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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윤헌 Dec 26. 2023

믿음(信)

믿음(信)                                                                  

  인간관계를 형성하여 살아가는 바탕에는 늘 믿음을 전제로 한다. 논어에 ‘무신불입(無信不立)’이란 말이 있다. 자공이 공자에게 나라를 세울 때 꼭 필요한 것을 물으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첫째로 먹는 것(足食), 둘째로 군사력을 갖추는 것(足兵) 세 번째가 백성의 신뢰를 얻는 것(民信之)이라 한다. 그중에 하나를 버리면 무엇부터 버릴까요? 하자 군사를 버리라 한다. 자공이 하나를 더 버리면 어떤 것을 버려야 하느냐고 묻자 먹는 것을 버리라 한다. 그만큼 백성의 신뢰 없이는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없다고 공자는 진단한다. 믿음이란 사람(人)과 말(言)이 합해진 것이 믿음(信), 즉 사람의 말이 믿음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자신이 말한 바를 실천하는 사람을 신뢰가 가는 사람으로 인정한다. 실제로 살아 보면 말도 중요하지만, 행위적 실천이 더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말한 바를 실천하려고 노력하지만, 말없이 남을 위해 배려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신뢰뿐만 아니라 존경까지 받게 된다. 믿음의 출발점과 관계성에서의 믿음을 살펴보고, 또 선입견에서 오는 믿음의 허상을 살펴보자.     

 믿음의 출발점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대부분 사람이 자기 자신의 신뢰에 관한 생각을 깊게 하는 사람이 적다. 그 이유는 자기 생각이 수시로 바뀌기 때문에 어떤 생각이 나의 참모습인가를 설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가 있는 사람을 성실한 사람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성실(誠實)이란 誠은 言과 成이며 實은 실제이며 허(虛)의 반대 개념이다. 자신에게 말한 바를 실제로 이룩하려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말한 바는 자기 삶의 목표를 의미하고 목표를 설정하여 거짓 없이 진실로 실천하는 것이 성실한 사람이다. 자신의 목표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 내가 그렇게 소망하고 갖고 싶었던 내 삶에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일이 조금만 성취되면 기뻐하고, 조금만 힘겨우면 곧 싫증을 느낀다. 그건 왜 그럴까?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에 생겨나는 간사(奸詐)한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모죽(毛竹)이란 대나무가 있다. 씨를 뿌리고 5년 동안은 작은 순이 나오는 것 말고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가 5년이 끝나갈 무렵이면 하루에 80cm씩 자라 6주 후에는 30m까지 큰다고 한다. 5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땅 밑에서 뿌리가 4km 가까이 뻗어 자리를 잡는다고 한다. 우리 인간들은 목표 달성을 위해 평생을 투자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에 대한 믿음의 확신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 일이다.     

 인간관계에서 믿음을 가장 중시하는 것이 친구이다. 가족이나 친척은 혈연으로 맺어진 집단이기에 관계를 절단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었기에 어떤 형태로든 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친구는 다르다. 믿음이 없거나 배신하면 바로 관계가 단절된다. 그래서 고전에서는 믿음을 친구의 가장 기본조건으로 설정한다. 대표적인 예로 붕우유신(朋友有信), 교우이신(交友以信)에서 볼 수 있다. 아무리 오래된 친구라 하더라도 믿음이 빠지면 친구 관계는 지속할 수 없다. 고사성어에 관포지교(管鮑之交)나 백아절현(伯牙絶絃)은 친구는 믿음에서 출발하여 배려, 이해, 포용까지 요구한다. 한편 탈무드에서는 ‘나를 따르고 칭찬하는 사람과 나를 비난하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 나를 비난하고 비판하는 사람을 가까이하고 칭찬하는 사람은 멀리하라 한다.’ 아부하거나 아첨을 경계하라는 문구 같다. 어떤 이득을 위해 아첨이나 아부는 믿음과 거리가 멀다. 그래서 나의 아픈 곳을 찔러, 내가 잘못한 것을 깨우치게 하는 것이 오히려 믿음직스럽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우리가 인간관계를 유지하면서 많은 선입견과 편견을 지니고 있다. 선입견이나 편견 때문에 믿음의 불신이 생긴다. 그래서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다’라는 속담이 있다. 첫째로 경제적 성공이나 자신이 속한 자리에서 최고 경영자나 관리자가 인품이 뛰어나며, 상대를 배려하거나 관용의 자세가 뛰어나다고 생각한 믿음에서 오는 낭패감이 많이 있다. 먼저 부잣집 사람이면 인심도 좋고 관용과 너그러움이 있고 가난한 사람은 늘 남의 것을 공짜로 얻어먹는 것을 좋아한다고 짐작한다. 아무래도 없는 사람보다 있는 사람이 많이 베풀 것 같아도 실제는 그러하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남에게 베푸는 것에 인색할 수밖에 없다 돈 버는 그것보다 더 소비하는 사람은 절대 부자가 안 된다. 그래서 보통 부자들은 자기가 먹는 것도 아껴가면서 돈을 모은다. 그래야 부자가 된다. 한 예로 친한 친구 3명이 있다. 20억 정도의 재산가와 기초 생활 수급자, 공직을 은퇴한 사람이 택시를 타고 갔는데 아무도 택시비를 계산하지 않아 운전자가 당황했다는 실제 이야기가 있다. 남에게 많이 베푸는 사람은 재산도 좀 있고 배려의 미덕을 지닌 인품이 반듯한 사람이 사회적으로 기부도 동료에게 많이 베푸는 장면을 많이 목격할 수 있다. 

 어떤 기관이든 사업장이든 대표자가 있다. 그 가관이나 사업장에 소속되지 않는 일반 사람들은 대표자로 선임된 사람의 우월성을 인정한다. 기실 그 집단에서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대표성을 가진 사람보다 조직의 인사권을 가진 사람에게만 인정받아 대표자가 된 사람이 대부분이라는데 부정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최근 정부 고위 관직 청문회를 보면 대표성 자질과 자격이 상실되었다고 판단해도 임명이 강행되는 경우가 많이 보인다. ‘아부만이 살길이다.’라는 말에 극히 공감이 간다. 학교에서는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관용의 미덕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반장을 뽑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공부가 뛰어난 학생의 포용력이 보통의 학생보다 좁고 개인주의를 넘어 이기주의에 가깝다는 체험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래서 대학 추천서에 이 학생은 절대 합격시키면 안 된다고 적는 교사가 생각보다는 많다고 한다. 믿음의 허상에 종결점이란 생각이 든다.

 둘째로 위인전에 대한 믿음의 허상이다. 우리 세대나 우리 아이들은 위인전을 참 많이 탐독했다. 우리나라 위인전 약 30권, 동양의 위인전 약 30권, 서양의 위인전 약 30권을 사들이어 책장에 꽂아두고 아이들에게 탐독하도록 종용한 적이 있다. 그러다가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았던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란 아주 두꺼운 책을 읽고 위인들의 허구성을 보고 다시는 우리 애들에게 위인전 읽기를 채근한 적이 없다. 한 인물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허구(虛構)로 덧칠했을까? 허구는 거짓말이다. 교육을 위해 불가피하다고 강변할지 모르지만, 그 위인전을 읽는 사람은 그것을 따라 하는 경우가 많다. 조심해야 할 일이다. 교련 교사가 교련이 없어지며 부전공으로 수업하면서 주변 상식이나 관련 문헌의 지식이 부족하니 교실에서 군대 자랑을 많이 한 모양이다. 여학생이 군대가 진짜 좋은 줄 알고 대학 졸업 후 ‘부사관’으로 임관했다가 실망하고는 인생을 자책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우리 교사들이 진짜 새겨듣고 자기의 편견에 의해 학생 진로를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일은 없어져야 하겠다.      

 셋째는 청춘 남녀의 만남이 장래의 희망으로 부푼 꿈을 꾸지만, 현실은 그리 장밋빛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첫눈에 반하여 만나든, 좋은 내적 조건과 화려한 외적 조건을 가진 사람을 만나든, 두 사람이 합심하여 노력해야만 장밋빛 미래가 있는데 그 노력을 게을리하면 믿음의 절벽이 온다. 인간은 완성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라 첫 만남이 좀 부족해도 서로 배려하고 서로 믿음으로 해결할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완벽한 조건을 우선 생각하고 외적 환경을 중요시하는 경우가 많다. 소위 일류 대학 졸업하고 연봉이 많은 곳에 취직한 사람이거나 사(士)를 달고 있는 전문가, 재벌급은 아니라도 재벌에 버금가는 집의 자식이나, 중견 기업의 자제들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좋아 보인다. 이런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 낳아 살면 저절로 행복해질까? 음양의 조화가 이루어져야 행복의 결실이 많아지는데 위의 조건은 전부 양지이다. 양지끼리만 만나면 서로 부딪친다. 1990년대 미국 유학을 마치고 온 지인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자기 지도 교수의 딸이 전부 국제변호사인데 남편의 직업은 벽돌 쌓는 사람, 도배사라고 하는 말에 그 당시의 생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흔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현재 우리나라도 부부가 서로 바빠서 겪는 갈등과 아이들 양육 문제가 심각함을 볼 때 서로 양지가 아니라 음양의 조화가 더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좋은 조건이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믿음을 버리고 함께 손잡고 걸어가는 인생이라 믿어야 할 것 같다.     

 아무 대책 없이 무조건 믿는 사람의 고사성어를 미생지신(尾生之信)이라 말한다. 믿음은 어디까지나 관계에서 형성된다. 인간관계를 시작하거나 진행하면서 잘 분석하여 믿음에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관계를 중단해야 한다. 지금은 개인적인 「빚 보증제도」가 없어져 재산을 탕진하거나 가족이 해체되는 경우가 적다. 옛날에는 어느 사업가가 파산하면 주변에 친, 인척이나 친구들이 경제적으로 폭삭 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경제뿐만 아니라 가족의 해체도 다반사로 이루어졌다. 믿음은 확실한 믿음의 근거가 있을 때 믿자. 선입견이나 편견에 의해 믿음이 형성되면 끝은 대부분이 낭패로 끝난다. 다시 한번 믿음에 대해 음미하며 자각을 해 보자. 

                                                              2019. 5. 9. 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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