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윤헌 Dec 21. 2023

겸손(謙遜, humility)

  겸손(謙遜, humility)     

 동, 서양을 막론하고 인간관계에서 최고 덕목으로 꼽는 것이 겸손일 것이다. 겸손은 사전적 의미로는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자세이다. 남을 존중한다고 해서 남보다 나를 낮추는 것이 겸손은 아니다. 겸손은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라 주장하는데 이것이 가장 겸손을 잘 대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서양에서는 귀족의 책무(noblesse oblige)가 겸손을 바탕으로 행위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겸손의 실천을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은 사람에게 지위가 상대적으로 낮은 사람이 대우를 극진히 하는 사람을 겸손의 표본으로 삼았다. 지주와 소작농, 주인과 머슴, 양반과 노비의 관계에서 일방적인 겸손의 덕을 몸으로 배우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약용의 목민심서에서 관직에 오른 사람에게 가장 요구되는 덕목으로 겸양지덕을 강조한다. 또한, 일반 사람에게도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라고 하여 겸손함을 요구한다. 서양에서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요구되는 신앙 덕목이며, 스스로 하나님이시되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죄인을 사랑하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겸손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이다. 한편 인도인들은 겸손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인도인은 자신의 분야에서만큼은 모든 사람이 자기 방식을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서비스업이 형편이 없다. 한국인은 지위가 낮으면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이 겸손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비교가 된다.


 맹사성이 19세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파주 군수로 가서 민간 시찰을 하던 중 무명의 스님을 만나게 된다. 자만한 맹사성이 스님에게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을 질문하니, 스님은 일반적인 행동거지를 요구하자 맹사성이 별것 없다고 생각하고 나오려는데 스님이 차나 한잔하고 가라 하며 찻잔에 찻물을 따르는데 찻잔에 찻물이 넘쳐 방바닥이 흥건하도록 따르니 맹사성이 찻물이 넘친다고 하자 스님이 찻물이 넘치는 것은 알면서 지식이 넘쳐 인품이 망가짐을 모른다는 핀잔에 부끄러운 맹사성이 급히 나오다가 문지방에 머리를 부딪치자, 스님이 고개를 숙이면 부딪칠 일이 없다고 하여 평생 관직에 있으며 겸양지덕을 실천했다는 일화다.     

 현대 교육에서 ‘겸손’을 교육의 한 지표로 삼아야 한다. 종전의 품성에서 겸양지덕 교육과 달리 새로운 시각의 유용성에서 겸손의 교육이 필요하다. 수월성 교육에서 다양성, 창의성 교육이 꼭 필요한 것이 현대의 교육이 아닌가? 서두에서도 밝혔듯이 겸손은 남보다 나를 낮추는 것이 겸손이 아니라, 자연처럼 있는 그 모습으로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타인을 내가 원하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한다. 남편이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직장 상사는 부하직원을 부하직원은 직장 상사를 자기 의지대로 해 주길 기대하고 그렇게 하도록 양보를 요구한다. 선생님이 제자를 교육하는 것도 그 학생의 좋은 부분을 더 성장시키고 모자라는 부분을 그냥 볼 줄 아는 교육이 아니라 자신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학생에게 강요한다. 부모도 자식을 키우며 최고의 명예나 최고의 높은 자리에 앉도록 강요함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이 안 될 때 분노하고 절망하고 괴로워한다. 우리는 나를 탓하기 전에 남을 탓하는 버릇이 있다. 자신을 솔직히 보여 주기 전에 자신을 위선(僞善)으로 포장하는 모습을 먼저 배웠다. 자신의 솔직한 모습으로 정정당당하게 살아가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이 현대 겸손 교육의 첫걸음이 되어야 한다.     

 대한민국 고등학교 3학년 교실은 수학능력 시험 후 황폐하기 그지없다. 모두 스마트폰으로 게임하고 영화 보고 또래들끼리 수다 떨고 있을 때 약간의 소외를 당하는 여학생 두 명이 나에게로 와서 하는 말이다. “선생님은 윤리 선생님을 잘하신 것 같아요.” 아무도 자기들 이야기를 들어주는 선생님이나 친구가 없는데 내가 들어주는 보상적 칭찬이다. 한 여학생은 집에서 시내버스도 제대로 타지 못한 아이라고 책망하며, 언니는 키가 172cm인데 반해 이 여학생은 신체적으로 왜소하여 몸무게 40kg 넘는 것이 소원이다. 선천적으로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살아온 여학생인데 자꾸 언니와 비교되는 여학생이다. 또한, 다른 여학생은 지적 장애아로 등록된 학생인데 오빠가 걸핏하면 바보라고 말한다고 한다. 내가 보았을 때 두 여학생은 정상인보다 더 윤리적이다. 학교 공부는 약간 미흡하지만 말하거나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는 학생이다. 한 시간을 자기들 속사정 들어주고 용기를 주면서 대화하니 한 시간이 진짜 빨리 지나간다고 한다. 여기서 겸손의 참모습을 느낀다. 가감(加減) 없이 솔직한 자기 모습을 보여 주는 여학생에게 평생 자기의 본모습보다 자기 치장으로 자신을 감추려는 모든 사람이 더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음을 실감한다.      

 직업의 영역에서는 가능한 겸손을 피해야 한다. 직업에서 겸손함은 불확실성에서 오는 비겁함일 수도 있고 결과의 실패를 미리 방어하려는 전략에 불과하다. 오히려 자신감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의사가 환자에게 ‘실력은 없지만, 최선을 다해 수술하겠습니다.’ ‘이 분야에서 최고 권위자이니 수술은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두 의사 차이에 환자는 누굴 믿고 아픈 몸을 맡기겠는가?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능력 부족이 아니라 겸손이란 표현 방법의 문제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인도의 사상가이자 정치가 간디는 세상에는 일곱 가지 죄가 ‘노력 없는 부, 양심 없는 쾌락, 인격 없는 지식, 도덕성 없는 상업, 인성 없는 과학, 희생 없는 기도, 원칙 없는 정치’라고 했다. 최근 대한항공 집안의 여자들에 ‘갑질’ 논란으로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 서열이 낮은 사람이 서열이 높은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이 겸손이라 생각하는 전근대적인 지주와 소작농의 모습을 현대 정보사회에서 보여 주는 전형적인 갑질의 모습이다. 겸손의 덕목을 가정교육에 전혀 접목이 안 된 대표적 사례로 보인다. 스피노자는 이런 사람을 ‘허영심이 강한 인간은 오만하며, 실제로는 모두에게 골칫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만인이 자신에게 호감을 느낀다고 착각하기 마련이다.’라고 평한다.     

 겸손의 덕목을 잘 교육하면 세상이 밝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능력이 부족하면 할수록 겸손의 덕은 멀어진다. 앞에서 자신의 솔직성을 인정할 정도이면 ‘지적 장애인’으로 격하시킨다.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이 과대하게 자기를 포장하여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겸양지덕을 엄청나게 강조한 근거로 조선말에 관리들이 그만큼 부패했다는 징표일 것이다. 자기의 적성과 능력을 고려하여 진로를 정하고 직업에 정착하는 것이 진정한 겸손의 실천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것이 현대 교육에서 겸손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근거이다.                                      

                                                          2018. 12. 7 憲

작가의 이전글 갈등(葛藤, conflict)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