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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윤헌 Feb 20. 2024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


 1929년 12월 22일(음력)에 태어나신 우리 어머니, 며느리를 4명이나 보았지만, 생신이 설 앞이라 생일상 변변하게 받아 보시지 못하고 평생을 살아오신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여성 근로 정신대 차출을 피하려고 소학교 4학년 마치는 16세에 아버지와 결혼하시고 1년 동안 친정에 계시다가 시집와서 2013년 8월 23일 모든 자식이 지켜보는데 임종(臨終)하셨습니다. 돌아가시는 아침까지 정신을 잃지 않은 우리 어머니 너무나 고운 어머니가 많이 보고 싶어 집니다.     

 ‘어여쁜 여자를 만나면 3년이 행복하고 능력 있는 여자를 만나면 30년이 풍족하고 지혜로운 여자를 만나면 삼대(三代)가 형통(亨通)한다.’ 우리 옛 속담이지만 우리 어머니는 분명 지혜로운 여자입니다.      

 외할아버지가 면사무소에 볼일 보러 가셨는데 아버지가 할아버지 심부름하러 갔다가 외할아버지 눈에 띄어 외할아버지가 왕고모(할아버지 누님)에게 중매를 부탁하여 두 분이 부부의 연을 맺었다고 합니다. 19살에 첫 출산 하시고 막내인 나까지 6남매를 낳으니 다복하다고 할 수 있지만 얼마나 많은 산고(産苦)의 고통이 있었을까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집니다.     

 어머니의 성격은 활달하시면서 강단(剛斷)하시어 집안 대소사에 늘 지도자 역할을 하시었으며, 새마을 어머니 회장직을 18년이나 장기 집권하여 박정희 대통령과 버금가는 독재자(?)의 길을 걸은 인물이십니다.     

 내가 어릴 때 어머니는 고추가 시퍼렇게 자라면 한 소쿠리 따와서 열악한 부엌 환경에도 불구하고 고추전을 부치고, 막걸리 2되를 받아 할아버지 친구 7명을 집으로 초대하시면, 사랑방에서 환희의 소리가 들리곤 했답니다. 사랑방에서 흘러나온 말씀이 “세상에 이런 며느리가 어디 있나?” 하시던 할아버지 친구분들의 말씀 때문에 남에게 베푸는 것이 좋은 일임을 깨닫게 해 주셔서 현재의 내가 인간관계가 아주 원만한 것이 어머니 덕분 같아서 늘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 어릴 적에 먹는 것이 문제가 가장 심각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의 집에 잔치해야 고기 맛을 볼 수 있는 시절이었으니까요. 내가 7살 정도 되었을 때 우리 아래 집에서 잔치하는데 우리 어머니가 잔치 음식을 진두지휘하시면서 잡채 담당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잡채를 먹는다는 것은 지금 일류 요리 먹는 것 그 이상의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친구 엄마들은 자기 아들을 몰래 불러 잡채를 그릇에 담아 뒤꼍으로 불러 빨리 먹이고는 다른 곳으로 가 일하였습니다. 어린 마음이 나도 엄마에게 이야기하면 다른 아이보다 많이 먹을 수 있겠다 싶어 어머니가 잡채를 덖고 계실 때 가서 “엄마 나도 잡채 좀 도고” 했더니 엄마가 손으로 등을 치며 저리 가지 않나 하시며 화를 내신 것입니다. 나는 너무 서러워 울면서 집으로 와 정말 나를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자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자다가 일어나 보니 윗목에 잡채가 한 그릇 있었답니다. 손님 치르는 일을 끝내고 잡채가 남았는지 아니면 낮에 본 막내아들이 생각나서 남은 재료를 더 닦아서 오셨는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인생의 지표가 된 것 같습니다. 내가 성인이 되고 공적(公的)인 직장 생활하면서 가치 판단하는데 이것이 얼마나 큰 교훈인지 모릅니다. 공적인 일은 공적으로 하고 사적은 다음인 것을 깨달았고 왜 어머니가 18년 동안 새마을 어머니 회장직과 집안의 지도자인가를 일깨워 주셨답니다. 어머니 정말 고맙습니다. 당신의 지혜로운 삶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 자식에게도 이어질 거라 장담하고 싶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시골집에서 5년을 혼자 사시면서 텃밭을 가꾸어 참기름과 깨소금만큼은 당신의 손으로 자식을 거두어 주신 우리 어머니, 어머니의 다슬기국, 추어탕, 닭국, 콩가루가 들어간 칼국수, 된장은 아무리 고급 호텔의 음식이라도 이 맛을 따르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시기 두 달 전인 6월에 어머니가 된장 한 냄비 끓여 놓으셨는데 자식들이 맛있다고 경쟁이라도 하듯 밥 한 공기를 가볍게 먹었는데 된장이 조금 짜다고 생각하니 어머니가 너무 늙으신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그리고 며칠 후에, 병원에 입원하시고는 다시는 어머니의 음식 맛을 보지 못했고, 아들은 아직도 된장 맛이 입에 맴돌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정성 어린 음식으로 우리가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하니 세상에 최고가 어머니란 생각이 머리에서 떠날지를 않습니다.     

 종합병원에서 검사가 끝나고 한 달 동안 마산의료원에서 치료받고 계실 때 내 친구들이 병문안 오니 이런 아픈 모양은 보이기 싫다고, 내 친구들에게 욕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우리 어머니, 그래서 친구들이 홍 선생님이 평소 사는 모양이 다 어머니 덕분이라 할 때, 당신의 고결하고 고운 자태와 자기 완결성을 끝까지 버리지 않은 우리 어머니를 너무 존경합니다.

 학교 다니면서 자취 생활하니 음력 생일 찾아 먹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오히려 연탄불이 꺼져 굶고 학교 가면 그날이 내 생일이었던 기억이 많이 있습니다. 결혼하고는 아내가 꼭 챙겨주고 아이들이 크니 내 생일이면 아이들이 더 야단법석을 펴니 생일 잊어버릴 일이 없어졌는데, 아침에 미역국이 있는 생일 밥상을 먹고는 출근하기 전에 꼭 엄마에게 전화하여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우리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 때쯤에 아들 요청으로 전화기를 주니 대뜸 하는 소리가 “할머니 우리 아빠 같은 사람을 낳아 주어서 너무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해서 한참 동안 감동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도 있었습니다. 올해 생일 아침에 어머니에게 살며시 전화를 걸어 보았습니다. 역시 신호만 갈 뿐 받지 않았습니다. 버스 안 출근길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50대 중반이라도 어머니가 많이 그리워지고 보고 싶습니다.     

 고운 자태와 곧은 성품으로 동네 사람들에게 늘 좋은 평을 받아온 지혜로운 우리 어머니, 어제는 고향 친구가 전화 와서 고향에 갔더니 “너희 어머니가 집에 안 보여서 매우 섭섭하데?” 하더라고요. 나는 밤새 이불속에서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지혜로운 어머니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살면서 내 자식에게도 모범을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니!!!     

                               2014. 10.7 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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