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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리망자 Oct 02. 2024

'이중작가초롱'을 읽고

화해는 무엇인가


이중작가초롱을 친구가 선물해줘서 읽었다. 다 읽은 것은 아니고 표제작인 이중작가초롱까지만 읽었다. 그러니까 앞선 단편인 [하긴]이랑 [그친구]도 읽은 거다.


내개 책을 선물해준 친구는 항상 무언가를 선물해줄 때, 어떤 의미를 부여했다. 나는 그녀에게 꽤나 운좋게 이것저것을 받으면서 하나도 돌려주지 못했다고 느낀다. 그래서 아마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선물받은 것도 아마, 연극 [안타 오이디푸스]를 같이 준비하면서 친구에게 코코넛 주스와 함께 선물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참석하기로 예정되어 있지 않았던 어느 선물 교환식에서도, 나는 그녀에게 후지모토 타츠키 단편집을 받았다.




초롱은 등단하기 전에 쓴 글에서 엄청난 혹평을 받았다. 페미니즘 혁명의 시대에서 합의되지 않았거나 너무 낡은 방식으로 갈등을 봉합하려는 시도 때문이었다. 다만 초롱은 억울하다. 초롱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초롱을 조롱하는 많은 익명의 사람들이 ‘악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미상 작가는 마음대로 해석하고 읽어도 좋다고, 독자에게 맡기겠다는 말을 했다. 난 이 말이, 초롱에게 악하게 대하는 사람들이 잘못됐다고 말해도 괜찮다고 들린다. 


혁명의 시대에는 많은 것들이 제한되고 많은 이전 시대의 익숙했던 것들이 죄악이자 폭력으로 변화한다. 때문에 억울함을 느끼는 인간들이 등장하는 건 당연하지만 그런 하나하나의 억울함들이 다 부당하거나 다 옳은 것만도 아니다. 대공분실을 가지고 소설을 쓴 선생의 억울함도, 그 글이 자신의 이야기라고 느끼는 선생의 친구도 그 굴레 안에 갇혀 있다. 나도 그렇고 당신도 아마 그럴걸? 싶다. 그리고 나는 친구가 어쩐지 이 책을 그냥 주었다기 보다는 반드시 읽을 거란 확신을 갖고 선물하지 않았을까-하는 조금 무례하고 제멋대로인 생각을 한다.






 


이 책을 읽고 돈을 벌기 위해 합정으로 가는 길에서 키라라의 [공천]과 [참변]을 들었다. 키라라는 이 앨범이 처음 시작할 때, 1번 트랙에서 ‘그냥 댄스 음악이니까 재밌게 들어주세요’라고 말한다. 그것과는 다르게 트랙의 이름들이 전부 의미심장하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특히 공천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정치계 용어라기보다는 무언가를 바친다는 뜻으로 나는 받아들인다. 14번 트랙의 공천 reprise를 들어보면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 그래서 나는 너에게로 가’라고 키라라가 읊조린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멜로디가 3번 트랙 stargaze에서 나온다.


‘넌 지금 별을 보지만 난 이제 별이 되려해-’라고.

‘근데 사실 난 좀 무섭다-’고.


그냥 끼워맞추기일수도 있지만 나는 이 두 가지의, 글과 소설이 어쩐지 앞으로, 영원하지는 않을테지만 이러한 태도를 갖고 살아가야한다는 흐릿한 메시지처럼 느껴진다.


세월호 사건은 아직도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았고 뭐 하나 이루어진 것 없이 페미니즘의 광풍도 희미해지고 장애인들은 여전히 휠체어를 탄 채 지하철에서 체포되고 군인들은 전쟁 없이 죽고 노동자는 매번 전쟁을 하다 죽고 이태원은 조용하고 시청광장은 무상급식 반대하던 어떤 놈팽이 새끼한테 뺏겼다고. 그리고 나는 그 2년 동안 가난을 조롱하던 광고를 만들었다. 그러나 예전 같았으면 아마 난 딱 하나의 길을 선택했을 거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이런 이야기들은 앞으로 듣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모두와 점점 멀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공교롭게 회사를 나왔고, 사람을 존중하는 사람과 다시 일하게 되었고, 그 사이에 친구들을 만나며 친구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고 싶어졌고 그 이야기에서 삶의 지향점은 자연스럽게 묻어나기 시작한다.


아무도 바란 적 없는 화해를 하려고 애썼던 시간들을 너무 열심히 잡으려고 했다. 다만 또다른 친구가 내가 매번 미안과 우울과 좌절을 말할 때, ‘너 왜그래, 친구잖아’라는 그 말에서 나는 내 멋대로 또 내 안의 많은 것들을 풀어냈다.


화해는 없다.


혁명의 반대편에 있는 것들은 치졸하고 역겨운 말들을 계속해왔다. 누군가의 새출발을 조롱하거나, 저주하거나, 본인들이 틀렸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음에도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자신들과 똑같은 수준으로 떨어뜨리려는 크고 작은 포퓰리즘과 프로파간다, 혁명의 극단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투신하고 부서지고 있는데, 그렇다고 중간에 있는 나같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재판에 회부하거나 어쭙잖은 화해를 할 필요가 없다는 걸 무심코 알았다는 게 내겐 중요한 것 같다.


화해는 없다,

앞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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