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와 자유
여러분은 아침이 되면 휴대전화 알람을 듣고 일어나서, 세수하고, 교복을 입고, 가방을 챙겨 집 밖으로 나간다. 사람들이 가득 찬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겨우 겨우 제시간에 학교 앞에 도착하면 교문에는 선생님들이 사나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여러분이 교복을 입었는지 아니면 사복을 입었는지를 감시하는 눈빛이다. 사복을 입고 있는 학생들은 붙잡혀 벌점을 받는다. 교문을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가면 등교체크기에 학생증을 찍어야 한다. 학생증을 찍으면 등교체크기 화면에는 여러분이 몇 시에 등교했는지 표시되고 전산 상에 기록이 남는다. 교실에 입실하고 8시 10분이 되면 아침 조례가 시작되고, 그때부터 여러분의 하루는 1~7교시까지 정해진 대로 움직인다. 매 시간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와 출석을 부른다. 수업 중에 화장실에 가고 싶다면,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수업시간에 복도를 돌아다니면 선생님들은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본다.
이렇듯 학교라는 공간은 자유를 억압한다. 사복을 입고 싶은 자유를 박탈할 뿐 아니라, 학생이 속해야 할 공간과 시간도 엄격하게 정해 자유를 박탈하고 있다. 학교를 다니는 학생에게 자유라는 것은 없어 보인다. 그래서 많은 어린 학생들은 빨리 어른(성인)이 되기를 꿈꾼다.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뮤지컬 <마틸다>의 넘버 '어른이 되면(when i grow up)'은 이러한 심리를 대변해 준다.
어른이 되면 한없이 높디높은 나무에도
쭉쭉 뻗은 가지도 쉽게 닿겠지 어른이 되면
어른이 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맴돌던 어려운 질문도 풀릴 거야
내가 어른이 되면
어른이 되면 콜라 실컷 마시고 잠도 늦게 잘 거야
또 출근도 내 맘대로
아침이 오면 눈알 다 빠지도록
밤새서 만화책만 볼 거야
다 괜찮겠지 어른이니
노래의 가사처럼 정말 어른이 되면 자유로워질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이 가사를 듣는 어른들은 헛된 희망을 노래하는 아이들을 보며 슬픔을 느낀다. 어른이 되면 소속된 공간이 학교에서 회사나 직장으로 바뀌었을 뿐, 그 형태는 비슷하다. 어른들도 아이들과 비슷하게 심지어 가끔은 더 혹독하게 감시받고 통제당한다.
더 큰 범위에서 보면 국가도 여러분의 자유를 억압한다. (사실 학교나 회사는 국가에 포함된 작은 공동체다)여러분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안에서 살면서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 수 없다. 공동체는 여러분이 해도 되는 행동과 해서는 안 되는 행동에 대해 법(法)을 만들어 여러분이 하면 안 되는 행동을 정한다. 또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도덕을 규정해 여러분의 행동을 규제하기도 한다.
여러분이 학교나 회사, 국가에서 자유를 억압당하고 있다 느낀다면, 그 억압이 정당한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학교, 회사, 국가 같은 공간들은 왜 자유를 억압할까? 자유의 억압은 무조건 나쁜 것일까?
학교나 회사, 국가가 시시콜콜 여러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불만스럽다면, 산이나 들판, 아니면 정글 같은 공간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거기선 사회가 없으므로 강제적인 규칙도 없다. 여기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면 된다.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는 삶이다. 야생에서 혼자 살아가고 있다면 규칙이란 없으니까 여러분의 자유는 무한하다.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는 이런 상태를 '자연상태'라고 명명한다. (사회나 국가가 만들어지기 전의 상태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홉스는 자연상태는 무한한 자유 때문에 매우 매우 끔찍한 전쟁상태라고 묘사한다.
자연은 인간이 육체적-정신적 능력의 측면에서 평등하도록 창조했다. 간혹 육체적 능력이 남보다 더 강한 사람도 있고, 정신적 능력이 남보다 뛰어난 경우도 있지만, 양쪽을 모두 합하여 평가한다면, 인간들 사이에 능력 차이는 거의 없다. (...) 능력의 희망에서 희망의 평등이 생긴다. 즉 누구든지 동일한 수준의 기대와 희망을 품고서 목적을 설정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같은 것을 놓고 두 사람이 서로 가지려 한다면, 그 둘은 서로 적이 되고 따라서 상대방을 파괴하거나 굴복시키려 하게 된다. (...) 이로써 다음과 같은 사실이 분명해진다. 즉 인간은 그들 모두를 위압하는 공통의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전쟁상태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 전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다. (...) 전쟁상태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만인이 만인에 대해 적인 상태, 즉 자기 자신의 힘과 노력 이외에는 어떠한 안전대책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도 똑같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성과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근로의 여지가 없다. 토지의 경작이나, 해상무역, 편리한 건물, 무거운 물건을 운반하는 기계, 지표(地表)에 관한 지식, 시간의 계산도 없고, 예술이나 학문도 없으며, 사회도 없다. 끊임없는 공포와 생사의 갈림길에서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험악하고, 잔인하고, 그리고 짧다.
- 토마스 홉스 지음, 진석용 옮김, 『리바이어던』, 나남, 2008.
홉스는 자연 상태의 인간에게는 누구나 평등하게 자연권(right of nature)이 있다고 본다. 이 권리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자기 뜻대로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이 권리에 비추어보면 자유란 '외부적 방해의 부재'다.
자연권을 가진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무엇이든 해도 괜찮다. 그리고 외부에서 이 권리의 행사를 방해하지 않는 만큼 자유롭다. 자연상태에서는 이런 자연권을 행사하는 것을 막아 줄 사회나 국가가 없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남을 속이고, 비겁한 행위를 하고, 심지어 남을 죽이고 남의 음식과 물건을 빼앗으며 무한한 자유를 향유해도 된다.
그렇지만 무한한 자유를 누린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깝다. 내가 무한한 자유를 지닌다는 것은 타인도 무한한 자유를 지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그런 상태에서 오래 살아남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내가 자연권에 따라 다른 사람을 죽여도 된다면, 상대방도 나를 죽여도 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누가 이런 상태를 달갑게 여기겠는가? 그래서 홉스는 자연상태란 곧 전쟁상태라고 표현하며, 이상적이기는커녕 끔찍한 상태라고 묘사한다. 이런 세상에서 사는 인간들의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험악하고, 잔인하고, 짧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자연상태에서 벗어나서 나의 생명을 보호하고 싶다면 모든 사람들이 무한한 자유(자연권)를 포기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내가 무한한 자유를 포기했는데, 상대방은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 순간 나는 그의 노예가 되거나, 혹은 살해당하는 끔찍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다. 누구나 자기 자신은 믿을만한 사람이라 자부하지만,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다고 여긴다. 따라서 내가 먼저 자유를 포기한다는 것은. 서로 총을 겨누고 있는 상태에서 내가 먼저 총을 바닥에 버리는 행위다.
먼저 총을 버리기는 부담스럽고, 서로 총을 겨누고 있다간 결국 총을 쏘고 서로 죽이는 전쟁이 반복될 것이다. 이 두 가지 상황을 모두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와 상대방이 약속을 하고 총을 동시에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포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여전히 인간을 믿을 수가 없다. 서로 포기한 총은 언제든지 누구나 다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상대방이 맺은 약속을 언제 어길지 모른다. 이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 믿을만한 누군가에게 우리가 포기한 총의 관리까지 맡겨야 한다. 홉스가 보기에 그 믿을만한 누군가가 바로 <사회, 국가>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상호신뢰에 의한 신의계약은 쌍방계약자 중 어느 쪽에서든 불이행에 대한 공포가 있는 경우에는 무효이기 때문에, 그러한 공포의 원인이 제거되기 전까지는 실제로 불의가 존재할 수 없다. 즉 그러한 공포가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신의계약을 맺어놓고 이행하지 않더라도 불의가 되지 않는다. 그러한 공포의 원인은 인간이 전쟁이라는 자연상태에 있는 한 제거될 수 없다. 그러므로 정의와 불의의 개념이 존재하기에 앞서, 먼저 어떤 강제적 힘이 존재해야 한다. 이 강제력이 하는 일은 신의계약을 이행하지 않았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도 더 큰 처벌의 공포를 통하여 신의계약 당사자 쌍방이 각각의 채무를 이행하도록 평등하게 강제하고, 그들이 보편적 권리를 포기한 대가로 상호계약에 의한 소유권을 확보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공통의 권력은 외적의 침임과 상호 간의 권리침해를 방지하고, 또한 스스로의 노동과 대지의 열매로 일용할 양식을 마련하여 쾌적한 생활을 보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 권력을 확립하는 유일한 길은 모든 사람의 의지를 다수결에 의해 하나의 의지로 결집하는 것, 즉 그들이 지닌 모든 권력과 힘을 한 사람(one man) 혹은 하나의 합의체(one assembly)에 양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들 모두의 인격을 지니는 한 사람 혹은 합의체를 임명하여 그가 공공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어떤 행위를 하든, 혹은 백성에게 어떤 행위를 하든 각자가 그 모든 행위의 본인이 되고, 또한 본인임을 인정함으로써, 개개인의 의지를 그의 의지에 종속시키고, 개개인의 다양한 판단들을 의 단 하나의 판단에 위임하는 것이다. (...) 이리하여 저 위대한 리바이어던이 탄생한다. 아니 좀 더 경건하게 말하자면 '영원불멸의 하느님'의 가호 아래, 인간에게 평화와 방위를 보장하는 '자싱의 신(mortal god)'이 탄생하는 것이다.
- 토마스 홉스 지음, 진석용 옮김, 『리바이어던』, 나남, 2008.
자연권이란 내 신체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였다. 그러나 이런 권리를 마구 사용하면 결국 서로를 죽이는 결과만 낳으니,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 그것은 무한한 자유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사회를 만든다는 것은, 나의 자연권을 무제한적으로 사용하기를 포기하는 것이고, 대신 자연권을 국가에 양도하는 것이다. 국가는 사람들의 자연권을 양도받아 무제한에 가까운 권력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 권력을 가지고 사람들이 맺은 약속을 지키도록 위협하고, 약속을 어기는 이가 나타나면 국가는 가차 없이 그를 처벌한다.
국가 덕분에 보장받고 서로 믿을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누군가 맺은 약속을 어긴다면 국가가 무제한적 권력을 사용해 약속을 어긴 이를 처벌해 줄 것이기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한한 자유를 포기한 대가로 제한된 자유를 누린다. 자유란 국가가 법으로 금지하지 않는 영역에서 허가되는 행동을 말한다.
만일 자유라는 말을 본래의 뜻대로 해석하면, 그것은 육체적 자유, 즉 사슬이나 감옥으로부터의 자유가 된다. 그러나 그 자유는 이미 우리가 누리고 있기 때문에, 이미 누리고 있는 자유를 달라고 외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다. 또한 만일 자유라는 말을 법의 면제로 이해한다면, 이 역시 불합리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런 자유를 요구하는 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자유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 사람 혹은 다수의 수중에 칼이 없으면 법은 사람을 보호할 힘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서 그저 법의 시행만을 요구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불합리하다. 그러므로 백성의 자유는 주권자가 그들의 행위를 규제하면서 불문에 부친 일들에 대해여만 존재한다. 예를 들면, 매매의 자우, 혹은 상호 간의 계약의 자유, 주거와 식사와 생업의 선택, 자녀를 자신의 뜻에 따라 교육하는 것, 기타 이와 유사한 일들에 대해서만 자유가 있다.
- 토마스 홉스 지음, 진석용 옮김, 『리바이어던』, 나남, 2008.
이렇듯 사회-국가가 만들어지면 그것이 자유를 제한하지만 그 대가로 인간은 생명을 보존할 수 있으며 국가나 법이 금지하지 않는 부분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러니 무한한 자유를 누리고 싶다는 것은 헛된 망상이다. 무한한 자유는 여러분에게 무엇이든 하도록 허락하지만 그 대가로 여러분의 생존 자체를 위협한다. 여러분이 남을 믿고 어느 정도 자유롭게 게살 수 있는 것은 모두 학교나 회사, 국가 같은 사회-공동체가 권력을 가지고, 개인이 무한한 자유를 행사하는 일탈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속한 사회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한다고 해서, 너무 불만을 가지고 미워하지는 말도록 하자.
그렇다고 홉스의 국가에게 너무 고마워하기엔 이르다. 홉스는『리바이어던』에서 국가에 너무나 과한 권한을 부여하기 때문에, 그의 국가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 홉스의 책 제목이 리바이어던인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리바이어던은 『성경』에 나오는 바다괴물이다.
네가 낚시로 리위야단(리바이어던)을 낚을 수 있으며, 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느냐? 그 코를 줄로 꿸 수 있으며, 갈고리로 그 턱을 꿸 수 있느냐? 그것이 네게 살려 달라고 애원할 것 같으냐? 그것이 네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빌 것 같으냐? 그것이 너와 언약을 맺기라도 하여 영원히 네 종이 되겠다고 약속이라도 할 것 같으냐? 네가 그것을 새처럼 길들여서 데리고 놀 수 있겠으며, 또 그것을 끈으로 매어서 여종들의 노리개로 삼을 수 있겠느냐? 어부들이 그것을 가지고 흥정하고, 그것을 토막 내어 상인들에게 팔 수 있겠느냐? 네가 창으로 그것의 가죽을 꿰뚫을 수 있으며 작살로 그 머리를 찌를 수 있겠느냐? 손으로 한 번 만져만 보아도, 그것과 싸울 생각은 못할 것이다. 리위야단을 보는 사람은, 쳐다보기만 해도 기가 꺾이고, 땅에 고꾸라진다.
- 대한성서공회, 『새 번역 성경전서』, 욥기 제41장
리바이어던은 인간의 힘으로 죽이기는커녕 맞서 맞서 싸울 수도 없는 무시무시한 괴물이다. 홉스는 인간이 계약으로 만들어낸 국가를 바다 괴물에 비유하며 국가가 개인이 결코 저항할 수도, 맞서 싸울 수도 없는, 거의 무한한 권력을 보유해야지 사람들의 생존을 보장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국가가 아무런 권력도 없다면, 사람들을 위협할 수도, 처벌할 수도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사람들은 계약을 지키지 않고 무한한 자유를 다시 누리려고 시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홉스는 한 명의 군주는 정치에 필요한 조언을 얻기도 쉬우며, 결단의 일관성이 잘 유지되고, 다른 정치체제보다 부패의 가능성도 낮다는 등의 이유를 근거로 이상적인 정치적 형태는 한 명의 군주에게 무제한의 권력을 부여하는 전제군주제라고 보았다.
국가가 탄생하면 국가의 구성원(백성)들은 한 명의 군주(주권자)가 다스리는 국가에 저항할 수 없다. 왜냐면 국가를 만들 때 자연권을 국가(절대 군주)에게 생명권을 제외한 전부를 '양도'한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강력한 권력을 가지는 이유는 각 개인이 가지는 모든 권리를 국가가 양도받아 보유하고 있기에 가능하다. 그리고 정당하게 양도받은 그 권리를 국가가 대신 행사하는 것이니 국가의 행위는 곧 각 개인의 행위와 다를 바 없다. 국가는 여러분의 생명을 지켜주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리고 국가를 만든 이유는 생명을 보존하기 위함이기에 국가가 여러분의 생명을 해치는 행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 홉스의 생각대로 국가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애쓴다면 문제가 없지만, 현실의 국가는 자국민을 학살하거나, 생명권을 침해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국가에 무제한적인 권력을 부여하는 것은 위험해 보인다. 국가가 우리의 생명을 보호해 주기 위해 자유를 제한하는 것 자체는 납득할 수 있지만, 너무 과한 권력을 부여해 자유를 심하게 침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각 개인에게 무한한 자유가 보장되는 자연상태도 위험하지만, 한 명에게 모든 권력이 부여되어 자유가 억압되는 사회상태도 위험하다.
고유한 문자가 없어 정치인에게 수탈당하는 백성을 가엾게 여겨 문자를 만들 정도의 능력과 자비심을 가진 왕은 전 세계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찾기 힘들다. 그만큼 세종대왕은 우리 역사에 큰 위인이다. 이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세종대왕이 환생해서 돌아온다면 대한민국이 전제군주제가 되어도 괜찮을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세종대왕 같은 현명한 왕이 군주가 되어 '국가'를 다스린다면 어떨까? 아주 이상적인 국가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가?
성급하게 네!라고 대답하지 말라. 왕이라는 제도가 가지는 한계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왕이 아무리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해도 왕 역시 한 명의 인간일 뿐이다. 그도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감정으로 판단을 그르칠 수 있으며, 왕이라는 무한한 권력에 사로잡혀 그릇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또 자신의 왕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나라에 굴복하여 식민 국가가 되기를 선택할 수도 있다. 거기다 왕은 자신의 아들이나 친인척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왕위를 물려받은 왕자가 선대 왕처럼 훌륭하고 현명한 왕이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여러분이 역사시간에 한국사나 세계사를 배웠다면, 어떤 국가에서든 왕은 필연적으로 후세대로 갈수록 무능해지고 그 영향으로 주변에는 간신배, 탐관오리가 넘쳐나며, 사사롭고 폭력적이게 나라를 다스리다가 국가 자체를 멸망시키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훌륭한 왕도 늙어 어리석어지기 마련이며, 폭군은 젊을 때조차도 어리석다. 그런 왕 아래서 여러분에게는 자유가 없을 뿐 아니라 생명조차 위태롭다.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주권을 지닌 대표자가 백성들에게 행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불의나 권리침해가 되지는 않는다. 백성 각자가 주권자의 모든 행위의 본인이기 때문이다. 주권자의 권리에 제한이 있다면, 주권자 자신도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자연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것뿐이다. 따라서 코먼웰스(국가)에서는 백성이 주권자의 명령에 의해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고,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 어느 쪽도 상대에 대하여 불의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 토마스 홉스 지음, 진석용 옮김, 『리바이어던』, 나남, 2008.
홉스는 절대 군주제를 옹호했지만, 홉스의 뒤를 이어 사회는 사람들 간의 계약으로 만들어졌다는 '사회계약론'을 주장한 로크(John Locke)는 절대 군주제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로크에 따라면 자연상태는 전쟁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비교적 평화로운 상태다. 로크도 자연상태에서 누구나 자연권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자신의 자연권을 침해하는 사람에 대한 처벌의 권리도 있다. 이로 인해 누구나 타인에 의해서 자기 자신의 자연권이 침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면 그 사건의 재판관이 된다. 자신의 자연권이 침해당한다면 그 사건을 재판하는 것도 처벌의 권리를 가진 자기 자신이다. 문제는 자신의 사건에 대해서 사람들은 공평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내 권리가 침해당했는데, 어떻게 공정한 판결을 내리겠는가? 공정한 재판을 하지 못한다면, 다툼의 여지가 발생하고 자연상태가 전쟁상태로 변모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따라서 로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정한 판결을 내려줄 공통의 재판관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홉스는 모두를 위협할 공통의 권력이 필요했다면, 로크는 모두를 공정하게 판결해 줄 공통의 재판관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런 이유로 로크가 보기에 우리가 사회를 만드는 이유는 자연권을 잘 보장받기 위해서다. 로크가 말하는 자연권은 구체적으로 생명(lives)뿐만 아니라 자유(liberities)와 자산(estates)에 대한 권리다. 로크는 이 셋을 합쳐 재산(property)이라 부른다. (따라서 로크가 말하는 재산이란 단순히 여러분의 물질적 자산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의 역할은 개인의 생명뿐만 아니라 자유와 자산을 보호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절대적 권력을 보유한 군주가 그런 것을 잘 수행할 수 있을까?
절대군주 역시 일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상기 키시고 싶다. 만약 인간이 스스로의 사건에서 재판관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나오는 그러한 해악에 대한 치유책이 정부이고 따라서 자연상태가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면, 한 사람이 다수를 좌지우지하고 그 자신이 관련된 사건에서 재판관이 될 수 있고, 그의 기분이 내키는 대로 무슨 일이나 그의 신민들에게 할 수 있으며, 그렇게 집행하는 것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이를 의문시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유마저 가지지 못한 곳에는 대체 어떠한 종류의 정부가 존재하고, 과연 그것이 자연상 태보다 얼마나 더 나은 상태인지 묻고 싶다.... 차라리 사람들이 타인의 부당한 의지에 복종하지 않아도 무방한 자연상태에 있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부 사람들에 의해서 세계의 유일한 지배형태로 간주되는 절대군주제가 실로 시민사회와 양립 불가능하며, 따라서 결코 시민적 지배형태가 될 수 없다는 점은 명백하다. 자연상태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사건에 관해 재판관이 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폐단이 발생하는데, 시민사회의 목적은 그러한 폐단을 피하고 치유하는 데 있다. 이 목적은 그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각자 침해를 받거나 분쟁이 일어나면 호소할 수 있는 권위를 확립하고 , 사회의 구성원은 모두 그 권위에 복종함으로써 달성된다. 어떤 사람들이든 그들 사이에 발생하는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호소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지 못한 자들은 어디에 있든지 여전히 자연상태에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모든 절대군주는 그의 지배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자연상태에 놓여 있다. 절대군주는 혼자서 입법권과 집행권을 모두 가지고 있다. 따라서 군주가 저지른 또는 그의 명령에 의해서 발생한 침해나 폐에 대해서는 재판관, 곧 권위를 가지고 공평한 결정을 내리며 그 결정에 따른 구제와 보상을 기대할 수 있는 재판관이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이를 호소할 수 있는 길이 어느 누구에게도 열려 있지 않다.
- 로크 지음, 강정인 옮김, 『통치론』, 까치, 2022.
로크는 홉스처럼 국가를 전적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사회계약을 통해 정부를 구성하며, 법을 만드는 입법부에 권력의 일부를 신탁(信託)하자고 제시했다. 이는 홉스처럼 자연권을 전면적으로 국가에게 양도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 맡기는 방법이다. 만약 국가가 생명, 자유, 자산을 제대로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입법부에 맡겼던 권리를 회수할 수 있다.
입법권은 일정한 목적을 위해서만 활동할 수 있는 단지 신탁된 권력이므로 입법부가 그들에게 맡겨진 신탁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이 발견될 때 입법부를 폐지하거나 변경할 수 있는 최고의 권력은 여전히 인민에게 있다. 모든 권력은 일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신탁으로 부여되는 것으로서 그러한 목적에 따라 제한되기 때문에, 권력이 그 목적을 명백히 소홀히 하거나 위반하면 신탁은 필연적으로 철회되며 그 권력은 그것을 내준 자들의 손으로 되돌아간다.
- 로크 지음, 강정인 옮김, 『통치론』, 까치, 2022.
자연권의 일부를 신탁받은 입법부는 법을 만들고, 그 법은 우리의 재산을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만약 입법부가 우리의 재산을 지켜주는 법을 만들지 않고, 오히려 우리 재산을 빼앗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로크는 그때 입법부에 저항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고 설명한다. 그것이 바로 <인민 저항권>이다. 홉스는 국가에 저항을 할 수 없다고 본 것과 다르게 로크는 저항을 할 수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인간이 사회에 들어가는 이유는 그들의 재산을 보존하는 데 있다. 인민이 입법부를 선출하고 권위를 부여하는 목적은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가진 재산의 보호수단이자 울타리로써 법과 규칙을 제정하는 것이다. 법과 규칙은 사회의 각 구성원이 행사하는 권력을 제한하고 지배력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다. (……) 입법자들이 인민의 재산을 빼앗거나 파괴하고자 기도할 경우 또는 인민을 자의적 권력 아래 놓인 노예로 만들고자 할 경우, 그들은 인민과 전쟁상태에 돌입하는 것이며, 인민은 그로 인해서 더 이상의 복종의무로부터 면제되고 급기야 무력과 폭력에 대비하여 신이 모든 인간을 위해서 마련해 놓은 공통의 피신처로 대피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므로 입법부가 야심, 공포, 어리석음 또는 부패를 통해 인민의 생명, 자유, 자산에 대한 절대적인 권력을 자신들의 수중에 장악하거나 아니면 그 밖의 다른 자들의 수중에 넘겨줌으로써 사회의 기본 규칙을 침해하게 되면 그들은 인민이 그것과는 상반된[재산 보존을] 목적으로 그들의 수중에 맡긴 권력을 신탁 위반으로 상실하게 된다.
- 로크 지음, 강정인 옮김, 『통치론』, 까치, 2022.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대통령을 왕처럼 생각한다. 사람들은 리더십 있고 능력 있는 대통령만 잘 뽑고, 국회의원만 잘 뽑아두면 정치가 알아서 잘 굴러갈 것이라 생각한다. 여전히 왕 같은 정치인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왕을 바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일종의 귀찮음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복잡한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것보다는 등이 따뜻하고 배가 부른 안락한 삶을 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위대한 통치자가 등장해, 국가를 이끌어주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는 환상이다. 기독교에서 메시아(구원자)가 인류를 구원해 줄 것이라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자유는 종교가 아니다. 간절히 바란다고 자연스레 이루어지지도 않고 메시아가 등장해 자유를 주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런 바람이 자유를 억압하는 정치권력, 예를 들어 독일의 나치와 히틀러를 불렀다. 카리스마 있고 리더십 있는 한 명이 나라 전체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기대는 손쉽게 무너지고 세상을 부자유롭게 만들며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심지어 그런 국가는 자국민에게도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국가는 언제나 돌변할 수 있는 위험한 존재다. 히틀러의 나치 같은 극단적인 전체주의 정부가 들어서지 않더라도, 국가가 여러분을 향해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애초에 국가가 약자들의 편이었던 적이 있던가? 항상 국가는 기득권을 위해 약자들을 핍박했지 않던가?
1928년 12월 6일 콜롬비아에서 바나나 농장의 농부들은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한 달간 파업했다. 파업이 길어지자 미국 관리와 다국적 기업들이 콜롬비아 정부를 상대로 파업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했고, 콜롬비아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서 농부들을 학살했다. 정부는 죽은 사람의 숫자가 50명 정도라고 발표했지만, 자유주의 언론은 약 2000~3000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어느 쪽이건 간에, 국가가 자국민을 상대로, 학살을 자행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때 국가는 가난한 농부가 아니라, 돈이 많은 자본가들의 편을 들었다. (심지어 자국민도 아닌, 강대국의 기업을 위해서!)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다. 경작은 도중에 중단되었고, 바나나는 나무에서 썩어 떨어졌고, 차량 120량이 연결된 기차들은 지선에서 멈춰 있었다. 마을들에는 할 일이 없이 노는 노무자들이 넘쳐났다. (… …) 중위가 귀가 멍멍할 정도의 항의성 야유가 난무하는 가운데 포고령을 읽고 났을 때, 대위 하나가 역사 지붕에서 중위와 교대를 하더니 확성기를 받아들고 할 얘기가 있다는 시늉을 했다. 군중은 다시 조용해졌다.
"신사 숙녀 여러분 5분 안에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대윈느 피로가 약간 배어 나오는 낮은 목소리로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한층 더 커진 야유와 고함소리는 해산 제한 시간 5분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를 파묻어 버렸다.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자 5분이 다 지났습니다. 1분이 더 경과하면 발포하겠습니다" 대위는 아까와 똑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는 식은땀을 흘리며 어때에서 아이를 내려 여자에게 되돌려 주었다.
"이 개자식들 정말 쏘겠어"
(… …)
"바닥으로 엎드려! 바닥으로 엎드려!"
앞줄에 있던 사람들은 기관총탄에 일소되어 이미 땅에 엎드려 있었다. 그러나 살아난 사람들은 땅바닥에 엎드리는 대신 작은 광장으로 달아나려 했는데, 그때 공포에 휩싸인 군중이 흡사 용이 쳐 대는 꼬리질을 피하듯 총알을 피해 빽빽한 파도처럼 한쪽으로 몰려가다가 반대편 길에서 용이 쳐 대는 꼬리질을 피하듯 빽빽한 파도처럼 이쪽으로 밀려오고 있던 군중과 맞부디 쳤는데, 그쪽에서도 역시 기관총들이 쉬지 않고 발사되고 있었다.
(… …)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어둠 속에서 하늘을 보고 누워 있었다. 그는 자신이 끝없이 길고 고요한 기차에 실려 가고 있으며 , 피가 말라붙어 머리카락이 떡이 되어 있고, 온 뼈마디가 쑤시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졸음이 밀려왔다. 공포와 전율에서 벗어났으니, 여러 시간 동안 잠을 자야겠다고 마음먹고는 덜 아픈 쪽으로 몸을 돌렸는데, 그때 비로소 자신이 시체들 위에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차간에는 가운데 통로 외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시체들의 체온이 한결같이 가을철의 석고상처럼 차가웠고, 입 주위에 있는 거품이 한결같이 말라붙어 있었으며, 기차에 시체들을 쌓아 올린 사람들이 바나나 송이를 운반할 때와 같은 순서 방향으로 차곡차곡 쌓아 올릴 정도의 시간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학살이 벌어진 지 꽤 여러 시간이 흘렀음에 틀림없었다.
(… …)
"3000명은 되었을 겁니다" 그가 중얼거렸다.
"뭐가요?"
"죽은 사람들 말이에요. 역 앞에 모였던 사람은 다 죽었을 겁니다" 그가 확실하다는 투로 말했다.
- 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백년의 고독』, 민음사, 2000.
이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국가의 배신행위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국가가 우리가 생각한 것과 다른 역할을 맡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모두가 평등하게 자신의 자연권을 맡겨서 국가를 만들었는 사회계약론자의 생각, 즉 국가가 우리의 생명, 자유, 재산을 평등하게 지켜준다는 믿음은 환상일 수도 있다. 오히려 국가는 강자들의 편이며, 약자를 수탈하는 기구다.
루소(Jean-Jacques Rousseau)는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부자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최초의 사회를 만들었다고 본다. 루소도 홉스와 다르고 로크와 유사하게 자연상태란 자유롭고 평화로운 상태라고 본다. 그런데 자연상태는 점점 문명이 발달하면서, 재산이 탄생하고 화폐가 탄생하면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나뉘게 되고, 갈등이 발생하며 서로 뺏고 뺏기는 전쟁 상태로 변한다. 이때 전쟁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적극적으로 사회를 만들려고 시도하는 자들은 부자다. 왜냐하면 가난한 이들은 빼앗길 것이나 잃을 것이 없지만, 부자는 많기 때문이다.
특히 부자들은 자기들만이 일체의 비용을 부담해 온 끊임없는 전쟁이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손해를 끼쳤는가를 곧 깨달았을 것이다. 그 전쟁에서 생명의 위험은 누구에게나 공통된 것이었지만, 재산의 위험은 개인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 횡령에 어떤 외양을 부여하든 그것은 단지 불확실하고 부당한 권리를 내세우고 있는 데 불과하며 또 그 횡령은 오직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것을 다시 힘에 의해 빼앗긴다 해도 아무 할 말이 없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 "약자를 억압에서 보호하고 야심가를 제지하며 각자에게 소유를 보장해 주기 위해 단결합시다. 정의와 평화를 가져다주는 규칙을 정합시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지켜야 하며, 어느 쪽도 차별하지 않고 강자와 약자를 평등하게 서로의 의무에 따르게 하는, 말하자면 운명의 변덕을 보상하려는 규칙입니다." (...) 사회와 법률의 기원은 이러하거나 이러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 사회와 법률은 약자에게는 새로운 구속을 부여하고 부자에게는 새로운 힘을 부여해 자연적 자유를 영원히 파괴해 버리는가 하면, 소유와 불평등의 법률을 영구히 고정시키고 교활한 횡령을 당연한 권리로 확립시켜 그 후 온 인류를 몇몇 야심가들의 이익을 위해 노동과 예속과 비참에 복종시킨 것이다.
- 루소 지음, 주경복 고봉만 옮김, 『인간 불평등 기원론』, 책세상. 2018.
독일의 철학자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도 국가를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마르크스가 생각하는 국가는 부르주아의 편을 들어 노동자들을 잘 착취하도록 돕는 부르주아의 집행 위원회다. 국가 권력은 군대라는 물리적 강압 수단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 힘은 외부의 적을 막기도 하지만 동시에 국가 내부의 대중, 노동자들을 억압하는 데 사용된다.
현대의 국가 권력은 부르주아 계급 전체의 공동 업무를 처리하는 하나의 위원회일 뿐이다. (...) 부르주아지는 인격적 가치를 교환 가치로 용해시켜 버렸으며, 문서로 보장된 혹은 정당하게 얻어진 수많은 자유들을 단 하나의 파렴치한 상업적 자유로 바꾸어 놓았다. (...) 본래 의미에서의 정치권력이란 다른 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한 계급의 조직된 폭력이다. 만일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필연적으로 계급으로 단결되고 혁명을 통해 스스로를 지배 계급으로 만들고, 또 지배 계급으로서 낡은 생산관계들을 폭력적으로 폐기하게 된다면, 그들은 이 생산관계들과 아울러 계급 대립의 존립 조건들과 계급 일반을 폐기하게 될 것이고, 또 이를 통해 계급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지배도 폐기하게 될 것이다. 계급과 계급 대립이 있었던 낡은 부르주아 사회 대신에 각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하나의 연합체가 나타난다.
- 칼 마크르크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최인호 외 번역, 『마크르스 엥겔스 저작선집 1』, 「공산주의 선언」, 박종철 출판사
국가는 부르주아(자본가)의 편을 들며 노동자들을 착취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는 자유를 누릴 수 없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자유란 창조적 노동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가들의 편에 선 국가는 그런 자유를 실현할 수 없게 만든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려면 고전적 자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자유>와 <시장>을 알아야 한다.
자본주의는 분업을 강조한다. 분업이란 물건을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해 각자 역할을 나누어 노동하는 것이다. 아담 스미스(Adam Smith)는 『국부론』에서 분업을 무척 강조한다. 그는 핀 공장을 예시로 들어, 노동자가 혼자서 핀(못, nail)을 만든다면 혼자서는 하루에 20개도 채 못 만들지만, 분업을 할 경우, 핀을 만들기 위해 여러 노동자가 모여서, 한 노동자는 철사를 꺼내고, 다음 노동자가 철사를 세우고, 그다음 노동자가 철사를 자르고, 그다음 노동자가 철사를 갈아내는 식으로 일을 한다면 하루에 몇천 개도 만들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분업을 하면 국가의 부유함이 늘어나게 된다. 효율적인 노동이 국가의 부를 증대하는 것이다. 또한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연스럽게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가격을 조정한다. 쉽게 말해 물건이 많이 팔리면, 그만큼 공급이 늘어나 가격이 떨어지고 반대로 물건이 많이 팔리면 가격이 떨어지니 공급자가 줄어들며 다시 가격이 오르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적절한 물건의 가격이 형성되며 시장이 최고로 효율적이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고전적 자본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자유>란 다른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정부가 개입하지 않고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자유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러한 자본주의적인 시장과 분업이 인간을 소외시킨다고 보았다. 소외라는 것은 인간이 자기의 본질을 상실하여 비인간적 상태에 놓이는 것이며, 무언가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아를 실현한다. 노동이란 '자신의 창조적 능력을 구현하는 것을 통해 자신을 고양시키고 성숙시키는 활동이다. (박찬국 지음, 『현대 철학의 거장들』, 이학사, 2012.)'
그런데 자본주의는 분업을 통해 노동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기는커녕 여러분을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물건을 만드는 노동의 일부만 수행하는 기계로 만든다. 인간의 노동은 자아실현의 수단이 아니라 오로지 생존을 위한 상품으로써 자본가들에게 판매된다. 매일매일 살기 위해 자신의 노동을 판매하는 인간은 노동으로부터 소외되고, 노동 생산물로부터 소외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고, 인류의 창조적인 능력으로부터 소외된다. 매일매일 먹고살기 위해 공장과 집만 왕복하며 살아가는 삶에 어떤 자유가 있겠는가? 자본주의 체제에서 국가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을 돕는 역할을 할 뿐 노동자를 보호하지 않는다. 소외당하는 노동자에게 시장에서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꽃다지의 노래 <기계따라 돌아가네>는 소외된 노동자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자동기계를 따라
때리면 돌아가는 팽이처럼
정신없이 돌아가는 이 내 몸은
어쩌면 기계가 아닐까
돗대도 나눠 피던 우리네 정도
이제는 기계 따라 돌아만가네
자동화에 성과급제에 멈출 수도 없어
돌아가누나
지친 몸을 끌고서 소주 한 잔 걸치고
집으로 돌아가다 생각하니
어쩌면 나는 가족에게
돈 버는 기계가 아닐까
마르크스는 이런 자본가들을 위한 국가는 노동자 혁명이 일어난 후 사회주의를 거쳐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하면 자연스럽게 소멸할 것이며, 국가의 자리는 <각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자개연)>로 대체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 사회에서 여러분은 분업 같이 하나의 일에만 숙달된 전문가가 될 필요 없다. 대신 싱그러운 아마추어가 되어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실현할 수 있다. 이때야 비로소 여러분에게 창조적 노동으로서 자아를 실현하는 자유가 되돌아온다.
반면에 아무도 하나의 배타적인 활동의 영역을 갖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그가 원하는 분야에서 자신을 도야할 수 있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사회가 전반적 생산을 규제하게 되고, 바로 이를 통하여, 내가 하고 싶은 그대로 오늘은 이 일 내일은 저 일을 하는 것,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치며 저녁 식사 후에는 비판하면서도 사냥꾼으로도 어부로도 목동으로도 비 판사로도 되지 않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
- 칼 마크르크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최인호 외 번역, 『마크르스 엥겔스 저작선집 1』, 「독일 이데올로기」, 박종철 출판사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Пётр Кропоткин)도 자본주의적 착취에 비판적이다. 크로포트킨은 동물 세계에서는 오히려 협동과 서로 돕는 행위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국가가 긍정적으로 보고 방치하는 '공격성'이나 '경쟁'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상태라는 점을 지적하고, 인류가 스스로 삶을 책임지고 자연의 이치에 따라 협동적인 방식으로 살아갈 때 그런 것들이 소멸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공동체들 간 느슨한 연합을 통해 생존 수단 교환 촉진에 필요한 시스템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사실, 경제적 노예상태가 존재하는 한 자유에 대해서 논할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지금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내게 자유를 말하지 말라, 가난한 사람들이 여전히 노예로 남아 있는 한!" 이와 같은 시인의 말은 이미 노동대중의 생각과 우리 시대의 모든 문학에 침투해 있습니다. 이 말은 가난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까지도 굴복시키고 있으며, 타인에 대한 착취를 권리라고 주장하던 과거의 모든 확신을 무력화시키고 있습니다.
- 표트르 크로포트킨 지음, 백용식 옮김, 『아나키즘』, 충북대학교 출판부, 2009
국가는 우리의 적일 수도 있다. 점점 더 많은 권력이 적의 손에 들어갈수록 개인의 자유는 사라진다. 국가가 지켜주는 자유는 기껏해야. 아늑한 우리 안에서 사육당하는 양의 자유와 다를 바 없을지 모른다. 사실 사회와 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싫어한다. 왜냐하면 개인의 자유가 많아질수록 통제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학교가 감옥 같은 구조를 가지게 된 이유도 다른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언제 어디에서든 '감시의 그늘' 아래에 있어야 통제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러한 건물 구조를 파놉티콘이라 부른다.
여러분, 만일 다수의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을 모두 파악할 수 있는,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끌 수 있도록 그들을 에워쌀 수 있는, 그들의 행동과 인적 관계, 생활환경 전체를 확인하고 그 어느 것도 우리의 감시에서 벗어나거나 의도에 어긋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이것은 국가가 여러 주요 목적에 사용할 수 있는 정말 유용하고 효력 있는 도구임에 틀림없다. (……) 여러분에게 제안하는 감옥은 원형 건물이다. 어쩌면 이것은 한 건물 안에 다른 하나를 넣은 두 채의 건물이라고 말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감옥 둘레에는 둥근 모양의 6층짜리 바깥 건물이 있다. 이곳에 죄수들의 수용실이 배치된다. 수용실 내부는 두껍지 않은 쇠창살로 되어 있어 한눈에 [안을] 볼 수 있으며, 수용실은 문이 안쪽으로 열린다. 각 층에는 좁은 복도가 있으며, 이 복도는 하나로 통해 있다. 각 수용실의 문은 이 복도로 나 있다. 중앙에는 탑이 하나 있다. 그곳에 감독관들이 머문다. 이 탑은 3층으로 나뉘어 있다. 각 층은 수감자 수용실들을 2층씩 내려다보도록 구성되어 있다. 또한 감시탑은 바깥을 환히 내다볼 수 있는 발로 가려진 복도로 둘러싸여 있다. 이 장치로 인해 감독관들은 수감자들에게 잘 보이지 않으면서 수용실 전체를 구석구석 감시할 수 있다.
- 제러미 벤담 지음, 신건수 옮김, 『파놉티콘』, 책세상, 2007.
불행한 점은 우리 사회 자체가 점점 파놉티콘화(化)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딜 가나 감시를 받고 있다. CCTV를 생각해 보라. 누군가는 CCTV가 있어서 안심된다고 이야기할지 모른다. 실제로 CCTV는 범죄를 예방해 준다. 하지만 그만큼 CCTV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들도 감시하고 있다. 그리고 국가는 (자의적으로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순간) CCTV를 손에 넣어 여러분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볼 권력을 가지고 있다. 기술이 발달하며 국가의 감시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휴대전화는 편리한 발명품이지만 한편으로는 언제 어디서나 감시할 수 있는 보급된 감옥이기도 하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여러분의 자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제러미 벤담이 제시한 감옥 '파놉티콘'의 강점은 '끊임없이 감독관의 감시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은 나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과 그러한 것을 하고 싶어 하는 생각 대부분을 사실상 없애 버린다'는 것이다. 파놉티콘화 된 현대 사회도 여러분에게 끊임없이 사회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는 순한 양 같은 인간이 되기를 은밀히 강제한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이러한 권력을 '규율 권력'이라고 불렀다. 이 권력은 단순히 사람들의 행동을 감시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무엇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를 각인시키고 판정해 사람들이 정상성에 목매도록 만들며, 사람들을 일정하게 원하는 대로 만들어낸다. 이제 국가는 여러분의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통제하려 든다. 사회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파놉티콘이 되고, 여러분은 언제 어디서나 감시당하는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내적으로 검열하고 사회가 바라는 순종적인 인간이 된다.
국가로부터 우리의 정신과 신체, 모든 것을 통제당하고 싶지 않다면, 국가의 역할에 확실한 선을 그어야 한다. 국가는 언제 우리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가? 영국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자유론』에서 '최고 권력자가 힘을 행사하는 것에 제한을 가하는 것을 자유(liberty)라고 일컬었다'라고 설명한다. 과거에는 군주 같은 한 명의 권력자가 권력을 남용하여 횡포를 부렸기에 그의 권력을 제한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민주주의 정치가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정치인들이 국민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일꾼이나 대리인이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나 바꿀 수 있는 존재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자 새로운 횡포가 등장했다. 바로 '다수의 횡포(tyranny of the majority)'다. 민주주의에서는 다수결에 의한 횡포가 빈번하게 일어나며, 다수는 정치영역뿐만 아니라 사상, 토론 등의 영역에서도 다수결의 횡포를 부린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개성을 가지고 살아가지 못하도록 막고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이 행동할 것을 강요하는 것은 물론이며, 앞서 민주주의가 나치를 탄생시켰다고 언급했듯이 민주주의도 자유를 제한하고 폭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크다. 다수의 횡포는 사회의 개별성(individuality)을 발전하지 못하게 만들며, 각 개인을 다수의 삶의 방식, 표준에 일치하도록 만든다.
(이미 1인 군주는 거의 사라졌다는 전제 하에) 밀은 새롭게 등장한 권력의 횡포인 다수의 횡포를 막기 위해 국가, 정부가 타인의 자유에 간섭할 수 있는 선을 명확하게 제시하고자 했다. 그 선은 '타인에게 위해를 끼치지 않는 선'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다른 사람에게 해(harm)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행위에 한해서만 사회가 간섭할 수 있으며 그 외의 당사자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개인이 절대적인 자유를 누려야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유의 기본 영역으로 다음의 세 가지를 가진다. 첫째, 내면적 의식의 영역에서 양심의 자유나 생각과 강정의 자유 그리고 절대적인 의견과 주장의 자유가 있다. 둘째, 자신의 기호를 즐기고 자기가 희망하는 것을 추구할 자유가 있다. 셋째, 결사의 자유가 있다. 이 세 가지 자유를 존중하는 사회가 자유로운 사회이며, 이런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가 제한되는 경우는 오로지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뿐이다. 밀에게 자유란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거나 자유를 얻기 위한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각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자유'다.
밀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해 주며, 개별성이 보장되는 사회가 바람직하며 개인도 행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감옥 같은 학교에서는 개별성을 키울 수 없다. 그런 학교는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남들과 '똑같이'할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학교가 바라는 것은 여러분이 지금 사회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체제에 순종하고, 시키는 대로 따르는 온순한 양이지, 비판적인 늑대가 아니다. 학교는 여러분의 적일 수 있다.
한국에서 담장이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을 꼽자면 두 가지가 있다. 학교와 교도소다. 둘 다 담을 넘으면 큰일 난다. 필자의 학창 시절 어느 학교는 학생들의 월담을 막기 위해서 담장에 전깃줄을 설치하기도 했다. 학교와 교도소 둘 다 운동장 하나에 4~5층짜리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창문 크기를 빼고는 공간 구성상의 차이를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나라 학교 건축은 교도소 혹은 연병장과 막사의 구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공간에서 12년 동안 생활한 아이들은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전국 어디서나 똑같은 크기와 모양의 교실로 구성된 대형 교사에서 12년 동안 키워지는 아이들을 보면 닭장 안에 갇혀 지내는 양계장 닭이 떠오른다. 남들과 똑같은 교복을 입고 똑같은 교실에서 자라난 사람은 똑같은 아파트에 사는 것을 편하게 생각할 것이다. 학교의 전체주의적인 성향은 최근 들어 더 심화되었다. 필자가 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교복 자율화 시대였다. 지금의 아이들은 중학교 때부터 똑같은 교복을 입고 다닌다. 과거에는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니면서 다른 친구 도시락 반찬도 함께 먹으면서 우리 엄마가 얼마나 요리를 못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식판에 똑같은 밥을 배급받아먹는다. 우리나라에서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식판에 똑같은 밥을 배급받아먹는 곳은 교도소와 군대와 학교밖에 없다. 학교는 점점 교도소와 비슷해져 가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군대는 2년이면 제대하지만 학교는 12년을 다녀야 한다. 공간적으로나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는 12년 동안 아이들을 수감 상태에 두고 있다고 봐야 한다. 우리는 어쩌면 고등학교 졸업생에게 꽃다발을 주기보다는 두부를 먹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 유현준 지음, 『어디서 살 것인가』, 을유문화사. 2018.
그러나 한편으로, 학교나 국가 같은 공동체가 없다면 우리의 삶이 지탱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마르크스나 크로포트킨처럼 국가가 사라진 사회를 바랄 수도 있지만, 그것은 너무나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미래 같아 보인다. 현실적으로 개인의 일탈을 통제할 막강한 권력을 지닌 국가 같은 공동체가 없다면 혼란만 가득하지 않을까? 학교는 우리의 적이 아니라 친구일지도 모른다. 만약 학교에서 교칙을 강조하지 않고, 교복도 없고, 선생님들이 여러분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도록 방치한다고 생각해 보라. 면학 분위기란 것도 없고, 학교는 혼란의 도가니가 될 것이다.
홉스나 로크의 국가, 자본주의 국가, 사회주의, 마르크스의 자개연, 무정부 사회.. 이 모든 <사회>는 여러분의 자유를 지켜줄 수도 있고, 여러분의 자유를 억압할 수도 있다. 현실의 사회는 친구도 적도 아닌 상태에서, 양자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타기를 하고 있다. 여러분이 조금이라도 자신의 자유에 무관심해지는 순간, 정치에서 시선을 거두는 그 순간, 사회는 줄타기를 그만두고 여러분의 자유를 억압하려 든다. 반면에 여러분이 계속 자유와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자유를 가지고 권력을 견제하려는 태도를 보여주면, 사회는 여러분의 적으로 돌아서지 않거나, 돌아서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자유를 누리고 싶다면 그만한 부담을 질 줄 알아야 한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여러분은 학생자치회를 운영하고, 끊임없이 교칙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부당한 것에는 저항하며 여러분의 자유의 영역을 지켜야 한다. 학교는 수능을 잘 보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어른이 되기를 준비하는 공간이고, 세상을 배우는 공간이어야 한다. 고등학생 때 자유가 없었다면 성인이 되어서도 자유는 없다. 책상에 앉아 3년의 시간을 버티고 학교를 졸업한다고 자유가 주민등록증과 함께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니 버티는 것은 정답이 아니다. 남이 자유를 줄 것이라 기대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노예로 전락한다. 자유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각하고, 자유의 범위를 고민하고, 양보하고 양보받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여러분의 개인적 자유는 공간의 감시(건축)와 시간의 감시(학교 행정)로 인해 사라진다. 이러한 '파놉티콘'의 원리는 학교뿐 아니라 군대, 감옥, 공장 등에도 적용된다. 학교 종은 사이렌이, 출석 호명은 출근카드 찍기나 점호가, 교실은 감방이, 성적은 등급이나 인사고과가, 반성문이나 부모님 호출은 기합이나 독방수감이, 퇴학은 해고가, 학생회나 선도부는 재판소가, 학생 주임은 작업반장이나 간수가 대신한다.
사람들은 좋은 학생, 좋은 군인, 좋은 시민, 좋은 노동자를 원한다. 그런 때 자유는 아무 소용이 없다. 우선 완전한 자유가 주는 다양한 가능성을 틀어쥐고 사회적 규칙이라는 바늘구멍을 통과하도록 사람들을 강제해야 한다. 그 속에 숨겨놓은 목표는 제한 없는 자유가 내포하고 있는 엄청난 혼란을 막는 것이다.
개인적인 자유를 가장 많이 포기한, 가장 고분고분한 사람들에게 사회는 많은 보상을 해준다. 좋은 직장, 책임 있는 지위, 높은 계급, 넉넉한 봉급 등, 성공한 사람의 본보기로 만들어준다. 학위, 경력, 일, 수입 등, 사회는 자유를 억누르려는 계획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선물을 퍼준다.
반면에 자유가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감시망이 펼쳐진다. 이런 감시 체계는 가정과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직장 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마을, 도시, 나라 등 도처에 존재하며, 머지않아 전세계로 확대될 것이다.
사이렌이 울려도 모이지 않고 딴청부리는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자유를 택한 대가로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이며 미래에 대한 전망도 불투명하다.
이처럼 소수의 저항세력이 될 것인가, 아니면 사회에 적극 협력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선택은 여러분의 몫이다.
- 미셸 옹프레 지음, 이희정 옮김, 『원숭이는 왜 철학교사가 될 수 없을까』모티브북, 2005.
[과제]
- 국가는 개인의 적인가? 자신의 생각을 A4 한 장 분량으로 서술하시오
- 여러분이 바라는 학교는 어떤 학교인가? 그 학교의 건축 구조, 규칙, 자유의 범위 등에 대해 서술하시오
[참고문헌]
- 앨런 라이언 지음, 남경태 이광일 옮김, 『정치사상사』, 문학동내, 2017.
- 토마스 홉스 지음, 진석용 옮김, 『리바이어던』, 나남, 2008.
- 대한성서공회, 『새 번역 성경전서』
- 로크 지음, 강정인 옮김, 『통치론』, 까치, 2022.
- 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백년의 고독』, 민음사, 2000.
- 루소 지음, 주경복 고봉만 옮김, 『인간 불평등 기원론』, 책세상. 2018.
- 칼 마크르크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최인호 외 번역, 『마크르스 엥겔스 저작선집 1』, 박종철 출판사
- 표트르 크로포트킨 지음, 백용식 옮김, 『아나키즘』, 충북대학교 출판부, 2009
- 제러미 벤담 지음, 신건수 옮김, 『파놉티콘』, 책세상, 2007.
- 유현준 지음, 『어디서 살 것인가』, 을유문화사. 2018.
- 박찬국 지음, 『현대 철학의 거장들』, 이학사,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