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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윤헌 Mar 29. 2024

참사랑

 시간은 참 빠르다는 것을 실감한다. 20대는 시간이 빨리 지나가 사회인으로 적응하고 가정을 꾸미고 싶을 때는 하루하루가 더디게 흘러가더니 60대가 접어들자 하루는 그리 짧은 생각은 없는데 한 달이나 1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감을 느낀다. 거기다가 모든 일에 관심과 기억이 되던 젊은 시절보다는 필요한 것만 기억하고 대부분을 망각해버리는 신의 은총 때문에 아침의 일도 저녁에 잊어버리는 일이 다반사라 시간의 흐름을 망각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때가 많았다. 새해 업무 계획을 논의하고 회사 전반을 이끌어가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창덕에게 낯선 문자가 도착했다. 

 ‘홍 사장님. 저 세령이예요. 전화해 주십사하는 부탁받았지만, 쉽지 않아 많이 고민하다가 전화번호를 주는 것이 예의일 것 같아 문자 보냅니다. 즐거운 하루 되시고 늦었지만 올해도 복 많이 받으세요. 세령 드림’     

 너무나 뜻밖의 문자에 창덕은 흥분된 얼굴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인간관계를 깊고 오래가는 것이 올바른 삶이라는 평소 신념 때문에 모임에서 보고 개인적으로 공치러 간 사람에게 전화번호 정도는 당연히 공유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여 요청했는데 이렇게 문자가 오니 창덕은 약간의 당혹감도 있었지만, 세령의 세련된 외모와 노래 실력과 골프 예의가 동시에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다. 얼른 전화번호를 저장했다. 누가 볼까 조심스러워 아무도 없는 주변을 살피면서 말이다. 창덕이 점심 식사한 후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핸드폰을 보니 카톡에 메시지 표시가 되어있어 열어보니 친구들 단톡방에 읽지 않은 메시지가 56개가 있다. 중요한 내용이 별로 없다. 무료함을 달래고 소통하기 위해 보낸 메시지다. 그런데 새 친구 있다는 표시다. 윤세령이다. 프로필 사진을 확인하니 골프 연습장에서 골프채를 들고 핸드폰을 보는 모습인데 허리가 날씬하고 가슴이 커 보이며 몸매의 비율이 좋고 모자를 쓴 모습이 너무 이뻐 보였다. 자기도 모르게 메시지를 보내려다 허락 없이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실례될 것 같아 참았다. 창덕은 커피를 마시다 말고 컴퓨터로 가서 한글 파일을 열었다 공대생이라 글을 써 본 적이 없지만, 오늘은 마음 내키는 대로 글을 써 보려고 했다. 그렇게 2시간을 꼼짝없이 앉아 연서(戀書)를 쓰고 지우고 또 쓰고 다듬었다.     

 창덕은 대학 본고사에 작문이 있어 글을 써 본 후 처음으로 글을 써 보았다. 몇 번을 읽어도 명문이다. 첫사랑 현숙과 결혼하여 의무감과 책임감, 행복감을 느끼며 주변 여자들에게 눈 한번 돌리지 않고 38년을 살았다. 사업도 계속 성장 발전시키고 사회적 저명인사가 되어 뉴스에 인터뷰나 창원 관내 유지로 위촉되어 나름 만족감을 느끼고 살았던 창덕이가 세령의 문자에 연서를 한 장 쓰고 나니 삶의 공허감이 들기 시작한다. 없던 용기도 났다. 세령이라면 어떤 난관도 이겨내고 사랑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도 생겨났다. 골프 모임 후 아내에게 관계를 시도하다 실패했던 창덕의 아랫도리가 세령을 생각하자 불끈 힘이 치솟기 시작한다. 그 시간에 자재(資材)부장이 결재 서류를 들고 들어온다. 60대 중년의 아저씨가 수음(手淫)하다 들킨 기분이다.

“회장님 어디 아프십니까? 점심 드신 것이 잘못되었습니까?”

“자재부장, 내 얼굴이 뭐 잘못되었나.”

“회장님 얼굴이 낮, 술 하신 것처럼 붉어서예.”

“아닙니다. 뭔 일에 좀 열중했더니 혈압이 높아진 것 같네.”

“괜찮으시다면 다행입니다. 결재 하나 해 주이소.”

“자재부장님! 가정이 무탈하고 아이들 잘 큽니까?”

“다른 일은 없고 마누라가 갱년기라 앙탈을 부려 죽겠심더. 

회장님은 사모님 갱년기 때 우째 보냈십니까?”

“박 부장은 좋네. 아직 힘이 펄펄 나는 갑네.”

손으로 앞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재부장이 멋쩍어한다.

창덕은 자재부장을 소파에 앉으라 하고 꽃, 차 두 잔을 만들었다. 창덕은 총무과 직원들이 차를 갖다줄 수 있지만, 권위적인 사장 모습이 싫어 외부 손님이 오던 직원이 결재하러 오던 사생활을 상담하러 오던 본인이 직접 커피를 내리고 차를 만들었다. 현숙이가 꽃차를 배우면서 다양한 꽃차를 창덕에게 제공했고 효능에 대해 서도 많은 걸 배워 상대에 따라 차를 달리 만들었다. 다정다감한 사장이고 덕이나 인품에서 나오는 권위로 직원들을 관리하는 창덕이었다.

장미 꽃차가 흰 찻잔을 붉게 물들일 때 창덕이 김 부장에게 말을 건넨다.

“김 부장 결혼하고 연애 한번 해 봤나?”

갑작스러운 회장의 질문에 의도가 무엇인지 몰라 손으로 입술을 만지며 불안해한다.

“나쁜 뜻으로 물은 것이 아니고, 사람이 살다 일탈 같은 거 해 보잖아. 아내 말고 누구를 지독히 사랑해 본 적이 있느냐는 말이야.”

“회장님 53살 나이에 전혀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고요. 내가 자주 가는 술집 사장님과 잠시 착각한 사랑을 두 달 정도 한 적 있습니다.”

“그 기분이 어땠는데?‘

창덕은 경찰 신문하듯 얼굴을 김 부장 턱 밑으로 끌어당기며 물었다.

”회장님 그 당시는 진짜 행복하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지나니 바보짓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진심으로 사랑했는데 왜 바보짓이라 생각했지?“

”그게 절실함에서 손익분기점을 대비하니 그렇네요. 두 달 동안 여자에게 경제적 도움을 준 것이 너무 많았다는 생각을 관계를 끝내고서야 알았습니다. 회장님 저는 길지 않아 불장난이라 생각해요. 부끄럽습니다. “

창덕은 자재부장과 대화를 끝내고 연서를 다시 한번 읽어 본다. 역시 명문이다. 작가로 변신해도 되겠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그런데 이 연서를 어떻게 전달하지? 고민이 된다.     

 세령의 집은 부산 서면에 있는 55평형 아파트다. 아들 부부와 같이 살려고 큰 평수로 이사 왔는데 아들이 부산 해운대서 게스트하우스와 모텔, 펜션을 한 묶음으로 하는 신종 숙박업 사업을 하면서 사업장을 비울 수 없어서 독립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호텔을 하나 운영해 보라고 권유했지만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며 아버지의 권유를 거절하고 혼자 독립적으로 사업을 한다. 

 딸은 외국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SKY 바로 아래 수준의 대학에 진학했으나 세령의 자존심이 상하여 입학 후 1학기 마치자 바로 프랑스와 캐나다에 유학을 보냈고 4년 동안 수업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명품을 파는 회사에 임시직원으로 취직해 있다. 세령의 딸은 엄마의 미모를 닮기보다는 아빠를 많이 닮아 좀 이쁘게 만들기 위해 엄청 많은 돈을 투자했다. 

세령이 받은 유산의 상당 부분을 지출했다. 그 이유는 여자가 이뻐야 좋은 남자 만나 시집을 간다는 자기 엄마의 생각을 종교처럼 믿었기 때문이다. 

아파트에 일하는 아줌마가 일주일에 3번 와서 청소하고 밑반찬을 해 놓고 간다. 세령의 일은 아이들이 학교 다닐 때는 모든 일을 아이 공부에 맞추어 자신의 일과를 조율했다. 아이들이 다 나가고 난 후 세령의 일과는 아침에 신랑 출근하면 아침 차려주고 옷매무새 살펴주고 나면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다가 골프 연습장에 가거나, 수영을 가거나, 언니와 쇼핑, 아니면 동창 모임, 미용실에 가는 것이 거의 습관적 행동이다. 중학교 국어 선생님 한 경력으로 시도 쓰고, 작가를 하고 싶은 욕심은 있었지만, 상류사회의 편리함의 쾌락을 맛본 후에 다른 어떤 일도 하기 싫어졌다. 무위도식(無爲徒食)의 생활이지만 수준 높은 무위도식의 표본 아줌마이다.      

 세령이가 창덕에게 문자를 보낸 것이 골프 회동 주차장에서 창덕의 부탁을 받고 한 달하고 열흘이 더 걸려서이다. 왠지 처음 볼 때부터 보통 이상의 남자이고 속이 깊고 자기 속내를 표현하지 않는 한국 신사의 느낌이었다. 자기 신랑의 외모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키도 크고 인상이 좋고 품위가 돋보이는 저런 남자와 연애를 한번 하면 얼마나 기분이 좋고 황홀할까를 먼저 생각한 남자이다.

고민 끝에 문자를 보냈는데 답장이 없다. 여자로 자존심이 상한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대학입학 이후부터 모든 남자가 자기에게 관심을 보이고 자기를 모르는 남자도 자기의 미모에 가슴이 떨려야 정상이라 생각한 세령이가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전화번호를 준 것도 처음이고 당장 답장이 오지 않은 사람도 창덕이 처음이다.

세령이도 카톡을 자주 한다. 모든 통신 수단은 카톡이다. 카톡은 비밀번호가 있어 아무도 접근이 안 된다. 신랑은 세령의 핸드폰에 관심 없는지 볼 생각도 없다. 대신 밤 10시 이후에는 전화기도 꺼지고 모든 소통이 단절된다. 신랑이 술을 먹고 늦게 오면 집 전화를 한다. 그래서 불편함이 없다. 아침 신랑이 출근하면 전화기 켜지고 밤 10시면 전화기는 자동으로 꺼진다. 이것이 세령이가 정숙한 부인으로 살아가는 요령이다. 세령의 핸드폰에도 창덕의 카톡이 새로운 친구로 등록되었다. 창덕이가 세령의 전화번호를 핸드폰에 입력시킨 것이 표시 난 것이다. 창덕의 프사를 보니 가족사진이 걸려있다. 아주 평화와 행복이 넘치는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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