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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윤헌 Feb 19. 2024

결혼기념일

결혼기념일     

 옛날에 60대 어른이 세월이 참 빠르다고 하면 나는 늘 고개를 갸우뚱했다. 특히 가난한 대학 생활을 하던 나는 빨리 졸업하고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고픈 마음이 간절했던 나로서는 세월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했기에 더욱 그런 말에 공감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이제 40대 중반을 치닫는 나이가 되니 옛적에 연세 드신 어른 분의 말에 공감(共感)뿐만 아니라 실감(實感)을 하는 것 같다. 일반인들도 세월이 빠름을 느끼는 데 특히 우리 같이 교직에 종사하는 분들은 3월 입학하고 좀 있으면 여름 방학이 되고 수능 시험 치고 겨울방학에 졸업식이라 행사가 많아 1년의 세월이 아주 빨리 지남을 피부로 느낀다.     

  내가 대학교수의 꿈을 안고 순수 인문학을 전공하기 위해 대학에 진학했지만, 워낙 가난한 대학 생활과 의지(意志) 결핍으로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직장을 구하려고 노력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에는 순수 인문학을 한 나로서는 직장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교직도 사립학교에 가려면 많은 액수의 돈을 요구한다는 소문에 지레 겁을 먹고 아예 교직으로 나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기에 반듯한 직장을 구한다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 그래서 내가 구한 직장이 상업적으로 적성검사와 인성 검사 지능검사 하는 곳이었다. 정년이 보장되는 직장도 아니고 월급이 남보다 많은 곳도 아니고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직장도 아니지만, 상담실장이란 명함으로 남들에게 젊은 나이에 실장님이란 호칭은 들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1년 근무할 때 직원이 필요하여 신입사원 모집하였는데 표정이 밝고 미소가 아름다운 아가씨가 입사를 희망하였고 심사위원의 만장일치로 아가씨를 검사 직원으로 채용하였다. 입사한 Miss박이 맡은 일은 평범하게 하는데 직원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돋보이는 것이다. Miss 박이 입사한 지 몇 개월 후인 것 같다. 내가 퇴근하여 친구와 소주 한잔하기로 약속되었기에 시간 맞추어 퇴근하려는데 누군가 박양이 생일이라고 이야기하여 나는 인사치레로 “Miss 박 오늘 생일인데 저녁같이 먹겠느냐고.” 했더니 Miss 박의 대답이 “실장님! 정말로 저녁 사주실 거예요?” 한다. 그래서 둘이 같이 퇴근하여 친구와 약속 장소에서 같이 저녁 먹고 소주 한잔한 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의 사랑이 시작된 것 같다. 그러나 그 후 6개월이 지나자 회사 사정으로 구조조정과 사무실을 이전하게 되었고 Miss 박은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퇴사하였다. 늘 보면서 좋던 마음이 안 보이니 더 보고 싶어 졌지만, 회사 사정이 좋지 않아서 부산으로 서울로 영업과 관리를 함께 하다 보니 정신없이 바빴던 것 같다. 그러나 바쁜 것도 좋지만 임금이 체불되고 희망도 서서히 사라질 때 지금의 직장인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임명하겠다는 통보를 받았기에 회사를 그만두고 1989년 마산에 오게 되었다. 마산에서 직장이 안정되고는 Miss 박과 결혼 이야기했고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우리는 결혼을 1990년 1월 7일 아내의 집이 있는 홍천에서 결혼식을 하였다.     

 15년 동안 살면서 특별히 결혼기념일 행사를 한 적이 별로 없었다. 방학 중 보충수업도 있었지만, 시작이 가난한 결혼이었기에 아직 살기 바쁘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장미꽃 몇 송이로 때우고 짜장면 한 그릇으로 넘어가고 돼지 삼겹살(아내가 잘 먹지 않음)과 소고기로 흥정하다가 돈 액수에 맞는 만큼 소고기 먹기로 합의하면서 지나온 세월이 15년이다. 이제 애들도 어느 정도 성장했기에 둘만의 여행도 가능한 시기다. 아내가 모르는 단체보험 만기 지급액이 내 통장에 입금된 상태이기에 해외여행도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올해는 방학 중 보충수업을 이 날짜 전후해서 며칠을 비워 놓았기에 국내 여행이든 해외여행이든 가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해외여행은 동남아시아 지진 해일로 포기를 했고 신혼여행지인 설악산을 갈 것이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2005년 1월 7일 아침 먹고 드라이브 식으로 떠나 설악산을 가는 깜짝 이벤트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은 때가 이른 것인지?     

 중학교 2학년인 딸이 경남대학교 영재과학원 과학실험 토론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몇 달 전부터 5명이 팀을 만들고 학교 과학 선생님의 지도하에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다. 경남대학교 영재 교육원 수학 분과에 시험 치고 합격하여 면접한다고 토론 대회에 열심히 준비를 못 하였기에 며칠 남지 않아 열과 성을 다하는 딸이었다. 그런데 1월 7일 6시에 일어나 보니 과학실험 토론 대회 준비한다고 밤을 꼬박 새우고는 아빠 내 2시간 후에 깨워줘. 9시부터 학교에서 최종 마무리 미팅이 있다고 하면서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9시에 맞추어 딸아이 학교까지 태워다 주고 집에 와서 아들 학원 보내고 아내에게 드라이브 가자고 하니 좋다고 했다. 내가 차를 몰고 북쪽으로 향하니 어디 가느냐고 묻는다. 나는 설악산 했더니, 아내가 펄쩍 뛰면서 딸이 밤샘하고 공부하고 있는데 여행을 무슨 여행이고? 그렇게 차 속에서 옥신각신하다가 낙동강이 굽이치는 남지(南旨)에서 방향을 바꾸어 마금산 온천 쪽으로 드라이브 코스를 정했다. 꼬불꼬불한 산길 가면서 자식 이야기하다 보니 너무 좋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마금산 온천을 지나 철새 도래지인 주남저수지로 갔다. 주남저수지 둑을 걷는데 아내 손을 잡아보니 참 따뜻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배려 때문일 거란 생각을 했다. 주남저수지의 철새가 하늘을 새까맣게 덮는 풍경을 뒤로하고 우리는 창원 체육관의 프로 농구 경기를 관람하러 갔다. 스포츠는 무지 싫어하는 아내를 잘 알면서도, 이런 기회를 얻어야 인생의 끝이 풍족해진다는 나름의 철학 때문에 실행했다. 실제로 농구 선수가 누군지 하나도 모르면서 경기장을 나올 때는 서장훈이 잘한다고 하는 걸 보면 내 생각이 맞는 것 같다. 집에 오면서 오늘 저녁에는 소고기를 흥정하지 않고 마음대로 먹자고 했더니 애들 피곤한데 외식은 무슨 외식이고 하면서 Mart에 가서 우리 애들 좋아하는 음식을 사서 집에서 풍족하게 하자고 한다. 이런 부분에는 내가 꼭 진다. 하하하 왜일까?? 6시에 집에 와서 안방에 들어가니 우리 딸이 큰 꽃다발을 자기 엄마에게 안겨 주면서 두 분 고맙고 결혼기념일 축하한다고 한다. 너무 대견한 딸이고 고맙기 그지없고 너무나 자랑스럽다. 뒤질세라 우리 아들도 엄마에게 뽀뽀 세례를 하면서 올해는 물질적인 것은 없지만 마음으로 진심으로 결혼 16주년을 축하한다고 한다. 방안에 환한 꽃다발이 더욱 빛난다.     

                                2005. 1. 8 신 새벽. 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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