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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윤헌 Feb 28. 2024

우리 아들

우리 아들     

 1992년 6월 10일 낮 11시 50분쯤 포항 성모병원 산부인과에서 10시간가량 버티다가 눈망울이 시원하고 머리가 큰 녀석이 큰 울음소리를 터뜨리면서 이 세상에 신고식을 했다. 위의 누나인데, 누나를 데리고 정기 검진하러 마산의 파티마병원에 갔더니 태아(胎兒)가 6개월 될 때, 2살 난 딸에게 의사 선생님이 “너는 좋겠다. 누나가 되어서…….” 그래서 아내가 다시 한번 확인하려고 아들이요 하며 물었더니 의사 선생님이 눈길을 돌리시고는 다음 환자분 받으세요. 하시며 냉정하게 확인을 거절하셨지만, 아들임을 확인하고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임산부의 생활을 한 것 같았다.     

 그리고 4달 후 어머니와 형님이 계시는 포항에서 형님의 친구분이 산부인과 의사로 계시는 성모병원에서 집사람은 몸을 풀었고, 아들임을 한 번도 발설하지 않은 관계로 손자임을 알고는 엄청나게 고무된 얼굴로 손자의 탄생에 환호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병원비까지 부담해 주시려는 형수님과 형님의 따사로운 축복에 우리 아들은 태어났다. 나는 3일 후에 포항에 갔는데 쌍꺼풀이 크게 있고 머리가 큼직하여 매우 음전해 보이는 아이였다.      

 황달 증세가 조금 있어 병원에 입원하라는 의사의 권유를 어머니는 경험적으로 의사의 권유를 거부하고 집에 있으면 괜찮다고 하시고 초보 엄마는 의사 말씀을 따라 병원에 입원시키려 하는 갈등 속에서, 중간적 입장인 형광등 불빛을 밝게 아들에게 비추고는 마음으로 대립하고 있었다. 내가 포항에 도착하자 신(神)의 구원이나 받은 것처럼 기뻐하는 집사람이고, 별것 아닌 것 두고 호들갑 떤다고 약간의 책망하는 어머니 앞에서 아내의 손을 들어주고는 마산으로 와서 병원에 입원하기로 하고 태어난 지 4일 된 아들을 고속버스를 타고 마산으로 왔다. 다음날 학교에 지각을 알리고 파티마 병원에 갔더니 괜찮다는 의사 선생님 말씀을 듣고는 역시 경험적으로 우세한 어머니의 위대함에 마음속으로 찬사를 보내고 어머니 앞에서 어머니의 뜻대로 하지 못한 불효를 출근길 버스에서 조용히 뉘우쳤던 기억이 있다.     

 그 후 건강하게 자란 우리 아들은 신중하기 그지없는 아이였다. 절대로 모험하지 않았다. 걷는 것도 우리 딸은 무릎이 까지도록 엎어지면서 한돌 무렵에 걷기 시작하였는데 돌이 지나도 걸을 생각 전혀 하지 않고 엉금엉금 기어 다니다가 13개월이 채 못 되던 날 아침에 갑자기 일어서더니 뚜벅뚜벅 걷는 것이 우리 아들이었다. 모든 것이 신중하고 남들보다 조금 늦은 행동 때문에 부모는 늘 안심되는 아들이고 걱정이 거의 없이 유아기를 보낸 것 같다. 유아기에 유치원 다니는데 너무 소심하고 신중하여 부모로서 진취적 기상과 적극성에 늘 불만을 보낸 것을 아들 유치원 앨범의 편지를 보고 알았다.     

 누구를 비교하는 것은 좋지는 않지만 두 살 터울의 자기 누나와 비교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딸은 초등 3학년 때부터 크고 작은 상을 타오면서 우리의 희망을 중간 점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 아들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청소 잘하여 모범 청소년 상과 방학 숙제를 어머니의 도움으로 받은 상 두 개가 전부였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5학년 말부터 6학년 1학기에는 독서 상을 필두로 과학상 등 기타 등등으로 8개가량을 수상하여 부모의 마음을 한껏 부풀게 하더니 그다음부터는 또 잠잠하여 더 희망을 펼 수도 없게 만들었다. 


 중학교에서는 소심성과 소극성이 정도를 더 하여 도대체 뭐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과 더불어 나중에 밥벌이까지 부모가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 두려움마저 걱정했던 우리 부부이다. 학원에 다니고 학교에서 시험 치면 매일 공부한다고 방에 들여 박혀 나오지도 않았는데 성적은 20%에서 25%에 늘 머물고 오답 노트 정리한다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어머니에게 사랑의 매도 서슴없이 당해야 했던 우리 아들이다. 그 와중에도 키는 무럭무럭 자라나서 중3 졸업할 때는 180cm에 육박하였고 내가 술 한잔하고 집에 가면 목욕탕에 모시고 들어가 샤워를 도와주어 아침의 숙취를 덜게 하는 효자로 거듭나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는 아들을 거의 성인으로 대접하기 시작했고 늘 아들의 행동에 신뢰(信賴)를 보내기 시작했다. 아직 우리 아들은 적응이 안 되는지 어쭙잖은 표정으로 응대한다. 내신 성적이 좋지 않아 학교에서도 찬밥 신세고 거기다가 우리 학교 선생님 아들이 동(同) 학년이 있는데 입학 선서를 하고 모든 선생님에게 주목받는다고 아버지에게 미안하다고 안절부절못하는 아들이다. 

 3월 12일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교육청이 주관한 수능 모의고사를 치렀다. 수학에는 어느 정도 자신도 있고, 평소에도 열심히 공부했고 집에서도 수학만큼은 학원비를 아끼지 않았다. 영어도 유치원부터 꾸준히 했기에 아버지로서는 중학보다는 고등학교 수능 모의고사가 더 기대되었다. 시험 치기 전에 소심한 우리 아들 걱정이 태산이다. 언어는 어떻게 칠지 모르겠고, 사회, 과학 탐구는 어쩌지? 한다. 내가 한 대답은 “실력만큼 해라. 과학이나 사회 탐구는 비중을 덜 해도 된다.” 다음 날 저녁 점수를 이야기하는데 총점은 360점 정도 되지만 언어, 수리, 외국어 영역에서 평균 85점 정도 되었다. 대만족이다.

 10여 일이 지난 뒤 성적표가 나왔다. 담임 선생님 성적표를 나눠주며 아버지 직업을 묻고 어느 학교 선생님을 물으시고는 언어, 수리, 외국어 영역의 평균은 전교 18등 정도 된다며 열심히 하라고 격려하신 모양이다. 나는 성적표를 보고는 20년 진학의 베테랑답게 분석하기 시작했다. 첫째 언어영역 듣기와 외국어 듣기가 모두 만점이다. 앞길에 서광이 비친다. 이것은 집중력이 제대로 된다는 의미이다. 둘째는 수학이 1등급이다. 문제 해결력에 약간의 허점이 보이지만 잘 친 점수다. 외국어 영역은 한 문제 틀린 2등급이다. 내신은 문법이지만 수능은 어휘력이니 앞으로도 괜찮을 것 같고 언어는 3등급이다. 비문학은 거의 다 맞는데 문학 분야가 많이 틀려서 3등급이다. 문학은 앞으로 교과 공부를 열심히 하면 오를 수 있는 분야이기에 걱정이 없다. 그리고 얼핏 보니 도덕이 25점 만점에 12점 맞았다. 아버지가 도덕 선생님인데……. 이놈의 자식. 어찌할 것이고. 다행인 것은 앞으로 이과(理科)로 진학할 것이니??     

 그 후에 자신감이 붙었다. 중간고사를 치면서 걱정한다. “많이 걱정해라.” 그게 청소년이다. 성실하게 생활하는 아들인데 어느 대학인들 무슨 상관이라……. 어제부터 아들 담임 선생님이 아침 6시 30분까지 등교하여 수학 문제 풀라고 엄명을 내린 모양이다. 아침 6시에 깨우는 데 10분이 걸린다. 밥 먹는다고 앉아 밥 한 숟갈 입에 넣고 잔다.……. 억지로 몇 숟가락 더 먹이고 씻고는 간신히 6시 30분까지 학교 앞까지 태워 주었다. 늘어진 어깨지만 대견스럽다. 한때 우리 아들 중년을 걱정했던 우리 부부인데 이제 깨끗하게 걱정을 벗고 안심해도 되겠다. 아들이 힘들지만, 열심히 하자꾸나. 인생은 뿌린 만큼 거두잖아.


                                     2008. 5. 20 현기 아비 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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