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윤헌 Jan 09. 2024

’ 기다림’의 묘미

’ 기다림’의 묘미     

 현대 사회를 ‘스피드(speed)’ 시대라 한다. 누가 한 발 더 빨리 가는가에 따라 승부가 갈라지고 이기는 자와 패배하는 자의 결과는 극단적으로 갈라지기에 누구든지 이겨야 사는 세상이다. 예를 들어 토끼가 호랑이보다 반 박자 빠르나 늦느냐에 따라 목숨이 사느냐? 죽느냐? 갈림길에 서고 퀴즈 대회에도 누가 반 박자 빨리 벨을 누르는가에 승부가 교차한다. 힘이 세거나 지식을 많이 있다고 해서 여유만만하게 ‘소요유(逍遙遊)’를 즐기는 일은 죄악에 가깝다고 실생활에 교육되고 습관화된 것이, 현대인의 삶에 자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과연 빠른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일까?


 1980년 4월쯤 서울에 친구를 찾아간 일이 있다. 정보가 그리 발달하지 않는 때라 친구가 있는 곳을 대충 알고 찾아간 것이다. 주어진 정보에 따라 2시간을 골목골목 찾아다녀도 내가 찾는 건물은 없었다. 오후 1시가 넘어서자, 배도 고프고 친구 찾는 일도 포기하고 싶었다. 잠시 쉬었다가 한 블록을 넘어 찾기를 계속하여 드디어 오후 2시 30분이 되어 친구가 기거하는 독서실을 찾았다. 독서실에 가서 억양 센 경상도 사투리로 친구를 찾자, 독서실 총무가 하는 말이 오늘 오후에 학원에 갔다가 저녁에 대구 간다고 했다는 전언이다. 순간적인 허탈감과 배고픔이 밀려오는데 아무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형님 댁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에서 친구를 기다리기로 했다. 올 확률이 낮고 언제 올지도 모르는 친구를 막연히 기다렸다. 오후 4시가 되었다. 이제는 포기해야지. 앞으로 내가 타고 갈 버스 3대가 오면 친구 만나는 것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가 타고 가야 할 시내버스가 두 대가 지나갔다. 이제 버스가 오면 타고 가야지 하고 마음을 다지고 있는데 저쪽에서 친구 모습의 한 청년이 뛰어오고 있었다. 좀 더 가까이 오니 친구가 맞다. 친구를 확인하는 순간 내가 기다리던 시내버스도 정류소에 들어왔다. 드라마나 영화의 한 장면 같아도 실제 내가 겪은 일이다. 둘이 만나 돼지고기 수육에 소주를 한잔하면서 떨어져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데 주인아주머니가 사투리가 구수하다고 소주 한 병을 서비스로 받는 행운도 누렸다. 이 조그마한 사건은 내 삶을 살아오는데 큰 지표가 되었다.     

 1989년 교사로 부임하여 첫 담임 맡으면서 ‘빠르게’ ‘멀리’ ‘높이’의 체육계 표어를 교육관에 접목해 3년간 목표 달성을 향해 정신없이 정진했지만,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 ‘기다림’을 학급 경영의 한 요소로 접목해 대만족은 아니지만 주어진 환경에서 최고의 좋은 결과를 도출했다.     

 아이들을 키우면 자연스럽게 남의 자제들과 경쟁 아닌 경쟁이 시작된다. 남의 자식들 장점이 많이 보이고 나의 자식들은 단점만 보일 때가 있다. ‘엄친아’가 대표적이다. 친구들이 자기 자식 자랑하지 않아도 그 자식들은 능력이 출중해 보이고 모든 일을 능통하게 솔선수범하는 모습이 보이며 내 아이들은 조금 더 열심히 하면 잘 성장할 것 같은데 게을러 보이고 왜소해 보인다. 그래서 실망도 한다. 그 마음의 근거가 다른 집 자제들은 하나만 잘하면 좋아 보이고 그 대상이 많다 보니 종합하여 영웅을 만든다. 내 자식들은 영웅과 비교하여 판단 기준을 만드니 내 자식들이 미흡한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인생을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란 찰리 채플린의 말이 실감 난다. 남과 비교하여 남들보다 좀 더 빠른 성장을 촉구하는 부모의 마음은 필요악(必要惡) 임이 틀림없다. 조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자기 계발이 늦어 사회적 경쟁에서 쳐지는 것을 보면 청소년기의 빠름의 경쟁은 불가피한 것이다.     

 우리 자식들은 청소년기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공부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경쟁에서 약간 처지는 모습이 보였고 대학 진학도 보통의 수준으로 진학했다. 남들이 어느 대학에 진학했다고 자랑하면 그냥 묵묵히 들어주었다. 내심으로는 우리 아이들이 실력이나 인성적인 측면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면서 기다렸다. 딸은 서울 소재 중하위권 대학에 입학하여 배움 교실의 봉사 활동으로 자기 영역을 넓히고 삶의 만족도를 높이며 전공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취직이 바로 되지 않았다. 6개월을 자기소개서 쓰는 일에 몰두하다 거의 실패하고 취업하고픈 회사에 아르바이트로 진출했다. 6개월간 열정을 했는가? 딸의 능력이 그 분야에서 소문이 나기 시작한 모양이다. 자기가 아르바이트 한 회사에 부장이 추천서를 서 주었지만 남자 사원이 필요한 회사에서는 우리 딸을 채용하지 않았다. 회사의 경쟁 관계인 회사에 딸이 취직되었다. 정상적 취업보다 조금 늦은 셈이다. 현재는 잘 적응하고 있고 재미있다고 한다. 아들은 대학 졸업을 하면서 취직을 위해 취업 원서를 낸 모양이다. 붙었다 떨어졌다는 통보도 없다. 대학 4학년부터 교수 연구실에서 보조 연구자로 일하면서 해외 학회 발표회도 가고 졸업식 날은 서울 학회에 논문 발표한다고 졸업식에 부모도 초대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대학원을 진학한다고 한다. 대학원 진학하면, 부모에게 부담 주지 않겠다는 약속도 한다. 연구비로 수당 받아서 생활비 쓰고 남는 돈 저축하여 학비로 충당한다고 한다. 대견한 일이라 생각하고 기다리기로 했다. 대학원 1학년 때는 중국, 말레이시아에 학회 논문 발표를 하러 다닌다. 취업도 좋지만 자기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 아들은 박사과정까지 갈지도 모른다. 기다려야지.     

 2019년 3월 9일이 자기 엄마 생일이다. 가족 단체 카톡에 딸이 자기는 일을 열심히 하여 엄마 선물하고 아빠는 엄마 밥 사드리고 동생은 엄마 케이크를 선물하라고 한다. 월급 받으면 50만 원을 꼬박꼬박 부모 통장으로 붙이는데 그 돈에 얼마를 보태어 엄마 생일 선물한다고 생각했는데 딸이 거금 100만 원을 동생에게 부쳐 현금으로 엄마를 기쁘게 해 드리라고 부탁한 모양이다. 딸의 월급날 50만 원이 또 입금되었다. 평소 알뜰살뜰 모은 돈을 엄마 생일을 위해 거금을 투척한 딸의 모습이 너무 대견하다. 아들은 엄마 생일 4일 전에 할아버지 제사에 참석했다. 큰아버지와 고모로부터 참 대견한 조카라고 칭찬을 듬뿍 받았다. 대구 큰아버지는 설날 세뱃돈 못 준 것을 그날 많이 준 모양이다. 이런 자그마한 행동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내공이 쌓여야 나올 수 있다. 내가 생각해도 기특하고 가슴 뿌듯하다. 엄마 생일날 집에 오려다 엄마가 친구 모친상으로 고향에 간다고 하니 한 주일 늦추어 왔다. 우리 아들도 알뜰살뜰 모으고 장학금 받았다고 멋진 저녁을 사려고 한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내가 가슴이 벅차오른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이란 말을 아직 사용하기에는 이르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로서 자식들의 능력을 인정하고 기다려 준 것이 현재의 우리 아이들 모습이 아닐까?     

 어머니가 살아 계실 적에 자주 이야기하던 구전(口傳) 이야기다. 어느 어머니가 꿈에 이무기가 입으로 들어와 입을 열면 이무기가 나갈 것 같아 아들이 정승판서가 될 때까지 벙어리로 살았다는 이야기다. 기다림의 끝을 본 이야기다. 내가 너무 촉이 빨라 자식들 자랑하는 것 같아 이 글을 쓰면서도 약간의 후회를 한다. 자랑하기보다는 묵묵히 지켜봐 줄 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 자식들이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부모가 남에게 많이 베풀면 자식들이 부자가 되고 부모가 정직하면 자식이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했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실천하는 부모가 바로 기다림의 묘미가 아닐까? 진단해 본다.                           

                                                                2019. 3. 16 憲      

작가의 이전글 나의 독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