 살았고 세령의 언니도 P 대학교 가정학과를 졸업하고 세령의 아버지 권력을 이용하여 세무감사 운운하며 부산에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잣집에 시집을 보냈다. 부자가 주는 편리함과 누릴 수 있는 삶의 혜택을 누구보다 먼저 깨달은 세령 부모였기에 가능한 결혼이었다. 이를 위해 딸 교육을 맞춤형으로 키웠다. 세령이도 평균화된 부산의 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진학하는데 SKY대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 당시 아이들보다 초등학교부터 영어를 과외 시켰기에 영어 성적이 뛰어나나 영문과 진학은 어려워 부산의 사립 명문인 D 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학과에 입학시켰다.      

 세령은 대학에 입학하면서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고급 눈으로 싸 준 옷을 입고 대학에 입학하니 대학 전체가 세령의 세련된 모습과 미모에 소문이 자자한 것이다. 어릴 적 글짓기 과외로 국어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고 말투도 부산 사투리가 아닌 서울 말씨를 사용했다. 그것은 엄마가 서울 사람이기에 처음부터 지방 사투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덕분에 방송부 동아리에 들어갔고 일주일에 한 번씩 오후 3시에서 4시까지 대학 방송을 진행하여 일약 스타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세련된 옷매무새에 서울 말씨를 쓰며 평범한 체구이지만 다리가 길고 상체가 좀 짧고 얼굴이 작은 황금비율의 몸매라 누구라도 보면 “억”하며 놀라는 세령이가 된 것이다. 세령은 타고난 머리가 보통이지만 엄마의 교육 덕분인지 현실적인 문제해결이나 주변 사람의 시선을 끄는 데는 타고난 재능을 발휘했다. 이 당시에 아가씨의 가슴이 큰 것이 부끄러워 천으로 단단히 싸매고 브래지어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여자의 모습이지만 세령은 그것을 멋스럽게 치장하여 주변 남자들의 시선을 모으는데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원피스의 꽃무늬를 가슴에 치장한 옷을 입는 세련미와 청바지를 입을 때는 딱 붙는 티를 입고 그 위에 카디건을 걸치는 노련미도 보였다. 


 대학에서 세령의 인기가 치솟자 주변 대학에서 세령이 팬이 늘고 수많은 남자가 세령에게 편지 보내고 세령의 집에까지 미행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나 엄마의 계획은 아무 남자나 세령이 마음에 드는 남자가 아니라 부산에서 부를 가진 남자가 세령의 남편 1순위로 정하고 주변 중매쟁이에게 중매를 의뢰했다. 대학교 졸업 후 사범대학 출신이라 교사로 취직시키는데 남자 중학교에 그 당시에 3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재단 이사장에 기부금으로 쾌척하고 취직시켰다. 3천만 원이면 교사 연봉 5년 동안 받는 돈이다. 돈은 세령의 아버지가 세무서에 근무했기에 뒷돈을 넉넉히 벌어오던 시절이라 가정에 큰 경제적 타격이 없었다. 교사로 취직되어야 좋은 남자에게 청혼이 온다는 세령 엄마의 치밀한 계획이 있었다.     

 세령이 24살에 첫선이 들어왔다. 김해에 터전을 둔 부잣집 아들이다. 부산의 P 대학교 경영학과 출신으로 남자 인물은 그다지 볼 것이 없으나 시골의 재산이 엄청난 부잣집이다.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부산은행에 근무하는 총각으로 나이는 세령보다 3살이 많았다. 신랑은 건실하고 마음도 착한데 한가지 흠이라면 키가 보통이고 훈남형의 얼굴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도 세령이 어머니는 중매비를 듬뿍 주고 두 사람의 결혼을 성사(成事)시켰다. 물론 남자는 세령이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거기다가 학교 선생님이라고 하니 더 지고지순해 보였다. 처녀 여자 선생님이라면 뭔가 세련되고 속이 넓어 보이고 모든 문제를 쉽게 해결하며 세련된 사람이란 인식이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을 좋아했던 기억이 몸이 익히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령의 엄마는 이것까지도 계산에 두었다. 

 두 사람은 주변 친인척과 친구의 부러움과 시샘을 받으며 결혼했다. 신혼이지만 아파트 33평에 자가용까지 갖춘 호화스러운 결혼식이다. 신혼여행은 해외여행 자유화가 풀리지 않아 제주도를 택했다. 중매로 만났지만 두 사람은 큰 투쟁 없이 부부로 화합하는 데 성공하고 있었다. 

남편은 무엇이든 다 들어주고 이해하는 스타일이고 세령은 좀 까탈스러운 성격이지만 남편이 잘 받아주었다. 혼전 순결을 지킨 세령이가 첫날밤 첫 경험으로 너무 아프고 하혈이 심해 여행에는 조금 지장이 있었지만, 남편에게 대단한 신뢰감을 주었다. 그 신뢰가 남편이 세령의 이해 폭이 무한대로 넓혀진 것이다. 

남편의 단점이 술을 너무 좋아하는 것이다. 은행에 입사하여서도 두주불사(斗酒不辭)에 남보다 술자리에서 먼저 일어나는 법이 없었다. 결혼식 후 피로연에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셔 비행기를 탈 수 있을까 생각할 정도로 술에 취했지만, 무사히 첫날밤을 치른 것을 보면 천생연분인가 싶었다. 


 세령은 결혼하고 6개월 후에 임신하였고 학교 입사 계약에 따라 학교에 사표를 제출했다. 아들을 출산했다. 세령은 첫 아이지만 주변의 정보를 수집하여 온갖 정성을 다하여 육아에 전념하였다. 그런데 둘째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남편이 술을 많이 먹어 잠자리가 그리 많지 않은 영향도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둘째 아기는 세령이 나이 32살에 생겼다. 결혼 생활하면서 세령은 자기의 모습을 재발견했다. 보통 평범한 여자이고 남편과의 관계를 맺을 때 신음이 많아짐을 스스로 느낀 것이다. 신혼 초는 보통 여자의 느낌이란 말을 친구들에게 들었고 책을 보고 아는 것이 전부인데 결혼 생활이 가면 갈수록 느낌이 좋아지고 반응이 격해짐을 느꼈다. 둘째 아이 임신해도 남편의 품에 파고들었고 남편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응해 주었다. 그러나 남편은 나이 겨우 35살인데 일주일에 4일은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시간이 평균 새벽 1시이다. 둘째 딸을 낳고 약간의 우울 증세가 있었지만 나름 이성적으로 해결하여 가정의 평안(平安)이 지속되었다. 세령은 자기 안의 본능을 싫어했다. 아들이 자라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따로 방을 주었지만 자기도 모르게 심하게 신음이 나와 늘 조마조마한 부부관계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남편이 은행 생활을 접고 신협을 하나 차렸다. 본가의 재산이 있고 자기의 은행 경험이 바탕이 되어 신협을 설립하는 데는 큰 힘은 들지 않았다. 세령도 남편의 생활비가 풍족하여 남편의 직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세령이 44살에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났다.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즉사를 한 것이다. 아버지가 75세에 암으로 돌아가시고 3년 뒤에 엄마가 건널목을 건너는데 과속 택시가 덮쳐 74살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자기 삶의 대부분을 엄마가 만들어 주었는데 이제 의지할 곳이 없어진 느낌이고 앞길이 막막하기만 했다. 세령은 2년 동안 구름 위를 떠다니는 기분으로 살았다. 가까이 언니가 살아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다만 하늘을 쳐다보며 하느님만 원망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딸이 중학교 입학하면서 딸의 공부에 전념하면서 상태가 호전되어 일상적인 생활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참사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