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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윤헌 Jan 05. 2024

일탈(逸脫)에 대하여

일탈(逸脫)에 대하여     

 ’저 사람은 법(法) 없어도 살 사람이다 ‘라는 말에 굉장한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일상적인 삶에서 늘 도덕적이고 상식적인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 의미 있는 삶이고 가치 있는 삶이라고 자부심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4계절이 변하듯이, 모든 사물도 변하고 찰나적인 시간에도 인간의 마음은 변하기 마련이다. 불교에서는 늘 같은 마음을 가지기를 강조한다. 번뇌와 고뇌가 소멸한 상태인 열반이나, 진여의 이치가 평등하고 차별이 아니고 하나라고 하는 일여(一如) 사상을 강조한다. 인간의 감정 기복이 심한 것보다는 늘 감정이 고른 상태를 최고의 경지로 보고 여기에 도달하고자 수련하고 있다. 그러나 늘 같은 마음을 현실에 실현하기 어려운 것이 범부(凡夫)이다. 수양되지 않는 사람의 삶에 늘 평상심을 강요하면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져 창조성이나 독창성을 잃을 가능성도 있다. 고승들처럼 완벽한 수련을 통해 평상심으로 절대적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최고의 삶일 것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역경과 고통이 있는 삶을 이겨내는 삶이 인간 삶의 존재 이유라고 단정해도 별 의의가 없을 것이다. 보통 사람의 삶에서 일탈은 매우 소중한 재산이다. “왜?” “인간이니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소확행(小確幸)의 근거는 일탈에서 오는 것이 많이 있다고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일상을 상식에 따라 사는 삶을 일상적인 삶이라 하고 법에 저촉되지 않고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 즉 상식적인 삶의 범위를 벗어나 행하는 행동을 우리는 일탈적인 행동이라고 명명한다. 가끔 법을 벗어난 행동도 일탈적 행동으로 규정하지만 나는 여기서는 법을 벗어나는 것은 범법 행위이기 때문에 일탈에서 제외한다. 그런데 보통 사람 대다수 행위가 상식적이고 윤리적인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엄격한 도덕적 잣대로 모든 사람의 행위를 한 가지 기준으로 평가할 때 일탈 행위가 아님이 없을 것이다. 그만큼 행위에 관한 판단을 어느 기준에 따르느냐에 따라 일탈의 기준도 많이 바뀔 것이다. 일상적으로 우리 조상들은 일 년 중 하루 일탈을 허용했다. 바로 ’ 만우절‘이다. 지금은 잊혀 가고 삶의 재미가 공공기관을 어렵게 만들어서, 엄격하게 규제하지만, 농업 사회에서는 도덕적인 군자도 하루 정도는 일탈을 허용한 것이 만우절일 것이다.     

 일탈의 긍정적인 측면은 삶의 소소한 행복을 제공하고 고정된 사고에서 벗어나 창조적인 생각을 하게 되며 일상의 권태로움에서 벗어나게 한다. 반면 일탈이 부정적 측면은 자신이 행한 행위의 결과가 자신에게 치명적 손상을 입게 할 수도 있고 상대에 대한 배려 없는 행위로 상대에게 지울 수 없는 원망으로 평생 속죄해야 하는 일도 있다. 물론 일탈 행위가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라 행위되는 것은 아니다. 거의 즉흥적이거나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이고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탈적 행위이다.      

우리 일상적 생활에서 소소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탈의 긍정적인 사례를 몇 가지 나열해 보자. 부부간의 사랑함에 늘 같은 방법, 같은 장소에서 변화 없는 사랑을 하게 되면 권태로움에 질겁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전문가들도 부부의 권태기를 벗어나려면 일탈적 행동을 하도록 충고한다. 남이 이야기하면 ’ 변태‘라고 하는 성적 행위는 부부에게 신선하고 짜릿한 즐거움을 가져다줄 것이다. 설령 남이 알아도 부부이기에 손가락질의 대상은 아니 될 것이다.

 반면 일탈적 행위가 상대에게 치명상을 주는 경우이다. 주로 공감 능력 없는 장난이 지나칠 경우가 많을 것이다. 우리가 어릴 때 수박 서리, 농작물 서리를 했다. 작은 피해가 아니라 농작물 자체를 피폐하게 만들 때 일탈이 아니라 범죄가 된다. 그리고 어느 여성이 노상에서 허리를 굽혀 뽑기 게임을 하는 데 낯선 남자가 여자에게 소위 ’ 똥치미‘를 하다가 여성이 치질이라 엄청난 수술비와 성추행죄로 감옥에 가는 경우가 신문 지면을 메운 적도 있다. 공감하는 친구나 소통이 되는 여자를 놀라게 하여 남자에게 안기는 장난은 분명 일탈적 재미지만 아무에게나 장난은 죄악이 될 것이기에 조심해야 한다.


 내 직업이 교직이면서 윤리 교과를 가르치는 특수성 때문에 행동거지를 늘 조심한다. 혼자 있어도 낯선 곳에 있어도 늘 조심스러운 것이 나의 직업병이다. 올 8월에 고등학교 절친 5명이 대구 김광석 거리에 놀러 갔다. 고등학교 친구이니 고등학생으로 돌아가고픈 욕구도 있고 교직의 중압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김광석 동상에 기대고 서서 ’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란 노래를 크게 부르고 친구들도 손뼉 치며 환호하는데 주변 관광객도 공연 보듯 모두 서서 흰머리 날리며 놀고 있는 중년의 모습을 보고 있을 때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청년이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한다. 정신이 번쩍 들어 쳐다보니 올해 졸업한 졸업생이다. 부모님과 여행을 왔는데, 선생님 모습이 보여서 인사한다고 한다. 제자 부모와도 인사를 한다. 모처럼 일탈하려다 부끄러워 얼굴 붉히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고3 수학능력 고사가 끝이 나니 청소년의 일탈이 걱정이다. 청소년의 일탈은 청소년이 아닌 성인의 행위를 미리 당겨서 하려는 행동이 일탈로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이 차 운전이다. 19세 이상이면 면허증을 발급받을 수 있기에 면허증을 소지한 상태에서 운전하면 일탈이 아니라 정상적인 행위가 되는데 면허증을 발급할 시간을 주지 않아 면허증 없이 차를 운전하다 사고가 나면 범죄가 되는 일탈의 대표적 사례가 된다. 나는 8년 전에 학년 부장을 하면서 우리 학급의 학생들에게 수능 이후 바로 운전 면허증 발급을 위해 체험학습으로 처리하여 면허증을 발급받도록 유도했다. 우리 반에 6명이 면허증을 발급받았고 수능 이후 교외 체험학습에 차를 운전하고 왔다. 몇몇 선생님이 잘못된 것이라 이야기했지만 결과적으로 사고는 없었고 군대 갈 때 면허증이 있어 특수병과로 입대하는 유리한 점도 있다.     

 고3 학생 즉 청소년의 일탈을 사회 구조적 측면에서 논의해 보자. 현재 우리나라 사회구조에서 학생은 사회적 활동을 전혀 할 수가 없다. 이성적 판단은 성인과 별 차이가 없는데, 실천적 행위는 모든 행위가 법이나 윤리에 저촉된다. 청소년에게 술을 판매하면 학생은 경고이지만 업주는 생계유지가 곤란해진다. 법적 제도를 많이 개선해야 하고 사회적 인식도 많이 바뀌어야 한다. 사고를 좀 개방하고 상대를 인정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고 오히려 우리에게 소소한 행복을 가져다준다. 사회 통념상 성인의 기준을 18세로 하자, 선거권이 선진국에서는 18세이다. 정치, 사회적으로 판단 능력이 충분하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정치적 문제로 19세에 선거권을 부여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나라 청소년을 너무 유아로 대접한다고 볼 수 있다. 매년 12월 31일과 1월 1일이 겹치는 저녁 0시가 되면 고3 학생들이 술집에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우리도 술을 합법적으로 마신다며 행사를 벌인다고 한다. 젊음을 발산하는 축제의 한 형태이지만 1초 사이에 일탈과 합당한 행위가 되는 우리나라만의 특징일 것이다.      

 일탈이고 비윤리적이라 비판받는 젊은이에게 올바르게 행하도록 교육과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흡연은 기호 식품이기에 국가에서 금연을 홍보하지만, 피우는 사람은 아무리 제동을 걸어도 피운다. 청소년도 마찬가지다. 어떤 상황에서 피우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엄격한 법적 잣대를 갖다 대지 않고는 근절하기 어렵다. 교내에서 금연은 참 좋은 정책이다. 교내 금연이 없을 때 학생들이 화장실에 흡연이 빈번해서 쉬는 시간마다 화장실 입구를 지킨 적도 있다. 그러나 정부의 강력한 대처로 학교에서 흡연은 많이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학생들 자체가 모두 금연했다는 보장은 없다. 남을 배려하고 청소년의 흡연이 해롭다는 교육을 지속해서 시키는 것이 중요하리라 생각한다. 음주 같은 경우에 어른 앞에서 배워야 한다. 필자가 대학 입학 당시 어른 앞에서 술을 배운 적이 있다. 술상을 앞에 두고 술 한잔 따라 올리는 예법, 마시는 예법, 안주 먹는 예법을 배웠다. 반듯하게 앉아서 소주 한잔을 비우는데 30분 이상 걸리니 과음으로 일탈할 수가 없었다. 섹스는 사랑의 일부분이다. 전통사회에서 남자보다는 여자의 순결을 강요했기에 결혼 전에 섹스는 나쁘다는 관념 때문에 청소년의 사랑은 일탈이라 생각하고 사랑한 청소년을 몹시 나쁜 시각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성교육을 철저히 시키고 자기의 성적 주체성을 가지도록 제도적 보완과 교육을 가미하면 청소년의 일탈은 종전보다 훨씬 줄어들 것이다.     

 우리가 평생을 살아가며 유아든, 청소년이든, 성인이든 일탈적 행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유아의 일탈은 경험 부족에서 성장통으로 일어나는 일이기에 치명적인 실수가 아니면 귀엽게 보아줄 수 있고 청소년은 자아 발견의 한 형태로 나타나는 일탈로 규정하면 사회적으로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성인들은 심사숙고 후에 일탈적 행위를 해야지 순간의 선택이 패가망신(敗家亡身)뿐만 아니라 본인의 명예도 잃을 확률이 높기에 매사에 몸과 마음을 삼가도록 해야 한다.     

                                   2019. 11. 18 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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