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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리망자 Oct 03. 2024

'스즈키 이즈미'를 읽고

후지모토 타츠키도 조금은 생각하며



예전에 이러한 생활을 했을 때 나는 신경증에 걸렸었다. 언제나 우울해서, 그럴싸한 생활에서는 그 즉시 삶의 고통을 찾아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기묘하게 실체가 없는, 빛나는 꿈의 별 같은 생활을 시작하자고 생각했다. 스콧 피츠제럴드풍의 그것은 매일이 야단법석이다. 그 난리통 속에서 생명도 재능도 낭비하고, 1920년대 미국을 대표 하는 작가는 심장마비로 죽어버렸지만. 역시 인생의 절대량에 변함은 없다. 치열하게 살면 요절한다. - 363p


자기보다 강한 자, 자신을 보호하고 지배하는 자의 의향을 재빨리 알아챈다. 지성으로 이해하려 하면 너무 늦는다. 동물 그 자체의 미숙하고 원시적인 감수성, 어떤 대상이든 노력하면 쉽게 감정이입 할 수 있는 유연함이 가장 중요하다. 일상생활에서는 세세한 것을 바로 적절 히 처리할 수 있는 능력. 머릿속은 아무리 복잡하다 해도, 단순 그 자체인 행동. 그것이 여자의 똑똑함이라고 생각한다. 가능하다면 남자도 그랬으면 좋겠다. 남자들 은 언제나 쓸데없는 논리만 내세운다. 그것이 이 세계를 종말 직전까지 몰고 왔다. 투덜대지 않고 하는 수밖에 없는데. - 394p




스즈키 이즈미의 인생은 너무 무겁고 어두워서 그냥 인생 자체가 하나의 SF 장르의 시나리오처럼 느껴진다. 심지어는 대중성이 떨어져 많은 인기도 얻지 못했지만, 그러한 주인공을 꾸준히 파는 고약한 팬층이 있어서 끊임없이 잊을만하면 회자되는 그런.


하지만 가끔은 이런 사람의 이야기가 내가 생각해왔던 부조리의 끝을 끊임없이 후벼파서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거다. 그녀는 어떻게 살아야할까-는 생각보다는 어떻게 세상이 이렇게나 이상한데 다들 미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인지-를 말하는 사람이라 항상 외롭고 아팠다. 6년 뒤, 나는 스즈키 이즈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나이가 되며, 나는 그때에도 이 사람을 기억하고 이 사람이 쓴 소설과 글을 기억하며, 그때에도 이런 구역질나게 슬픈 생을 기억하고만 싶다. 그래, 그 고약한 팬이 바로 내가 될 것이다. 그런 팬이 살아 숨쉬는 이상, 비록 고약한 인생을 살았고 쉬이 잊혀질 뻔한 사람들일지라도, 인간의 탄생이 계속되는 이상 이들은 끝없이 되살아나 숨쉰다.


요즘은 매일을 야단법석을 떠는 것처럼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실체가 없는 기묘하게 빛나는 생활 속에서 어쩌면 나는 생명과 재능을 낭비하고 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생명과 재능이라는 것은 나는 가꾸기 나름이라는 생각을 한다. 정해진 할당량이 떨어지면 더이상 끌어쓸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진정 계속해서 솟아나는 샘물을 외부에서 끌어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러한 샘물을 더이상 하루에 20km 이상 배회하며 찾아낼 의욕이 사라졌을 때를 의미하지 않나 싶다.

치열하게 산다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내게는 그동안 억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억지로 살아가면 모든 게 치열해진다. 왜냐하면 모든 선택과 한숨 한숨들이 전부 엄청난 도전이기 때문이지. 

인생의 절대량이 변함은 없겠지. 절대량을 사회가 정해주는 세상에서 자신만의 절대량으로 살았던 작가가 요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인생의 기둥이 허약해진다고 느낄 때마다, 후지모토 타츠키랑 스즈키 이즈미를 생각한다.


내 나이 이제 서른이 넘었다. 따뜻한 사람들로부터 따뜻한 말들 들으며 안온하게 사는 것도 좋은데, 나 이제 진짜 더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돈 벌기 위해 아득바득 어떻게든 고개 조아리는 것. 내가 아는 거, 내가 좋은 거, 내가 사랑하는 걸 마음껏 발산하고 살아야한다.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지루한 어떤 마케팅 문구의 일부가 아니고, 이제 스스로 즐기고 스스로 행복하지 않으면 끊임없이 다른 어떤 외부의, 심지어 신도 아니고 그냥 가변하는 시시껄렁한 어떤 문구들과 트렌드같은 것에 매번 내 기분과 정서를 의탁하는 깡통고철이 되는 것이다. 차라리 깡통 고철이면 좋겠다.


내가 갑자기 울적해진 이유는 어떤 스탠드업 코미디언의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를 봤기 때문인데, 그 여자는 화가 나 있다. 뉴욕과 부산을 오가며 코미디를 한다고 스스로를 소개하고 있었는데, 그 여자는 360개의 영상을 유튜브에 업로드했는데, 구독자는 340명이었고, 그 영상들도 대부분 조회수가 200회를 넘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영상들 모두 공들여 찍었다. 효과도 많이 넣었고 자막 작업도 열심히 했고 촬영도 대충 본인이 원하는 구도를 넣기 위해 노력한 것처럼 보였다. 그 여자는 원래 미술을 전공한 사람인 것 같았고 보여주고 싶었는지 왜인지는 모르지만 스스로의 퍼포먼스를 기록한 영상도 본인 유튜브에 올려놓았다. 멋지고 당찬 사람처럼 보였지만 스스로의 표정과 말투에 옅게 깔린 분노가 거북했다. 왜?


예전처럼 이런 거북함을, 똑똑한 여자를 보았기 때문에, 스스로의 남성성이 위협받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등으로 처리하고 스스로에게 멍에를 씌우고 싶지 않아졌다. 설령 위의 말들이 맞더라도, 이 여성을 사랑하거나 좋아하거나 호감을 가질 수 없다. 적어도 내가 본 영상을 토대로 한 나의 인식 속에서는. 사람을 좋게 본다는 건 사실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 간단한 과정 속에서 나는 계속 스스로에게 멍에를 씌우고 있다. 나는 아직 페미니즘을 위협하는 한남으로서의 정체성과 끊임없이 나를 괴롭힌 그 망령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이유 없이 그녀는 내게 그냥 좋아하지 않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의 한 명일 뿐이다. 안소니 제셀닉처럼 나중에 좋아지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의 뇌는 여기서 ‘안소니는 백인남자잖아’ 라는 대사를 또 메인디시처럼 내놓게 된다. 좋고 싫음의 잣대가 이제 마음이 아닌 어떤 규율과 옳고 그름의 영역에 귀속되어버렸다.


사실 두려운 걸지도 모른다. 이 여자가 내 가까운 미래를 보여주는 것일까봐. 남이 욕해도 상관없고 남이 비웃고 조롱해도 상관없다지만, 유튜브 조회수 겨우 200이 안나왔는데, 어떤 걸 듣고 1만 회가 넘었어요-하는 강의 광고를 보고 스스로의 유튜브 채널을 보며 씁쓸해하는, 세상에 있을 법한, 그러나 내가 본 적도 없고 만난 적도 없이 내 상상에만 존재하는, 그리고 제발 내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목적을 갖고 무언가를 하게 될 때, 스스로의 행복애 위배되는 삶을 너무나도 격렬하게 2년 간 가져서 그런지, 이제는 행복이 아닌 다른 것을 목적으로 두고 영상을 만들거나 글을 쓰려고 하면 토할 것 같다.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게 다르다는 게 이렇게 피부로 느껴진 적은 처음이고, 내가 이제부터 죽을 때까지 행복하고 자존감을 높여 살기 위해서는 이제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통합시키는 방법 밖에 없다고 며칠 전 현수와의 대화에서 깨달았다.


이제야 진짜로 사는 것 같다. 사실 가장 몸이 변화하고 뇌가 말랑말랑할 때 시작해야하는 것들이 이런거였는데,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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