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로 1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사는 이모와는 어렸을 때부터 막역한 사이였다.
엄마의 바로 위 언니이기도 했고 아빠가 과거 뇌종양을 겪을 때 날 키워준 사람이기도 하고
서로 가까운 위치에 살아 이곳으로 이사 온 뒤로는 4년 전까진 일주일에 3~4번은 만났다.
그런데 이제 이모는 내 바뀐 연락처도 모르고
난 이모가 사는 아파트 동호수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 모녀와 이모의 사이를 정의하라면...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사이였다.
이모가 웃으면 같이 웃었고, 이모가 울면 같이 울었다. 물론 엄마도 함께였다.
이모는 술만 마시면 울었다.
이모의 둘째 딸은 스무 살이 되자마자 가출해서 애를 낳아와 대뜸 이모에게 키워달라고 했다.
안 그래도 허리 디스크가 있는 이모였는데 차마 딸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어 손녀딸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입혀주고 먹여주고 재워줬다.
이모의 손녀딸이자 내 조카인 그 여자아이는 본인이 원하는 건 모두 가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매일 거짓말을 하여 이모한테 혼나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건 다 제 손에 넣은 후에야 잠에 들곤 했다.
어린 나이에 도둑질도 여러 번 하여 이모의 걱정을 사기도 했다.
사촌 언니는 예비 남편이었던 그 남자와 결혼도 하지 않은 채로 깨지고 다른 남자친구를 사귀었다고 들었다. 동거 생활 또한 몇 달 가지 못했다고 했다.
인생 참 거지같이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이모는 술만 마시면 "그 새끼는 나 봐도 인사도 안 하더라~ 오자마자 나한텐 인사도 안 하고 지 딸 불러서 데리고 가더라~"라고 자신의 형편없는 처지를 한없이 비난하며 목놓아 울었다.
그러다 보니 이모는 주위의 소위 좀 사는(?) 사람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뭔가를 사달라고 하는 데에 익숙해진 사람이었다.
아마 본인도 빼앗긴 게 많아 누구한테라도 기대고 싶었나 보다. 그것이 뻔뻔하다기보다는 그만큼 삶에 미치도록 간절하다고 생각되어서 대학교 다니는 와중에도 커피 사달라고 하면 용돈 쪼개서 사주고, 맛집 가자고 하면 목돈을 모아 함께 갔다. 이모 주위에 좀 산다는 사람은 우리 밖에 없었다. 이모는 **에 산 지 20년이 넘었지만 평생을 일에 집중하느라 인간관계도 좁은 편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평소에 일주일에 4번 정도 이모를 만나면 3번을 우리가 밥과 커피를 사줬고 한 번을 이모가 커피를 사주는 것으로 퉁 치곤 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졌고, 우리도 사업을 시작하게 되면서 대출까지 받게 되자 이젠 그 당연했던 일들이 슬슬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가족끼리 베트남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크나큰 키플링 가방을 사다 달라고 하였다. 당시 한화로만 계산해도 20만 원이 훌쩍 넘는 가격이었다.
사건이 터진 건, 어느 날 엄마가 할머니네 댁을 가는 날이었다.
엄마가 혼자 외할머니 댁에 간다는데 이모가 그 소식을 듣자마자 "김치를 담갔으니 갖다 드려라."라고 큰 상자를 내놨다.
엄마도 허리 디스크로 고생하고 있는데(심지어 엄마는 수술도 했을 정도로 심각했다.) 자꾸 이것저것 사달라고 불러대는 것부터 시작해서 외할머니 댁에 간다고 할 때 김치 상자를 갖다 드리라고까지 하자 결국 내가 폭발했다.
"이모, 우리 엄마도 힘들어. 그만 좀 시켜."
그 이후로 이모는 4년 동안 우리의 눈앞에서 종적을 감췄다. 바로 옆 동네라 나가기만 하면 가끔씩 마주치곤 했는데 최근 4년간 단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다. 우리의 연락 또한 죄다 무시해버린 지 오래다.
그런 이모를 그저께 장례식장에서 4년 만에 처음 보았다.
일할 때 긴 머리는 불편하다고 단발만 고수하던 사람이 언제 기른 건지 머리도 많이 길렀고 얼굴은 한층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엄마는 술에 취해 "언니~ 일로 와~"라고 했지만 이모는 못 들은 척했다. 이모는 정말 독한 사람이다. 한번 관계를 자르면 아예 싹을 잘라버린다.
5일 날, 장례식장에 가면서 다른 의도로 가면 안 되지만 내심 이모 만나는 것을 기대했는데
이모와의 관계는 단 한 칸도 좁혀지지 않았다.
이모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으며 내가 거리를 좁히면 자리를 떠버렸다.
그래, 이모. 인생 그렇게 독하게 살아.
더 이상 바보같이 남들에게 휘둘리지 말고, 나 안 좋아해도 좋으니까, 평생 나 안 찾아도 좋으니까 부디 행복해.
인생은 일만 열심히 한다고 독한 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한테 냉정해질 수 있을 때 진짜 독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