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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윤헌 Apr 05. 2024

참사랑

 펜션에서 자녀들과 모임 3일 후 창덕이 현숙에게 문자를 보냈다. 만나서 결판을 내자는 것이다. 창덕과 현숙은 같은 집에 살지만, 얼굴 볼 일을 만들지 않았다. 각자 자기 방에서 생활하고 거실에서 마주치지 않으려고 각자 노력했다. 

창덕은 저녁 늦게 식탁에 앉아 ’계약 졸혼’을 제시했다. 현숙은 이혼이면 이혼이고 졸혼이면 졸혼이지 계약 졸혼은 뭐냐고 비아냥댄다. 창덕은 현숙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고 A4용지 한 장을 꺼내 놓는다.     

     【계약 졸혼(契約 卒婚)】

본 계약서는 죽을 때까지 유효하다.

본 계약서는 홍창덕과 문현숙 간에 맺어진 계약서이고 자식, 친척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

두 사람 간에 완전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는 상대에게 무엇을 요구할 수 없다.

밥은 각자가 해결하되 상대가 같이 먹자고 하면 같이 먹고 상대가 자기 음식을 먹고 싶어 하면 자기가 만든 음식을 나누어 줄 수 있다. 단 같은 집에 있을 때만 해당한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

청소는 각자 시간 나면 하고 둘이 하기 싫으면 청소 아줌마를 부른다.

자식들의 체면을 위해 외도는 될 수 있으면 절제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명예를 고려하여 품위유지에 특별히 신경을 쓰기로 한다.

경제적인 문제는 현재와 같이 현숙에게 생활비를 주고 필요에 따라 더 지급할 수 있다.

자식들이 모이면 식구가 서로 화목하다는 것을 연출이라도 해서 유지한다.

위의 조건이나 계약 졸혼을 절대 발설하지 않는다.

위에 조건 이외에 돌발적인 사건은 그때그때 합의하여 원만하게 처리한다.     

                     2021. 9.      홍창덕(인)            문현숙(인)     

12가지 조건 말고 더 첨가할 수 있으면 해 보세요. 현숙은 위, 아래 훑어보더니 ”품위유지 좋아하네, 내가 품위유지 안 했나?, 자기나 잘하면 되지“ 하더니 볼펜으로 사인을 한다. 

현숙은 한마디 더 한다.

”외도를 절제한다고, 내가 이제 바람피우란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종이 쪼가리 가지고 와서 야단법석이야. 

“흥~~~~흥~~~” 하더니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창덕은 현숙과 같은 집에서 사는 것이 현숙이가 힘들 것 같아 자기 물건은 그대로 두고 속옷과 양복 몇 벌을 트렁크에 넣어 오피스텔로 이사를 했다. 돈이 많으니 좋은 것이 이런 것이란 생각을 했다.     

 세령이는 그날 밤 사건 이후 남편에게 핸드폰을 주고 검사를 받고 차 키도 주고 카드도 반납했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두문불출했다. 일주일간 딸과 아들과 몇 차례 안부 통화 정도만 하고 골프 모임이나 친구 모임의 문자나 통화는 하지 않았다. 아직도 창덕의 전화 통화가 되지 않는 것이 답답할 뿐이다. 전화번호라도 외워놓을 걸 후회하기도 했다. 두문불출 8일째 카톡이 왔다. 친구로 등록된 것이 아니니 조심하라는 문구가 뜬다. 

내용을 보니 창덕이다. ” 세령씨 톡이 가능하세요.“ 

세령은 그간 답답하던 가슴이 탁 트인다.

”오빠 전화해 주세요“

잠시 후 전화가 왔다.

세령이는 전화를 받고 창덕의 소리가 들리자 울음부터 나왔다.

”세령씨 무슨 일 있는 거예요“

”아니예요. 오빠 목소리 들으니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나요.“

”그럼 다행이네. 신랑과 무슨 일 있는 것은 아니고요.“

세령은 그간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이야기하였다.

창덕은 세령의 이야기를 듣고 자기도 계약 졸혼을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오피스텔로 짐을 옮겼다고 하면서 오피스텔 위치와 대문 비밀번호도 가르쳐 주었다.

필요하거나 내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서 기다리면 바로 가겠단다.

세령은 창덕의 전화번호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적어두고 통화목록을 삭제했다. 

아직은 차 키를 남편에게 주었기에 찾아갈 수도 없다.      

 세령의 10일간의 두문불출에 남편이 오히려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우울증이 온 것이 아닐까? 

집에 가서 둘이 앉아 있어도 말이 거의 없고 침대에 같이 누워도 육체적 실제 거리는 30cm도 안 되는데 마음의 거리는 100리도 넘는 형국이다. TV 보고 깔깔대고 무슨 말이든 진중하게 신중하게 논리적으로 하던 세령이가 이번 사건 후 TV도 거의 보지 않고 말 수는 거의 없어졌다. 남편이 불안하여 무슨 말을 해도 응답이 거의 없다. 

침대에서 세령을 끌어안아 보지만, 거부하거나 응하지도 않는다. 

머쓱해져 그냥 누워 잔다. 그게 벌써 10일째다. 세령이 잠든 사이 핸드폰을 살며시 보니 딸과 아들 통화가 전부이고 카톡도 읽지 않는 단체 카톡만 수두룩했다. 

무작정 세령의 말을 믿었지만, 가슴 속 깊은 곳에서는 믿음이 화로 치밀어 올라 용서가 안 된다. 그래도 사람이 우선인지라 내일은 이번 사건 이전의 상태로 원상 복구시켜 준다. 이런 생각을 하며 잠을 청했다.     

 어느 아침이나 똑같이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아침 밥상을 차린 세령이이었다. 남편이 씻고 나오는 몸매가 60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탄탄하다. 창덕과 만나기 전에는 남편이 씻고 나오는 모습에 가슴 설레고 약간의 성적 흥분도 하였으나 이제는 아무 감흥이 없다, 남편은 팬티 차림으로 가볍게 아침 식사를 하고 양치하고는 출근 준비를 했다. 전에는 넥타이도 골라주고 넥타이 메워주며 가볍게 애정 표현도 하였지만, 지금은 아무 생각이 없다. 정신 나간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이 이런 모습일 거다. 

남편은 세령에게 차 키를 건네주면서 ”모든 것을 원상 복구하고 폰도 검사하지 않을 테니 종전처럼 생활합시다. “하고는 출근했다. 

세령은 힘없이 ”다녀오세요“ 하고는 자기 침대로 돌아가서 풀썩 누웠다. 

남편이 모든 것을 원상복구 한다고 해도 신이 나지 않는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사람처럼 세령 부부는 웃음기 없는 생활이 지속되었다.     

 창덕의 일상은 늘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 회사 시찰하고 식당에서 식사하니 노동자들이 좋다고 한다. 회장님이 식당에서 식사하니 반찬이 더 좋아지고 깔끔해졌다고 하면서 아침 인사에 허리가 조금씩 더 굽어진다는 것을 느꼈다. 

수출 물량을 맞추기 위해 직원도 보충했고 은행에 현금 저축이 쌓여갔다. 

아버지가 대출 없는 사업을 하였기에 창덕도 대출 없이 사업하려고 노력했고 M&A로 사업 확장했던 대출금도 다 갚아서 아주 탄탄한 기업으로 성장 발전하고 있다. 직원들의 복지도 대기업 수준에 가까울 정도로 높여나갔다. 아파트를 구매하는 직원에게 2억을 무이자 장기저리로 지원했고, 연말이면 성과급도 대기업 수준으로 지급하니 자기 일처럼 열심히 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다. 창덕은 안전사고 예방을 전사적 입장에서 지휘했고 창립이 후 한 번도 안전사고가 없었다. 창덕은 오전에 간부회의, 대표이사 결재가 필요하면 결재를 하고 점심은 대부분 밖으로 나가 계열사 사장과 먹고 오후에는 다른 공장을 시찰하고 저녁에는 모임에 참석하거나 친구와 술을 마시는 일이 일주일에 4일이다. 모처럼 일찍 퇴근하면서 오피스텔이 아닌 현숙이가 사는 집으로 갔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니 소파에 앉아 TV를 보던 현숙이가 쳐다보고는 ”오늘 웬일이요, 옷 가져갈 일 있어요. “하면서 말을 건넨다. 

창덕은 얼굴이 핼쑥해진 현숙이 애처롭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오늘 미인 보려고 왔지. 얼굴 보니 좋네. 이제 가야지“

평상시에 하던 농담 겸 덕담을 몇 달 만에 처음 해 본다.

”저녁이라도 챙겨 줄까요. 저녁 안 먹었지요. 나도 먹으려고 했는데. 저녁 먹고 가세요“

현숙은 주방으로 가더니 된장찌개를 끓인다. 

평소 창덕이가 엄마 맛이 난다고 좋아하던 된장찌개이다. 

창덕이 떠나고 밥도 대충 먹다가 오랜만에 요리를 하니 갑자기 눈물이 난다. 

늙어도 여자지만 살면서 상대방의 쾌락을 이해해 주지 못한 자기를 원망한다. 

현숙은 평소에 ’100m 잘 뛴다고 마라톤 우승하는 것 아니다.’라는 표어를 생활신조로 삼았던 사람이다. 한 번의 실수인지 오랫동안 묻어온 사랑인지는 몰라도 ’본댁 정은 100년이요 화류 객정은 3년이란‘ 진주 난봉가의 가사를 생각하며 오늘 저녁 먹으면서 창덕과 화해해야겠다고 불쑥 생각했다.

된장찌개를 중앙에 놓고 기본 반찬 몇 가지를 냉장고에서 꺼내 밥을 푸고 창덕을 부른다.

”지현 아빠 식사해요. “

구수한 된장 한 숟가락 입에 넣은 창덕은 정신이 아찔하다. 

이런 맛이 행복인데 이것을 내팽개치고 돈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신념으로 외도를 하여 가장 가까운 아내에게 상처를 준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눈을 지그시 감으며 현숙에게 ”여보 고마워요. 그리고 진짜 죄송해요. “

현숙은 창덕이 좋아하는 막걸리 1병을 가져와 잔에 따르고 한잔하자고 한다. 

창덕이 집을 옮기고 벌써 두 달이 지나갔다. 

현숙은 친구와 수다를 떨고 골프도 치고 모임도 다녔지만, 무엇인가 허전하고, 그리 유쾌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두 사람의 저녁 식사가 행복하다.

”지현 아빠. 아직도 그 여자와 사랑이 돈독하여 헤어지지 못할 것 같아요.“

”그 당시에 내가 그분과 관계를 송두리째 부정하면 내 삶 전체가 부정하는 거잖아요. 

거짓 사랑은 아니었지만 내가 경솔한 것은 당신께 진심으로 사과할게.“

”이 넓은 집에 지현이 아빠 있을 때는 넓다는 생각을 안 했는데 혼자 있으니, 무서워요.“

”내가 종종 들려야 하는데 당신이 불편할까 봐 조심스럽게 한 번씩 왔는데 자주 올게.“

”아니요. 매일 오세요.“

두 사람은 막걸리를 시원하게 원 샀을 한다.

정말 오랜만에 현숙과 나란히 누웠다.

외국에 몇 달 출장 갔다 와서 아내를 맞이하는 기분이다.

창덕은 다음 날 오피스텔에 짐을 빼고 집으로 돌아왔다.     

세령이와 창덕은 자주 만날 것 같았는데 만남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둘이 진실한 사랑은 확인했지만, 주변 환경적인 요인과 가정이란 큰 걸림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 대화에 창덕이가 ”오피스텔 문 닫음. 집으로 돌아감. “아주 짧은 문장이 세령에게 왔다. 세령은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제 이게 마지막이구나. 무리해서라도 오피스텔 한번 찾아가야지 했는데 차일 필 미루다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기분이다. 

세령은 참선을 시작했다. 게 겔 운동하듯 반듯한 자세로 눈을 감고 자기의 내면을 보려고 노력했다 5분이 되지 않아 다리도 아프고 잡생각이 많아 그만두었다. 

창덕을 잊지는 말자. 그렇다고 집착은 말자.

오랜만에 골프 동호회에 스크린 골프 칠 사람을 모집했다. 

세령이 신청하자 금방 4명이 모였다. 세령은 스크린 골프장으로 갔다.

환하게 웃는 모습을 오랜만에 본 동호 회원이 세령을 반겨 주었다.

필드에서 장타를 치는 통쾌감이 오늘 스크린 골프에서도 느낌이 온다. 

”딱“ 맞는 소리가 오늘은 유별나게 크게 들린다. 

평소 골프를 좋아했기에 오랜만에 골프를 치니 기분전환이 되었다.      

 기분 좋게 골프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려 남편이 좋아하는 소고기 갈빗살을 풍족하게 샀다. 이런저런 채소도 구매하고 소주도 한 꾸러미(6병)를 카트에 담아 집으로 와서 소주를 전부 냉동실에 넣었다 4시간 정도 지나면 시원하겠지. 나도 오늘 한잔해야지, 그리고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일찍 들어오세요. 이쁜 세령 올림”

문자를 받은 남편은 무슨 일이 있느냐? 하면서도 세령이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저녁에 친구와 술 약속을 집안에 일이 있다는 핑계로 취소하고 6시에 집에 왔다. 

세령이가 문 앞에서 서서 남편의 목을 끌어안으며 ”오늘도 고생했어예’ 하며 생글거린다. 

남편도 오랜만에 보는 세령의 웃는 얼굴이라 웃으며 엉덩이를 토닥토닥하며 반가워했다. 

세령은 식탁 중앙에 전기 불판을 놓고 차가운 소주를 남편에게 한잔 따라 주면서 “여보 미안해. 앞으로 많이 사랑해줘” 남편이 소주잔 받고는 평소 없던 세령이 앞의 소주잔에 한 잔 주면서 “앞으로 잘 살자” 한다. 

술 좋아하는 남편이라 소주 4병을 마시고야 저녁 식사가 끝이 났다. 소주 2잔 마신 세령이도 정신이 어질하다. 설거지도 내팽개치고 둘은 침대에 쓰러졌다. 평소 술 먹은 남편 술 냄새난다고 가까이 못 오게 하였는데 소주 2잔 마시니 술 냄새도 나지 않는다. 

 세령이 오랜만에 욕정이 솟아난다. 나이가 들어도 죽지 않은 욕정을 좋아해야 하나 싫어해야 하나 고민스러운 세령이다. 술 냄새 풍기는 남편의 품에서 남편의 입에 입술을 살며시 포개본다. 술김이 있어 더 흥분된다. 소주 4병 마신 남편은 인사불성이다. 그래서 술 많이 마시는 사람이 바람을 피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 했던가. 폭풍이 지나가고 햇살 가득한 맑은 날이 지속되었다.

세령이도 이제 제정신이 든 듯 왕성하게 운동하고 취미생활과 자기 꾸미기에 여념이 없었다. 창덕이와 만난 이전 생활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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