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윤헌 Jan 16. 2024

행복을 저해하는 일들

행복을 저해하는 일들     

 인간은 누구나 쾌락을 즐길 권리가 있다는 의미에서 세상은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다.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는 본인의 선택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잠들 때까지 끊임없이 선택해야 한다. 선택에는 습관적이고 관행적인 선택이 대부분이지만 특수한 상황이 발생하여 순간적 상황극복이 필요할 때는 매우 이성적이거나 매우 감성적으로 선택을 한다. 선택함에 타인의 힘이나 강제적 권력에 의해 강요받는 선택은 인간에게 많은 고통을 줄 것이다. 부모님, 선생님 또는 선지자의 요청으로 강요된 선택이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는 사람이 가끔 있지만, 그것은 꿀벌이 꿀의 유혹에 오래 머물다 결국 꿀에 붙어 죽임을 당하는 경우처럼 일시적인 주변 환경의 환상적 유혹이 가져다줄 쾌락 때문에 강요에 의한 선택이 좋다고 믿는 사람도 있지만, 전체적인 측면으로 보면 불행이 될 것이다. 자신의 주체적 선택을 함에 어떤 조건이나 강요가 없이 행해져야 하기에 ‘자유(自由)’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의 주체적 선택을 통해 목표를 잡고 성취해 가는 과정이 ‘행복(幸福)’을 가져다줄 것이다. 행복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행위 과정이 행복이 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의 궁극 목적이 행복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누구나 추구하고 성취하고픈 행복을 저해하는 일이 있다. 행복을 만들어 주는 일보다 행복을 방해하는 일이 많음에는 누구도 부인(否認) 하기 힘들 것이다. 행복을 저해하는 많은 장애물을 하나씩 제거함으로써 행복의 지속성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평소 내가 느낀 행복을 저해하는 일들을 나열해 보자.

 첫째로 매사에 다른 사상(事象)과 비교를 하지 말자. 조선 시대에 농부가 누런 소와 검은 소를 쟁기에 묶어 밭을 일구고 있다가 새참을 먹으면서 지나가던 황희 정승에게 새참을 권하자 황희 정승이 농부에게 소 둘 중 어느 소가 일을 잘하느냐? 고 묻자, 농부가 황희 정승의 귀에 귓속말로 “검은 소가 일을 잘합니다.” 한다. 황희 정승이 의아해하며 사람 말을 못 알아듣는 소인데 굳이 귓속말로 하느냐고 하자 동물이지만 비교당하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다는 농부의 말을 듣고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황희 정승의 일화이다. 나 역시 50년 이상을 살아오면서 남들과 비교하면서 삶을 살아온 것 같다. 대학 다닐 때는 궁색한 생활로 남들과 비교 불가였지만 나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살아가는 친구들을 질시하고 동경하기를 반복하다가 졸업 후에는 직장을 구하는데 연봉이 많거나 대기업에 취직한 친구와 내 직업 비교하기, 결혼할 때는 보금자리와 신혼 물품 비교하기, 아이들 키우면서 본격적인 아이들 성적 비교하기, 집이나 승용차 등 외형적인 모습들 비교하기에서 많은 부분에서 내 것이 초라함을 느끼며 하루하루 분발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내면적인 인격도야와 아이들의 자존감 교육을 매우 중시하는 삶을 선택하여 지속해서 노력해 왔다. 최근에는 외형적인 비교는 아무 의미가 없고 각자의 처한 위치에 따라 다 다른 삶을 영위하는 모습이 좋게 보이고 개인적으로는 건강과 편안함만 마음속에 남아 있다. 앞으로 몇 년을 더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비교하지 않는 삶이 행복하리라 굳게 믿는다.     

 둘째로 매사에 ‘남 탓하기’ 하지 말자. 천주교 미사에서 신부님이 가슴을 치며 ‘내 탓이로소이다’라는 장면이 나온다. 왜 미사에 이런 행사가 필요할까를 느끼는 데 40년이 걸렸다. 고등학교 1학년 개교기념일에 본 미사 장면이 아직 눈과 귀에 생생하다. 우리 옛 속담에도 ‘잘 되면 내 탓이요, 잘못되면 조상 탓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습관적으로 책임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최고 심한 곳이 정치권이다. 그래서 정치권에 있는 사람은 행복이 작을 것이라 믿는다. 선택을 내가 해야 하듯 선택에 따른 책임은 나에게 있다는 신념으로 살아갈 때 매사에 신중하고 깊은 사색에 의한 선택과 집중이 행동으로 옮겨질 때 행복의 양과 질이 많으리라 굳게 믿는다.     

 셋째로 결과에 완벽성, 무결점, 결백성을 강조하지 말자. 일을 성취해 가는 과정에서는 완벽하고 철두철미하며 결백성이 필요하지만, 결과에 완벽성을 추구하는 것은 무리이다. 인간의 일에 완벽은 없다. 신들의 작품에만 있는 완벽성을 인간들이 흉내 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함에도 결과의 완벽성을 추구한다. 이외수 소설 ‘칼’에서 신검(神劍)을 만들기 위해 결국 자기의 목숨을 내놓는 장면이 떠오른다. 완벽이야 하겠지만 목숨을 잃으면 행복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매사 일 처리나 삶을 선택함에 완벽해지려고 노력하는 자세는 무척 중요하다. 결과의 완벽성에 치우치면 자신의 화(禍)를 키우는 근본이 되리라 생각한다.     

 넷째는 매사에 상대에게 인정받으려고 하거나 상대방의 마음을 분석하지 말자. 초등학교 시절 읽은 동화에 아버지와 아들이 나귀를 끌고 마을을 지나는데 그냥 나귀를 끌고 가도 주민들이 비난하고, 아버지가 타고 아들이 나귀를 끌고 가도 비난하고, 아들이 타고 아버지가 나귀를 끌고 가도 비난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다 타고 가도 주변 사람들이 비난하는 동화를 읽고 무척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이 동화를 현대에 맞게 다시 편집해 보자. 나귀에 사람이 타지 않고 그냥 끌고 가면 동물 보호 차원에서 칭찬할 것이고, 아버지가 타고 아들이 나귀를 끌고 가면 아주 효성스러운 아들이라고 칭찬할 것이고, 아들을 태워 가면 자애로운 아버지라고 칭찬하고, 두 사람이 다 타고 가면 현실에서 유용성 측면에서 최고의 선택이라고 칭찬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시대가 바뀌면 보는 시각도 다를 수밖에 없듯이 사람의 마음은 시시각각 변한다. 불교에서는 찰나(刹那)에도 수없이 바뀌는 것이 사람 마음이라고 진단하고 있으며, 심리학에서도 1초에 수백 번 움직이는 것이 마음이라 한다. 옛 속담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마음속은 모른다.’라고 말하듯 수시로 바뀌는 상대방의 마음을 인정받으려고 하고 분석하는 것은 행복으로부터 자꾸 멀어져 가는 실마리가 될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만큼 상대가 나를 존중하거나 배려해 주지 않는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存)이란 문구 자체에 존재 자체의 존귀성, 개별성, 주체성을 강조한다고 생각한다. 나로부터 시작임을 명심하는 것이 행복의 실마리가 되리라.     

 다섯째 미래에 일어나지 않을 일을 부정적으로 추측하지 말자. 현대인들이 공황장애(恐惶障礙)를 겪는 사람이 많다. 젊은 시절 작은 피해의 경험이 축적되어 관념의 다발이 상상력을 첨부하면서 미래의 부정적 일들이 마음속에서 일어나면 가슴이 답답하고 모든 일이 막막하여 우울해지는 것이 사람이다. 농업 사회에서는 지구 환경적 순환 과정에 잘 적응하고 순응하면 된다. 지구 전체의 뉴스나 먼 미래를 내다볼 여력도 없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현대 정보화 사회에서는 전 지구적 사건을 내 손 안에서 아우르고 있다. 어떤 정보에 내 상상력을 붙이면 엄청난 사건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30대 중반에 외국 여행에서 호텔 승강기에 30분간 갇혀있고 난 후 가끔 ‘폐소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다. 공포 영화 ‘터널’을 보고 터널에 들어가기 싫은데 마산에서 포항 가는 고속도로에 금정산 터널 길이가 7km 넘는다. 중간쯤 접어들고 차는 서행하는데 가슴이 답답해 차를 버리고 뛰쳐나가려고 몸부림친다. 가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아내가 다독거려 주어서 간신히 그 상황을 모면했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불행의 실마리(緞綃) 임에 틀림없다.     

 행복을 저해하는 요인들을 나의 경험치에 5가지 사실을 살펴보았다. 행복해지려고 한다고 무조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에게 행복이 스스로 찾아가는 일은 더더욱 없다. 절차탁마(切磋琢磨)를 교훈(敎訓) 삼아 행복에 매진합시다.     

                  2018. 8. 23 憲

작가의 이전글 코로나 –19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