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결혼하기
두 사람이 결혼하겠다고 하자 두 집안에 반대는 없었다. 현주네 집은 딸이 시집가면 집도 얻어오고 사위가 월급 받아 오니 지금의 경제력보다는 훨씬 좋은 상태로 살아갈 수 있어 무조건 찬성이었다. 규혁이 집은 규혁이가 원하면 무조건 밀어주는 스타일이다. 규혁이 부모님 성향이었다. 아직 막내아들이 있지만 위로 아들 둘 딸 둘 다 중매로 결혼시켰다. 둘째 아들은 공부를 많이 하여 해외 유학도 하러 갔지만 며느리 조건에 그리 까다롭게 굴지는 않았다. 그냥 저희가 좋다고 하면 부모도 좋다는 식이다. 규혁이네 집에 결혼 승낙이 쉬운 것에는 희숙이도 한몫했다.
현주에게 문제가 생겼다. 결혼은 하자니, 돈이 하나도 없다. 아버지가 고등학교 선생님 시절에는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다가 부부 사이 갈등으로 엄마와 별거하고 절에 들어가 버렸고 오빠는 허풍쟁이로 현실 적응 능력이 거의 없다. 엄마도 젊은 나이에 무슨 일이든 해야 하는데 선생님 사모님이라 아무 일 못 한다고 하면서 현주의 수입에 목줄을 메고 있었다, 현주 동생은 군대에 가 있다. 혼수를 하려고 해도 할 돈이 하나도 없었다. 눈앞이 캄캄하다. 시집 식구와 규혁이 외갓집도 외삼촌이 6명이라 혼수를 최소한 하려고 해도 돈이 있어야 하는데 학원생 한 명 회비 내면 그것으로 살아가기 바쁜 현주였다. 현주가 가진 재산은 볼살이 도톰한 얼굴 하나뿐이었다. 장래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 같아 결혼하자고 하였으나 자신의 신분이나 학력도 들통날 것 같아 앞길이 참담했다.
규혁이네는 참 아량이 넓었다. 희숙이가 아가씨 좋다고 하니 피아노 학원하고 규혁이 직장 다니면 둘이 먹고사는 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으니 혼수가 그리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상견례에 만나 규혁이 엄마가 규혁이에게 들었다며 혼수는 하나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시며 신접살림 살 그릇이나 장만하여 살면서 모든 것 차츰차츰 장만하라고 하신다. 규혁이 아버지는 농사일하지만 참 훈훈한 인상이다. 규혁이 엄마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응대해 주셨다.
규혁이는 결혼 준비로 전셋집을 얻었다. 그 당시에 아파트는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신축 이층집 방 두 칸짜리 집을 얻었다, 현주의 피아노 학원에서 가까운 곳이다. 부모로부터 도움받고 자기 월급 모은 돈으로 충당했다. 신혼집에 들어올 신접살림이 하나도 없었다. 규혁은 결혼을 이리 형편없이 해도 되느냐? 고 의문을 품었지만, 현주 생각에 꾹 눌러 참고 준비했다. 엄마와 큰누나가 대구 와서 아가씨 혼수를 이것저것 챙겨준다. 규혁이 받은 혼수는 양복 달랑 한 벌과 시계 하나가 전부였다. 그래서 텅 빈 신혼 살림집을 보며 한숨이 나왔다. 그래서 장롱 하나를 들어 놓았다. 장롱 하나가 들어오니 방이 가득해 마음도 푸근해진다.
규혁이 집은 결혼의 품격과 격식을 갖추기 위해 사주단자도 보내고 사돈 편지도 보냈다. 그러나 현주 가족은 사주단자가 무엇에 쓰이는지 몰랐고 사돈 편지는 한자로 가득 차 있어 아예 무시했다. 사주단자는 혼인 날짜를 잡고 신랑, 신부 궁합을 보는 것인데 아는 사람이 없었다.
결혼 날짜도 규혁이와 현주가 만나 11월 8일 일요일 12시로 정했다. 예식장에 가서 예약도 했다. 당시의 예식장은 각 50명 정도 앉을 수 있는 작은 예식장이 대세였다.
결혼 날짜가 잡히자 예단이 현주에게 배달되었다. 패물도 있고 화장품 세트와 옷감도 있고 이불감과 솜도 있다. 오곡과 음식도 가득 담아왔다. 모처럼 식구들이 배불리 먹는다. 옷감으로 옷을 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 옷집에 외상으로 맡기고 결혼식 후에 주기로 약속했다. 이불을 만들어 신혼 첫날밤을 보내야 하는데 할 사람이 없다 엄마가 있어도 결혼에 보탬이 하나도 되지 않는 무용지물이다.
현주도 시집에 예물을 보내야 하는데 무엇을 보내야 하는지도 모르고 돈도 없다. 오빠가 도자기 판매 전시회에 아르바이트로 갔다가 시급으로 돈을 받지 못해 전시한 도자기를 시급 대신 가지고 온 것이 있어 시부모 양복과 한복 대신 선물로 보냈다. 사실 시골에서 농사짓는 일에는 도자기는 아무 쓸모가 없다. 간장 항아리보다 못하다. 그래도 규혁이 부모는 아무 불평이나 불만을 표출하지는 않았다. 희숙이가 이런 결혼 예물이 어디 있느냐고 따지려 하자 규혁이 부모는 그런 것 따지는 것은 양반의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라며 제지한다. 다 형편 따라 하면 되지 혼수가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그러느냐며 희숙이를 나무란다. 나중에 결혼하여 저희 부부들이 알뜰살뜰 잘 살면 그만이지 혼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규혁이 엄마는 삶에서 묻어나는 인품이 돋보이는 사람이다. 규혁이 엄마 나이는 58세여서 삶의 완숙미가 묻어나는 것 같았다. 농사를 짓고 평생을 살았지만, 글을 쓰는 솜씨도 좋고 통솔력도 있는 사고의 폭이 아주 넓은 사람이다.
가슴 졸이며 결혼식 준비를 한 현주이다. 모든 것을 양보해준 규혁이 가족과 넓은 아량으로 감싸준 규혁이 덕분에 결혼식 날짜가 다가왔다. 결혼식 당일은 날씨가 참 좋았다 전형적인 가을 날씨로 하늘이 높고 청명하다. 결혼식 날 결혼식장에 규혁이 가족은 참 많았다. 현주네 가족은 하객으로 온 사람이 이모 두 명뿐이다. 그 흔한 친구도 한 명도 없다. 누가 보면 보육원 출신이라도 이보다는 하객이 많을 것 같다고 흉을 볼 수 있는 지경이다. 시누이 희숙의 재치로 신부 가족석에 신랑 가족들이 많이 앉아 주어 결혼식은 무사히 치렀다. 가족사진을 찍는데 현주 아버지가 없었다. 관심이 있는 하객들이 군데군데서 소곤소곤한다. 누가 봐도 결혼식으로는 아주 부족함이 많은 결혼식이다. 하객들이 식당으로 이동했다. 식당에는 규혁이 집에서 준비한 오징어 무침회와 각종 음식과 식당의 갈비탕으로 한 상이 차려졌다. 식당에 모인 하객들은 신랑, 신부가 잘생겼다고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폐백을 하지 않았기에 신부가 옷을 갈아입고 신랑 측 친구들, 즉 옛날 같으면 ‘술래 꾼’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뒤풀이에 참여했다. 지금은 신랑 신부 친구들이 모두 모여 축하연을 베푸는 자리다. 친구들과 같이 행사하다 보면 좋은 사람과 서로 만나기도 하는 장소이다. 그런데 현주 가족은 식당도 없이 바로 집으로 갔고 현주는 친구 하나 없는 축하연에 참석했다. 4시간 정도 떠들고 술 먹고 신랑 신부에게 갖은 장난을 치며 신랑 신부가 친해지도록 도와주는 것이 축하연이다. 신혼여행을 떠났다. 경주로 간 것이다. 이 시기에 해외 신혼여행은 특별한 사람이 가고 좀 사는 사람은 제주도 2박 3일을 가고 보통 사람은 경주로 가고 부곡 온천에 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 이유는 직장 휴가가 7일이라 결혼 전에 1일 결혼식 1일 신혼여행 2일 처가 집 1일 시집에 가서 시부모 아침상을 올려야 하고 신혼집 정리해야 하는 시대적 상황이라 신혼여행을 멀리 갈 수가 없었다. 현주는 다행이었다. 무일푼으로 결혼하자니 신혼여행도 문제였다 보통은 축의금 받거나, 친구들이 돈 모아 과일 바구니 마련하여 신혼여행을 환송하는데 친구 하나 없고 하객 없는 결혼식이라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다행히 규혁이 회사에서 호텔 1박을 제공해 주었기에 신혼 첫날 밤을 호텔 침대에서 보내게 된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었다.
첫날밤 두 사람의 속궁합은 잘 맞았다. 28살 규혁과 25살 현주는 총각, 처녀 시절 연애 경험이 없었다. 그래도 첫날 밤 할 일은 제대로 했고 현주의 처녀성이 증명되어 규혁이의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들떠 있었다. 다음 날 경주 시내 관광을 그만두고 호텔에서 오후 늦게까지 두 사람 알콩달콩 이야기하고 사랑하다 가고 싶었지만, 택시가 예약되어 있어 경주 관광지로 여행을 갔다. 천마총도 가고 안압지도 구경하고 포석정도 가고 김유신 묘를 갔다가 점심을 먹고 황성공원 벤치에서 휴식을 취하다 오후 늦게 처가로 갔다. 처가 집이라 해야 현주 학원에 딸린 방이다. 보통은 처가 식구들이 신랑을 길들이기 한다고 명태로 발바닥을 때리는 시절이었으나 규혁의 처가는 아무도 없어 이벤트 없는 무미건조한 시간이 되었다. 장모가 새신랑을 위해 음식을 장만해야 하지만, 장모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밥상 하나 차리는 것도 하지 않았다. 첫날밤의 희열이 없으면 지금 당장 결혼을 걷어치우고 싶은 게 규혁의 심정이었다, 둘은 합의하여 신혼집으로 가기로 했다. 오히려 떠들썩한 분위기를 싫어하는 규혁은 현주와 있는 둘만의 시간이 더 좋았다.
신혼집에서 두 사람은 깨끗한 이불이 아닌 현주가 덮던 이불이지만 두 사람의 체온이 너무 따뜻하여 신혼이 아니라 결혼 10년 차의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다음날 늦게 일어나 시부모 아침상 차리는 음식을 준비하여 시집으로 갔다. 현주의 시집은 집성촌이라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는 많은 사람이 신부를 구경하러 왔다. 전통적인 예법이 무지한 현주는 시키는 대로 따라 했다. 방에 앉아있다가 누가 방문 열고 들어오면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한 시간쯤 그런 행동을 반복하니 다리에 마비가 온다. 내색하기도 힘이 든다. 이래서 시집살이가 힘이 든다는 것을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시부모 아침상을 차리려고 부엌에 갔더니 불 때는 아궁이가 있는 부엌이라 난감하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상황이다. 시 할아버지도 있는 집인데 새벽 어두컴컴할 때 규혁이가 깨워주어 나왔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다시 규혁이에게 가서 입술에 뽀뽀해주면 도와주라고 한다. 규혁이는 우리 마을 정서상 신랑이 부엌에 가면 안 된다고 난색을 한다. 솥에 밥하는 것도 힘들다. 현주가 부엌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시어머니가 나오더니 ”아가 힘들제. 네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하시더니 솥에 쌀 씻어 안치고 현주가 장만해간 기본 반찬을 상에 차리고 국을 끓여 상 두 개를 만들더니 하나는 시할아버지에게 갖다주면서 큰절 올리라고 가르쳐 준다. 너무 자상한 시어머니이다. 현주는 친정엄마에게 배운 게 하나도 없다. 며느리 보고 가만히 앉아 아침상을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시어머니가 며느리 밥상 차려주는 꼴이 되어 버렸다. 그럭저럭 시집에 신고식하고는 규혁이 직장 핑계로 그날 오후에 대구로 왔다. 현주는 규혁이가 생각한 것보다 자상하고 겸손하며 부지런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