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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윤헌 Feb 18. 2024

아버지와 돈

아버지와 돈     

 토요일 저녁 7시에 KBS 1 TV에서 ‘동행’이란 프로그램을 방영한다. 얼마간의 각색이 있겠지만 매번 볼 때마다 마음이 찡해 눈가에 이슬을 묻히고 있다.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착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고 가끔 몸이 불편한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도 등장해 세상은 살 가치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프로그램이다. 오늘 방송에는 청소부를 하는 60대가 이발 장비를 가지고 거동이 매우 불편한 중증 장애인을 찾아가 이발 봉사를 하는 장면인데 불현듯 아버지가 생각났다. 지금은 고인이 된 지 10년이 다 되었지만, 아버지가 살아생전 1년에 쓰신 돈이 이발 비용밖에 없는 것이 떠올라 왠지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기 힘들었다.     

 1926년 태어나서 고향 집에서 1990년까지 농사일로 평생을 사시다가 어머니가 조카 뒷바라지를 위해 5년 동안 포항에 계실 때 같이 간 것 빼고는 일생을 고향 밖을 나가신 적이 없으신 분이다. 1945년 어머니와 혼인하여 큰아들 낳고 6.25 전쟁 중에 군대 입대하여 6.25 전쟁이 끝나고 제대하여 6남매를 키우시며 큰 집도 몇 채 짓고 농토도 많이 늘려 마을에서 가장 모범적인 가장으로 살아오셨던 분이다.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되는 1970년대에도 특용작물이나 비닐하우스 같은 일에 손대지 않고 순수 농업만 고집하신 분이다. 그래도 내가 아주 어릴 때 추수가 끝나면 농토가 생겨나던 기억이 있고 목돈을 마련하시는 일은 늘 아버지 몫이었는데 돈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보지 못했다. 경제적 소비는 늘 어머니 몫이었다. 어려운 살림이라 당신이 풍족하게 쓰시면 다른 사람이 쓸 것이 없어서 가족을 배려하신 지 아니면 농촌에서 밥 먹고 사는 일 이외는 다른 취미가 없고 술을 전혀 안 드시니 술값이 필요 없어서 그런지 아버지는 돈 쓰는 일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으신 것 같다. 비 오는 날 주막에 나가시면 동네 사람들과 막걸리 내기 화투도 하시고, 친구들과 맛있는 안주와 약주라도 잡수시면 돈의 필요성이 좀 있을 만도 한데 아무리 비가 내려도 주막에 안 나가시고 집에서 달력 뒷면에 한자 쓰기에 열중하시는 분이시다.      

 외할아버지 살아 계실 때에 외할아버지가 집에 놀러 오셔서 사돈이신 할아버지에게 하소연하신 내용이다. 사위라고 한 명 있는데 시장에서 만나도 막걸리 한잔 대접하지 않는다고 하소연하신 기억이 새롭다. 시골 오일장인데 아버지가 시장에 가시는 일은 농기구 구매 빼고는 가신 일이 없는 것으로 기억이 난다. 보통 다른 집 아버지들은 시장에 가서 약주 한잔하시고 갈치나 간고등어 한 손, 짚으로 묶어 오시면 그날 저녁상이 풍족해지는데 우리 아버지는 시장 가셔도 생선 한번 사 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외할아버지 말씀에 시장가도 잘 안 보이는 사위가 어느 날 시장에서 만났는데 “장인어른 장에 오셨습니까.”라는 인사만 하고 바쁘게 어디론가 가버리더라는 것이다. 보통은 오랜만에 장인어른 만나면 국밥 한 그릇과 막걸리 한 사발 대접하는 것이 도리인데 아버지는 당신이 술을 못 잡수시니 술을 대접하는 것은 머릿속에 생각이 없는 분이기에 장인어른에게 술대접은 생각 못 하신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시장에서 살 물건값만 가지고 가서는 돈에 여유가 없기에 장인어른 대접을 못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대학 다닐 때 우리 집 형편이 최고 어려운 시기였다. 농촌에서 소득은 적고 내가 대학에 다니며 돈이 필요했고 조카를 어머니가 키우다 보니 집에 돈이라고는 없었다. 나 역시 자취생활로 경제적 어려움에 살기 힘들었지만, 부모님은 있는 돈은 전부 아들에게 주고 어찌 사셨을까? 지금도 생각하면 오금이 저리고 가슴이 아파진다. 한 달에 한 번씩 시골에 가면 어머니는 조카를 업고 마을 곳곳을 다니시며 돈을 빌려 오신다. 마을에서 초등학교 졸업하고 대구 가서 택시 운전하는 아들을 둔 집에 자주 가신 것 같다. 어머니가 마련한 돈은 내가 최저 생활하기 힘든 돈이라 2년 자취생활 후에, 영양실조에 걸려 집에 와도 보약을 해 줄 처지가 못 되어 집에 기르던 닭을 삶아 먹고 기운을 차린 기억이 있다. 부모로서 다 큰 자식이 옆방에 기진맥진하여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모진 세월의 고비는 시간이 흐르면서 지나갔고 막내아들도 취직하여 결혼시키고 유학 간 아들이 돌아와서 포항에 안착할 때 아버지는 65세 연세로 농사를 접고 포항에 잠시 가 계실 때 일화(逸話)다. 자식들이 조금씩 준 잡비를 나름대로 모으신 모양이다. 그 돈이 약 36만 원인데 그 당시에는 교사 한 달 봉급의 절반 정도 되는 조금 큰돈이다. 그 돈을 뒷주머니에 넣고 기분 좋아 투표하러 가신 것이다. 1995년 첫 지방자치 선거에 ‘홍 씨’ 가문 사람이 군수로 나오자, 주소가 고향으로 되어있던 아버지는 투표하시러 고향 갔다가 오시는 길에 돈을 소매치기당하고 낙심하여 며칠을 앓아누우신 적도 있으신 이후 또다시 돈을 손에 잡는 것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고향에 내려와 84세까지 사시면서 세뱃돈이나 잡비 드리면 정확히 3초 후에는 어머니 손으로 넘어갑니다. 평생을 사시면서 자식의 큰돈은 아버지가 손수 마련하시어 주셨지만, 잡비나 세뱃돈은 한 번도 주신 적이 없던 분입니다. 가끔 예외는 있었는데 바로 우리 아이들에게 주는 용돈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10살 미만일 때 뒷주머니에 만 원짜리 두 장 꺼내시어 손녀, 손자에게 주시면서 “할아버지가 할머니보다 더 좋제?” 하시며 행복해하시던 모습이 눈에 아련합니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우리가 간다고 하면 돈 2만 원을 어머니에게 주라고 하신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돈의 소중함이나 돈이 주는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잘 알고 계시는 아버지인데 당신이 뜻대로 돈을 쓰시면 결국 집안 식구들이 궁핍해진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기에 돈을 가까이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옷 선물도 해 주시면 관(棺)이 무거워 안된다고 하사며 사절하셨는데 칠순에 아내가 우격다짐으로 백화점에 모시고 가서 좋은 양복과 구두를 맞추어 주었더니 돌아가시기 전까지 외출복으로 입고 다니신 적이 있습니다. 참 어려운 시절 힘들게 사신 분들이 아버지 세대 같습니다. 청소년기에 해방 전후로 좌익 우익으로 친구 간에도 반목하고 6·25 전쟁을 몸소 체험하고 전투하시며 구사일생으로 살아오시고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점에 새로운 문명에 적응 못 하시어 산업사회가 주는 쾌락을 즐기시지 못한 아버지 세대들 덕분에 현재의 우리가 참 즐겁게 잘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2019. 6. 25 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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