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
어떤 사람에게 ”이런 짐승 같은 놈!“이란 말을 듣는다면 기분이 어떨 것 같은가? 십중팔구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이런 욕설을 사용하거나 들어서 기분이 나빴다면 여러분은 짐승(동물)을 인간보다 못한 존재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동물이 우리보다 뛰어나다면, 그런 욕은 없었을 테니까!
그런데 우리는 어떤 점에서 그들과 다를까? 이번 수업에선 자연 안에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특징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장자』라는 책을 보면 ‘조삼모사’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저공이라는 사람이 원숭이에게 도토리를 주는데, 아침에는 3개, 저녁에는 4개를 주겠다고 말하자 원숭이가 화를 냈다. 그래서 순서를 바꿔 아침에는 4개, 저녁에는 3개를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기뻐하였다. 아침과 저녁에 몇 개를 받던 간에 원숭이가 받을 도토리는 7개로 똑같다.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도 원숭이는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공에게 화를 내고 또 기뻐했다. 이런 이유로 조삼모사는 어리석은 사람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고사성어로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우리는 인간과 동물을 구분할 때 그들이 인간에 비해 어리석다는 점에 초점을 두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이성이 있지만, 그들은 이성이 없다.
이성이란 생각하고 헤아리는 능력을 의미한다.인간이 동물과 다르다고 주장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인간의 특징은 '이성'이다. 국립국어원 표국어대사전에서도 이성이란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을 감각적 능력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시켜 주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다.” 라고 해설하고 있다. 물론 동물도 생각하고 헤아리기는 한다. 하지만 동물들이 생각하고 헤아리는 것은 인간에 비해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인간은 아침에 도토리 3개를 받고 저녁에 4개를 받는 경우와 그 반대의 경우, 결과는 똑같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인간은 미래를 위해 스스로 자신의 욕망을 조절할 줄 알지만 동물들은 그 욕망을 조절하지 못한다. 먹을 것이 눈 앞에 있는데 참는 배고픈 개나 고양이를 본 적 있는가? 참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이 의도적으로 훈련을 시켰기 때문이지 자발적인 사고 능력 덕택은 아니다. 보통 동물은 배고프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싸고 싶으면 싼다. 훈련으로 이것을 통제할 수 있다 한들 그것이 자발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그들은 스스로 생각해서 자신의 동물적인 욕망을 절제하는 것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이 세상 모든 것에는 '목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에는 인간, 동물, 무생물 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수행하는 활동도 포함될 수 있다. 여러분이 학교 시험 공부라는 활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당연히 좋은 성적이라는 목적을 위해서다. 그렇다면 좋은 성적은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다. 또한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은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함일 것이고, 좋은 직장을 얻는 이유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다.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이유는? 배고프지 않고 사고 싶은 것을 다 사고 싶으니까!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대학 등록금을 내기 위해서거나, 사고 싶은 물건을 사기 위해서일 것이고, 대학 등록금이나 사고 싶은 물건도 또 다른 목적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모든 기예와 탐구, 또 마찬가지로 모든 행위와 선택은 어떤 좋음을 목표로 하는 것 같다. (……) 그런데 행위, 기예, 학문들에는 여러 종류가 있기에 그 목적들 또한 많게 되는 것이다. 의술의 목적은 건강, 조선술의 목적은 배, 병법의 목적은 승리, 가정경제학의 목적은 부(富)이니까. 그런데 이러한 것들 중에서 모두 하나의 능력 아래에 있는 것들은, 가령 말굴레 제작술과 마구(馬具)의 제작에 관계되는 다른 모든 기술은 마술(馬術. 말을 부리는 기술) 아래에 놓이며, 마술 자체와 전쟁에서의 모든 행위들은 병법 아래에 놓이게 되고, 같은 방식으로 다른 기예들도 또 다른 것들 아래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이 모든 경우들에 있어서 총기획적인 것의 목적이 그것 아래에 놓이는 다른 모든 목적들보다 더 선택할 만한 것이다. 전자를 위해 후자가 추구되는 것이니까.
-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김재홍 외 옮김, 『니코마코스 윤리학』, 도서출판 길, 2016.
이 세상 모든 것에는 목적이 있다. 목적들은 하위의 목적과, 그것을 포함하는 상위의 목적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피라미드가 상단에 있는 하나의 꼭짓점으로 모이는 것처럼 하위의 목적들은 상위로, 그리고 하나의 단일한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 이를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그는 이러한 세계관에 기초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세계관이란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말한다.)
식물은 동물을 위해 존재한다. …… 그리고 동물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길들인 동물은 식량만이 아니라, 인간이 이용해 먹을 수 있는 다른 용도를 위해서도 존재한다. 야생동물도 모두는 아닐지라도 대부분은 식량을 위해 그리고 다른 여러 방식으로 이용될 수 있다. 즉 옷과 도구들이 이것들로부터 만들어진다. 만약 그래서 자연은 계획하고 있는 목적 없이는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다는, 즉 전혀 헛되게는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다는 우리의 믿음이 옳다면, 자연은 특별히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만들어 냈음에 틀림없다.
- Aristotle, 『Works of Arisotle』, Richard Mckeon(편), 데자르뎅 지음, 김명식 김완구 옮김 『환경윤리』, 연암서가, 208.p 에서 재인용
목적론적 세계관 안에서 인간도 어떤 목적을 위해 살아가고 있으니까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이 존재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이 ‘행복’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우리가 삶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는 결국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던가? “왜 행복하고 싶어?”라는 말에 그 이상의 목적을 대답할 수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냥 행복한게 좋으니까” 라고 대답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렇게 대답한다면 행복이야말로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가장 좋은 것, 즉 최고선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행복을 언제나 그 자체 때문에 선택하지, 결코 다른 것 때문에 선택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인간의 궁극적 목적인 행복이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면 인간의 기능(ergon)을 알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왜냐하면 어떤 대상의 기능을 알아야, 그 대상의 목적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칼의 목적은 무엇인가? 잘라야 할 대상을 잘 자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숫돌을 가지고 칼을 날카롭게 갈아주어한다. 말의 기능은 달리는 것이고 잘 달리기 위해서는 발굽에 편자를 달아주고 훈련을 시켜야 할 것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나 활동에는 각자의 고유한 기능이 있고, 그 기능을 잘 발휘하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그 자신의 고유한 기능을 안다면, 인간이 추구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만의 고유한 기능을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눈이나 손, 발 그리고 일반적으로 각각의 부분들이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듯이 그렇게 인간에게도 이 모든 기능들 외에 어떤 기능이 있다고 상정해야 할까? 그렇다면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 산다는 것은 심지어 식물에게까지 공통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는 인간에게 고유한 것을 찾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영양을 섭취하고 성장하는 삶은 갈라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감각을 동반하는 삶이 뒤따를 것이지만 이것 또한 분명 말과 소, 모든 동물들에 공통되는 삶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게 되는 것은 이성(logos)을 가진 것의 실천적 삶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김재홍 외 옮김, 『니코마코스 윤리학』, 도서출판 길, 2016.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고, 행복이란 이성을 잘 발휘할 때 달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성이 없는 식물이나 동물은 그런 인간의 목적에 이바지하는 대상이다. 그러니 각 존재는 나름대로 소중한 가치가 있겠지만, 결국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점에서 인간이 더 우위에 있다. 약 2500년 전부터 철학적으로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구분되고, 더 우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나타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제 1권에서 인간의 행복은 이성이라는 고유의 기능을 잘 발휘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설명한 후 나머지 책 전체에서 행복하기 이성을 잘 발휘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이 내용은 상당히 길고 복잡하기 때문에 차후 다른 주제에서 기회가 되면 알아보도록 하자.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이성(Logos)에서 발생한다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본성상 정치적인 동물”이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그가 보기에 인간만이 정치적 동물인 것은 아니다. 벌도 군집을 이루어 살아가는 정치적 동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인간이 벌이나 다른 군집 동물보다 완전한 의미에서 정치적 동물이다. 인간과 다른 군집동물간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언어 능력(말, Logos)이다.
왜 인간이 벌이나 그 어떤 군집 동물보다 더 완전한 의미에서 폴리스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동물인가 하는 이유가 또한 분명하다. 우리가 말하는 바와 같이, 자연은 결코 아무런 헛된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물 중에서 인간만이 말(Logos)을 가진다. 목소리는 고통과 즐거움의 징표인데, 이런 까닭에 다른 동물에도 속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본성은 고통과 즐거움의 감정을 가지며, 또한 그것들을 서로 간에 징표하는 데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말은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을 분명하게 하는데에, 따라서 또한 정의로운 것과 정의롭지 않은 것을 분명하게 하는 데에 기여한다. 왜냐하면 다른 동물에 비교해서 인간만이 좋은 것과 나쁜 것, 정의로운 것과 정의롭지 않은 것, 그리고 다른 나머지 것들과 지각을 가진다는 이 점은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에서의 공동체가 가정과 폴리스(국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김재홍 옮김, 『정치학』, 도서출판 길, 2017. 34-35
앞서 인간만이 지닌 고유의 기능을 논증할때 이성이라고 답했는데, 그 이성이 그리스어로는 Logos였다. 그리고 지금 『정치학』에서 다룬 말(언어 능력)도 Logos다. 결국 우리를 인간으로서 다른 동물과 구분해 주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Logos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일관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러니 여러분은 최대한 여러분의 이성을 잘 발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며 다른 사람과 말로 소통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으로 살고 싶고, 행복하고 싶다면 말이다.
그런데 정말로 이 세상 모든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일까. 가끔 이 세상에는 우연적인 일도 있는 것 같다. 나비효과란 말도 있지 않는가. 나비의 의도치 않은 날개짓이 태풍을 발생시킨다. 나비가 태풍을 일으키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기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이처럼 자연은 어떤 목적의 체계로 구성되었다고 하기 보다는, 우연적인 원인과 결과의 연쇄의 고리일지도 모른다. 17세기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데카르트에 따르면 이 세상에 실체(實體)란 단 하나 뿐이라고 말한다. 실체란 존재하기 위해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른 수많은 것들에 의존해야 한다. 물, 공기, 부모님 등등..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존재할 수있는 것은 이 세상을 창조한 신 밖에 없다. 그래서 신을 무한한 실체라고 부른다. 반면에 신이 창조한 이 세상에는 신을 제외하고 다른 것의 도움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실체가 두 가지 있는데, 그것은 사유와 연장이다. 사유라는 것은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연장은 공간을 차지하는 것을 말한다. 사유와 연장은 각각 정신과 물체라고 할 수 있고, 이 두가지는 신에게 의존해야지 존재할 수 있지만 다른 것에는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한한 실체라고 부른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세계를 분석한 후에 동물들은 정신(이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앵무새 같은 동물은 말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은 단순히 인간의 말을 따라하는 것일 뿐이다. 녹음기는 인간의 말을 거의 완벽하게 따라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녹음기에게 정신이 있다거나 생각하는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앵무새는 마치 녹음기 같은 기계와 같다. 동물들은 우리 인간보다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더 잘 달린다거나,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냄새를 맡거나 소리를 듣는 능력은 우리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하다. 하지만 그게 기계의 작동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여러분은 시계가 여러분보다 시간을 정확하게 측정한다고, 시계가 인간보다 우월하고 가치있는 존재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이성이나 정신을 지니고 있다고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동물은 신이 창조한 두 가지 실체 중 물질적 실체의 측면만을 지닌다. 그래서 동물들은 자동 인형과 같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육체도 물체이기 때문에 동물과 다를 바 없는 기계라고 본다. 여러분은 심장, 위, 폐, 간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다. 심장을 천천히 뛰게 하거나 빠르게 뛰게 하는 것은 기계적인 요인이지, 인간의 정신이 간섭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물체의 측면에서 이 세계는 오로지 원인과 결과에 따라 기계적으로 작동할 뿐이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세계관을 <기계론적 세계관>이라고부른다. 그렇다면 인간이나 동물이나 기계라는 점에서 양자는 똑같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데카르트가 보기에 이 세계 속에서 인간은 동물과 구분되는 중대한 차이점이 있는데, 바로 인간에게는 정신(이성, 영혼)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정신은 여러분의 뇌 안에 있는 솔방울샘(송과선)이라는 기관을 통해 여러분의 신체에 영향을 미쳐 운동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인간은 정신을 지니기에, 그 법칙의 운동 방향을 바꾸고, 원인과 결과를 뒤바꿀 수 있는 능력도 있다. 연필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에 저항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떨어지는 연필을 받아서, 그 연필을 다시 공중으로 던질 수 있다. 오직 인간만이 운동의 방향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능력이 있기에 인간은 동물과 구분되고 그들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까치와 앵무새가 우리처럼 말을 할 수는 있지만, 우리처럼, 즉 말하는 바를 사유하고 있음을 증시(증명하여 내보이는 것)하면서 말을 할 수 없는 데 반해, 청각장애인과 언어장애인으로 태어나서, 다른 이들에게 말하는 데 쓰이는 기관들이 짐승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결여된 인간들은 평소 함께 지내면서 자신의 말을 배울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이해시킬 어떤 기호들을 스스로 고안해내곤 한다는 것을 사람들을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짐승이 인간보다 이성을 덜 가지고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성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시한다. 왜냐하면 말할 줄 알기 위해서는 이성이 아주 조금밖에 필요하지 않음을 사람들은 보기 때문이다 (… …) 그들 행동들 가운데 몇몇에서는 우리보다 더 많은 재간을 보여주는 여러 동물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물들이 다른 많은 것들에서는 그런 것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이 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동물들이 우리보다 더 잘한다는 것은, 그것들이 정신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 동물들은 우리 누구보다 더 정신을 많이 가지고 있을 것이고, 모든 점에서 더 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오히려 그 동물이 정신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 안에서 그들 기관들의 배열에 따라 작동하는 것이 바로 그 자연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는 톱니바퀴와 태엽만으로 합성된 시계가 우리가 모든 지혜를 동원해서 하는 것보다 더 정확하게 시간들을 계산하고 시간을 측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 르네 데카르트 지음, 이현복 옮김, 『방법서설』, 문예출판사. 2022. 84~86.p
아리스토텔레스와 데카르트는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지만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이성’이라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이렇게 이성을 차이점으로 두며, 인간이 동물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입장을 인간중심주의라고 부른다. 이 입장은 우리 인간은 다른 동물들보다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 뛰어나기 때문에, 인간이 동물(혹은 식물까지도)을 이용하고 잡아먹는 것에는 아무런 도덕적 문제는 없다고 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모든 존재는 목적이 있고, 식물과 동물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혹은 데카르트에 따르면 그들은 기계다. 어느 쪽이 옳다고 여기던 여러분이 인간중심주의 입장에 주장에 동의한다면 동물을 필요에 따라 사용하거나, 죽이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다.
그런데 이성 능력으로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인간중심주의가 지니는 중대한 문제가 있다. 우리가 인간이라 부르는 존재 중에서는 이성 능력이 없는 인간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정신적 장애가 있는 사람이나, 아주 어린 아이나, 치매에 걸린 노인 등을 생각해보라. 이들은 다른 이들에 비해 이성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이들은 이성도 없고 도덕성도 없으니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다. 그러니 돼지나 소처럼 이들을 동물 실험에 사용하거나 잡아 먹는 것은 어떤가? 아마도 여러분은 화들짝 놀라며 내 말에 반박할 것이다. “당연히 안돼죠. 그들도 인간이에요!”
그렇다! 그들도 분명히 인간이다. 나도 이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니 선생님을 사이코패스가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는 좀 거두어달라. 하지만 생각해 보자. 이제까지 말했던 이성의 유무를 가지고 인간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이들을 인간이라 부를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어린아이는 시간이 흘러 이성을 가지게 될 잠재성이 있으니까 인간이라 할 수 있다 해도, 정신적 장애가 있는 사람이나 치매에 걸린 노인들은 대부분 이성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만약 이들을 신약을 개발하는 실험에서 피실험자로 사용하거나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고기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성 능력을 기준으로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별하며 인간이 더 소중하고 우월하다는 주장하는 것을 포기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우리는 모두 같은 종족이라는, 즉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는 종(種)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
현대 철학자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바로 이 점을 비판한다. 21세기 사람들은 성차별주의나 인종차별주의가 나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성차별주의는 단지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는 것이고 인종차별주의는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차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차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가? 다른 정당한 이유 없이 그저 인간이 아니고 쥐나 돼지라는 이유로 동물을 실험에 사용하고, 잡아먹는 것은 종차별주의이며 잘못 아닐까? 여기서 다시 이성이나 도덕성을 꺼내 들면 안 된다. 그러면 인간도 동물 실험에 사용해도 된다는 말도 함께 인정해야 될 테니까.
싱어는 이성 능력이나 도덕성, 혹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족을 기준으로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지으며 그들을 차별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본다. 대신 인간 사이는 물론 동물과 인간 사이에는 새로운 도덕적 기준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인 ‘쾌고감수능력’이다. 인간과 동물의 공통점에 집중해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쾌락과 고통을 느낀다는 점에서 평등하다. 그리고 쾌락은 많을 수록 좋은 것이고 고통은 적을 수록 좋은 것이다. 그러니까 쾌락과 고통이라는 기준을 놓고 생각한다면, 인간 사이 뿐만 아니라 동물도 평등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기준은 인간과 동물을 차별하기 보다는 평등하게 고려할 것을 요구한다.
만약 한 존재가 고통을 느낀다면 그와 같은 고통을 고려의 대상으로 삼길 거부하는 자세를 옹호할 수 있는 도덕적 논증은 없다. 한 존재의 본성이 어떠하든, 평등의 원리는 그 존재의 고통을 다른 존재의 동일한 고통과 동일하게 취급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쾌고 감수 능력은 다른 존재의 이익에 관심을 가지는지 여부를 판가름하는 유일한 경계가 된다
- 피터 싱어, 김성한 옮김, 『동물해방』, (인간사랑, 2006)
피터 싱어의 주장은 ‘공리주의’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공리주의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공리주의자들은 쾌락은 좋은 것이고, 고통은 나쁜 것이라 본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 행위란 모든 사람들 한명 한명이 느끼는 쾌락과 고통을 평등하게 놓고 다 합하여 최대한 많은 쾌락을 산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싱어 역시 공리주의자이기에 쾌락을 늘리고 고통을 줄여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는 동물도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인간과 동물의 쾌락과 고통을 평등하게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이익 평등 고려의 원칙이라 하는데, 이 원칙은 양자의 이익을 평등하게 고려하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과 동물을 똑같이 대우할 수는 없다. 인간과 동물은 필요한 것도, 원하는 것도 다르다.
내가 한번 묻겠다. 사람은 습한 곳에서 자면 요통으로 반신불수가 되지만, 미꾸라지도 그렇던가? 사람은 나무 위에서 살면 두려워 현기증이 나지만, 원숭이도 그렇던가? 이 셋 중에서 누가 바른 거처를 안 것인가? 사람은 소나 돼지를 잡아먹고, 사슴은 풀을 먹고, 지네는 작은 뱀을 달게 먹고, 올빼미와 갈가마귀는 쥐를 즐겨 먹는다. 이 넷 중에서 누가 바른 맛을 아는 것인가? 원숭이와 개코원숭이가 짝을 맺고, 고라니는 사슴과 교미하고,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어울린다. 모장과 여희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미인이지만, 물고기가 보면 깊이 숨고, 새가 보면 높이 날아가고, 사슴이 보면 힘껏 달아난다. 이 넷 중에서 누가 천하의 바른 미색을 안 것인가?
- 장자
싱어의 주장은 양자를 똑같게 대우(treatment)하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작은 이익을 위해 동물의 큰 이익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작은 이익에 해당하는 새로운 샴푸나 화장품을 개발하기 위해 동물 실험을 하거나, 즐거운 식사를 위해 동물들을 공장식으로 길러서 도축하는 행위는 중단되어야 한다.
아주 먼 옛날부터 비교적 최근까지도 노예 제도는 당연하게 여겨졌다. 미국에서 노예 제도가 폐지된 것이 1865년의 일이다. 또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선거권이 부여된 것은 1928년의 일이며, 이조차도 영국의 이야기고, 우리나라의 경우 1948년이다. 2025년을 기준으로 삼아도 아직 100년이 안된 것이다. 인간과 동물 이라는 차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비합리적인 차별도 이토록 길고 오래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노예 제도를 철폐하였으며, 남성과 여성은 동등한 정치적 권리,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가진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노예 제도와 남녀차별이 비합리적인 편견이었듯이 동물에 대한 차별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편견일 수 있다. 동물도 인간과 평등한 도덕적 지위를 가지며 동물에게도 나름대로의 권리가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입장에 동의한다면 여러분은 ‘동물중심주의’ 입장과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동물중심주의자들은 인간이 도덕적 지위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일부 혹은 전체 동물들도 도덕적 지위를 지닐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들의 주장에 동의하는가? 아니면 거북함이 느껴지는가? 여전히 동물은 인간보다 못한 존재라고 생각하며, 인간이 도덕적으로 더 우월한 위치에 있고, 삼겹살 구이와 양념 치킨은 거부할 수 없는 인생의 필수적인 요소라 생각하는가? 동물을 잡아먹는 것은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단백질이 필요하다면 콩이나 다른 식품을 먹을 수도 있다. 또 불필요하게 많은 동물을 먹지 않고, 필요한 만큼만 적게 소비하는 방법도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여러분은 여차저차 이유로 대며 동물 실험도 해야하고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동물이 되어야 하는 상황에 부닥친다면 어떨까. 우리가 동물처럼 고기가 되고, 동물 실험에 사용되는 입장에 처해지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위해 논의의 주제를 조금 바꿔보자.
챗GPT를 사용해 학교 과제를 수행해본 적 있는가? 이제 여러분은 챗GPT 없이는 과제를 수행하지 못하는 것 같다. 어떤 학생은 수행 평가 과제의 처음부터 끝까지 챗 GPT의 답변을 그대로 따라 적어 제출하기도 한다. 그 학생은 자신이 직접 과제를 하는 것보다 챗 GPT가 작성한 과제가 더 질이 높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여러분들이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이나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이른바 ‘생성형 인공지능’은 어렵지 않게 대답하고 해결해준다. 그렇다면 챗GPT를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과제 점수도 잘 받고, 좋은 일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인공지능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 과연 맞을까. 혹은 그 반대는 아닐까. 적어도 지금 우리가 이용하는 생성형 인공지능은 질문을 입력해야지만 답을 해주니까 우리가 그들을 이용하는 것 같다. 사람이 백과사전을 찾아 보아야 백과사전이 답을 해주는 것처럼, 인공지능도 우리가 찾을때만 반응한다. 그러나 안심할 수 없다. 언젠가 머지않은 미래에는 여러분이 질문하지도 않아도 인공지능이 ‘스스로’ 생각하는 날이 올지 모른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고, 헤아릴 수 있는 이성 능력을 지닌 인공지능이 등장한다면 어떨까? 그들도 인간처럼 이성을 지니고 있다고 인정해야할까? 이성이 있다면, 정신이나 영혼도 지닌 것일테니까 그 인공지능을 인간이라 불러야 할까? 거기다 그 인공지능이 인간보다도 훨씬 뛰어난 이성을 보유했다면? 그런 인공지능이 보기에는 우리 인간이 지닌 이성이 보잘 것 없이 느껴질 것이다. 마치 우리가 원숭이를 보고 비웃듯, 인공지능이 우리를 보고 비웃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이렇게 인간을 넘어선 존재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이런 존재들을 포스트휴먼(Post-human)이라고 부를 수 있다. 포스트 휴먼이란 무엇인지 살펴보자.
포스트휴먼이란 그 기본적인 능력이 근본적으로 현재의 인간을 넘어서기 때문에 현재의 기준으로는 더 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스웨덴 출신의 철학자이며 현재 옥스퍼드대학교 인류미래 연구소 소장인 보스트롬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인간의 주요 능력 중 최소한 하나 이상의 능력에서 현재의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대한의 한계를 엄청나게 넘어 설 경우, 이를 포스트 휴먼으로 부르자고 제안한다.
● 건강수명: 정신적·물리적으로 온전하고 건강하게, 능동적이며 생산적인 상태로 남아 있는 능력
● 인지: 기억, 추론, 주의력 같은 일반 지능의 능력 및 음악, 유머, 에로티시즘, 서사, 영성, 수학 등을 이해하는 특수 능력
● 감정: 삶을 즐기고, 생활 속의 상황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적절한 정서로 반응하는 능력
- 신상규 지음, 『호모 사피엔스의 미래』, 아카넷, 2014.
물론 인공지능만이 포스트휴먼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분이 자손의 유전자를 조작하여 초인적인 능력을 가지도록 만든다거나, 뇌를 스캔해서 정신을 컴퓨터에 업로드 한다거나, 신체의 일부를 꾸준히 기계로 대체해서 사이보그(cyborg)가 되는 경우에도 포스트휴먼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분은 인간을 개조하는 것에 긍정적인가 아니면 부정적인가? 예를 들어 우리를 개조하여 기계 부품을 신체에 삽입하고, 유전자 조작으로 정신적, 신체적 능력을 강화하고, 수명을 늘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은가? 아니면 그런 기술이 발달해도 지금의 삶을 고집할 것인가? 만약 인간을 개조하는데 긍정적이라면 여러분은 ‘트랜스 휴머니스트’다.
트랜스 휴머니즘은 포스트휴먼으로의 변화를 긍정하고 지지하는 운동을 의미히나느 용어다. 말하자면 포스트휴먼으로의 변화가 바람직하거나 혹은 그렇게 변해야 한다는 권유나 당위의 규범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일종의 평가적인 함축을 가지고 있다.
- 신상규 지음, 『호모 사피엔스의 미래』, 아카넷, 2014.
사람들 중에 이미 신체 안에 기계를 삽입한 사람도 있다. 여러분은 아직 젊으니까 그럴 필요가 없겠지만 다치거나 나이가 많은 노인들은 ‘인공관절’ 수술을 받는다. 그렇다면 이것은 신체에 ‘인공적인 물질’을 삽입한 것이다. 이들은 아직 인간을 초월하지 않았으니 ‘포스트휴먼’이라 부르기엔 미흡하지만 ‘트랜스휴먼’이라고 부를 수 있다.
‘트랜스휴먼’은 현재 인간과 포스트휴먼 사이의 중간 형태를 가리키는 ‘과도기의 인간’을 나타내는 말로, 그 스스로 트랜스휴머니스트이기도 한 FM-2030이 사용한 표현이다. 그는 트랜스휴먼이 “새로운 진화적 존재의 초기 형태”라고 주장하면서, 트랜스휴먼성의 징후로 보철(프로스테시스), 성형수술, 원격통신기술의 광범위환 활용, 세계를 돌아다니며 유목적인 삶의 형태와 세계시민주의적인 생각, 시험관 아기와 같은 재생산 방식의 변화, 종교적 믿음의 결여, 전통적인 가족 가치의 거부 등을 들고 있다.
- 신상규 지음, 『호모 사피엔스의 미래』, 아카넷, 2014.
여러분도 알다시피 인간은 오랫동안 진화해왔다. 자연적인 진화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을 아주 오랜시간동안 점진적으로 변화시켰다. 하지만 오늘날 과학 기술은 자연의 진화 법칙을 넘어서서 호모 사피엔스를 빠른 속도로 진화시켜 전혀 다른 존재로 탄생시킬지도 모른다. 단적으로 유전자를 조작하여 체구가 우리보다 월등히 크고, 지능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인간이 탄생한다면, 그는 분명 이전까지의 호모 사피엔스와 구분되는 새로운 종일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Harari)는 호모 사피엔스 종의 역사를 다룬 『사피엔스』의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은 우려를 표한다.
하지만 미래 기술의 진정한 잠재력은 호모 사피엔스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단순히 수송 수단과 무기만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과 욕망까지 말이다. 영원히 젊은 사이보그에 비하면 우주선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 사이보그가 번식도 하지 않고, 성별도 없으며, 다른 존재들과 생각을 직접 공유할 수 있다면 더욱 그렇다. 집중하고 기억하는 능력은 인간의 수천 배에 이르며, 화를 내거나 슬퍼하지 않는 대신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감정과 욕망을 가지고 있다면 말할 것도 없다. 과학 소설이 이런 미래를 그리는 경우는 드문데, 왜냐하면 정의상 정확한 묘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해불능인 것이다. 어떤 슈퍼사이보그의 삶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네안데르탈인 관객을 위해 연극 <햄릿>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아마도 우리와 미래의 주인공들의 차이는 우리와 네안데르탈인의 차이보다 더욱 클 것이다. 적어도 우리와 네안데르탈인은 같은 인간이지만, 우리의 후계자들은 신 비슷한 존재일 것이다.
-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호모 사피엔스』, 감영사, 2023.
아직 도래하지 않은 그들을 우리는 ‘포스트휴먼’이라 부르지만,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 진정한 인간들이 우리를 원숭이나 다른 동물처럼 취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어떨까?
“너희들에게는 ‘우리 인간’ 만큼의 이성이 없다. 따라서 너희는 우리가 사용하는 ‘자원’이 될 수 있다”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이제껏 인간은 돼지 고기를 마음 껏 먹고, 소를 농사에 부리고, 실험실에서 수많은 토끼와 쥐를 동원했다. 백신 개발을 위해 투구게의 피를 뽑아서 의료용 시약의 원료로 사용하는 것이 당연했듯이, 포스트휴먼들이 우리 인간을 자원으로 사용하는 것도 당연한 일일까? 우리가 이성을 가지고 있고 존엄한 인간이라고 항의해도 그들이 보기에 우리 모습은 원숭이가 성내는 것처럼 보일것이다. 이들이 인간에서 발전한 존재라면 과거의 인류에 대한 동정심으로 우리를 살려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이 인간의 진화와 별개로 등장한 ‘인공지능’이라면 우리에게 동정심을 표하며 봐줄 것 같지 않다. 여러분도 ‘동물들에게 생명이 있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신경 안쓰고 동물을 잡아먹지 않는가?
무서운 상상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인공지능에게 학대 당하는 동물 같은 신세가 될 것이라는 공포를 전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거대한 변화의 문턱 앞에 있고, 그 변화에 따라 나타날 여러 가지 새로운 문제를 미리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에 집중했지만, 현대에 와서는 피터 싱어 같은학자들을 필두로 동물과 인간의 공통점에 근거해 그들을 어떻게 대우해야 할지 발전적인 논의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 미래에는, 우리와 포스트휴먼 사이의 관계를 고민해보아야 한다.그들이 등장하고 나서는 늦는다. 지금부터 인간의 위치를 다시 생각해보고 대비해야 한다. 챗 GPT가 과제를 대신 해준다고 좋아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인생에서 겪는 문제는 스스로 고민하고 해결해야 한다. 모든 것을 챗GPT에게 어쩌면 좋을지 물어볼 생각 하지 말라. 그런 생각이 드는 여러분은 이미 그들의 노예가 되고, 생각하는 능력과 인간다움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챗GPT를 이용해 모든 것을 물어보는 이유중 하나는 성급함 때문이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일을 처리하는 것은 오래걸리고, 번거롭고, 서투르다. 오래걸리고, 실수해야 한다는 사실, 완벽하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참지 못하고 불편함을 피하고 싶어한다. 인간을 개조해 포스트휴먼으로 만들고자 하는 이유도 서투른 인간의 불완전함을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느 청년이 밤에 손톱을 깎아서 마당에 버리자, 들쥐가 그 손톱을 먹고 청년으로 둔갑해 청년이 집을 비운 사이에 나타나 아들인 척 하며 살아간다. 집으로 돌아온 청년은 자신이 진짜 아들이라며 부모님과 가족에게 호소하지만, 가족이 보기에는 들쥐나 청년이나 똑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 누가 진짜 인간인지를 분간할 수 없다. 청년은 자신이 진짜임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도전을 하지만, 모두 둔갑한 들쥐가 이긴다. 심지어 들쥐는 집안의 접시, 숟가락과 젓가락의 갯수까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결국 청년은 쫒겨나고 들쥐가 아들 노릇을 한다.
이 이야기는 완벽함은 인간다움의 조건이 아니라는 점을 전하고 있다. 우리는 무언가를 너무나 잘 하는 사람에게 ‘비인간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실수하는 사람에게 ‘인간미가 있다'고 말하지 않던가. 아리스토텔레스나 데카르트 같은 철학자들은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뛰어난 점을 찾아 그것을 인간다움으로 삼았지만, 그 반대가 중요할 수도 있다. 인간은 다른 존재보다 뛰어나기에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실수하고, 서투르고, 부족하다는 점, 그리고 그걸 자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다움이 나온다. 답변을 잘 하는 챗GPT를 보아도, 거기서 한 줌의 인간다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내 옆자리의 친구가 준비물을 까먹고, 실수를 하는 모습을 볼 때 인간다움이 느껴진다. 서투름이야말로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준다. 아무리 뛰어난 인간이라 해도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우리는 결국 어느 분야에서든 서투를 수밖에 없다. 이 서투름이 우리를 협력하게 만들었고 인간의 특징이라 부르는 이성 능력을 발달시키고 사회와 문화를 만들도록 한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서투름이나 부족함을 미워할 필요 없다. 그 서투름이 당신을 인간으로 만들어 준다. 또한 다른 사람의 서투름도 너그러울 필요가 있다. 우리는 누구나 서투른 인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추구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에 목매지 않아야 한다. 학생들은 좋은 대학에 합격하기만 하면 행복해질 것이라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대학에 합격한 기쁨은 기껏해야 한두달 정도 지속된다. 그 후에는 다시 시험 공부, 취업 준비, 인간 관계 등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취업을 하면 고민이 해결될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취업한 후부터는 직장 내 스트레스, 돈 , 결혼 등 다양한 걱정이 또 따라 붙는다. 우리는 항상 어떤 목표를 달성하면 즉시 다음 목표를 세우고 고통스러워한다. 그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톨스토이는『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서 최대한 많은 땅을 차지하려고 자신의 생명을 불사르는지도 모르고 달려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바흠의 일꾼이 달려들어 주인을 부축하려 했다. 그러나 바흠의 입에서는 피가 쏟아졌다. 그는 마침내 숨을 거둔 것이었다. 바시키르인들은 안됐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일꾼이 괭이를 들어 바흠을 위해 구덩이를 팠다. 그 구덩이의 길이는 바흠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의 키와 같은 3아르신(약2미터)에 불과했다. 바흠은 거기에 묻혔다.
- 톨스토이 지음, 윤세한 엮음,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삼여출판사.
바흠이 차지하려던 땅은 세속적 성공, 돈, 명예 등을 상징하고, 자신의 생명이 꺼져가는지도 모르고 달려가는 바흠은 우리 인간 삶의 모습을 상징한다. 아무리 많은 땅을 차지해봐야, 죽으면 내 한몸 눕힐 정도의 땅만 필요하다. 사실 그 땅조차도 죽어버린 나에겐 아무 의미가 없다.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확실한 가능성이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생의 결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이 죽지 않을 것처럼 굴며, 만족할 줄 모르고 끊임없이 미래의 목표만 추구한다.
죽으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그러니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이다.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살아라(Carpe diem). 과정을 소중히 여기는 것 또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며, 여러분을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특징이다. 인공지능은 설정한 목표를 손쉽게 달성한다. 여기에는 과정의 소중함을 찾아볼 수 없다. 인공지능이 쓴 글은 그럴듯하지만, 거기서 끝이다. 어딘가 어색하고 겉만 번드르르하고 알맹이가 없다. 작가가 고민하며 단어 하나까지도 신중하게 선택해서 쓴 과정이 있는 글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인공지능은 10초 정도의 시간마 주면 그림 하나를 완성하지만, 그 그림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미술관에 가서 한 획 한 획 붓을 놀릴때마다 신중하게 고민한 화가의 과정이 느껴지는 그림을 볼 때 받는 감동과 비교할 수 없다. 미술관에 가서 작품 사진을 찍고 그것을 SNS에 업로드 하여 '좋아요'를 많이 받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미술관에 가서 직접 두 눈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그 순간을 사랑해야 한다. 이 사랑이 결여되었다면 1만개의 좋아요도 여러분의 삶에 아무런 가치를 더해주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에 최선을 다하고 결과와 상관없이 후련했던 경험을 생각해보라. 입시의 결과가 오랜 기간 행복하려면, 공부하는 과정이 행복했어야 한다. 만약 그 과정이 불행했으면, 입시의 기쁨도 금방 사라진다.
서투름에도 노력하고 그 과정 자체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소크라테스가 ‘살 가치가 없다’고 했던 것은 삶을 마치 무슨 해치워야 할 과정이기나 하듯이 여기는 사람들의 삶을 말한다. 부어넣거나 음미하며 마시거나 커피는 위장으로 내려가서는 성분에 따라서만 흡수되는 것같이, 스쳐지나듯 해치우듯 살아가거나 완상하고 음미하며 살아가거나 어차피 무덤 안에서 한 줌 흙이 되기는 마찬가지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흙으로 되기도 전에 벌써 흙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살아 있는 동안은 어쨌든 인간으로서 살아야 하고 인간으로서 살아 있는 동안은 ‘살 가치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경은 “너의 젋은 날을 기뻐하라”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더 나아가서 “살아 있는 모든 날을 기뻐하라”고 충고한다. 나는 커피를 마시듯 내 하루를 살아가려 한다. 깨어 있는 시간들 중에 어느 한순간도 목구멍 안으로 부어 넘기는 커피처럼 허망하게 넘겨버리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하지만 해야 하는 일, 만나야 할 사람들 틈에 부대끼다 보면 나도 더러는 그 완강한 일상의 덫에 걸려 허우적거리곤 한다. 그럴 때마다 소크라테스의 충고를 기억하려고 애쓴다. 나는 내게 주어진 삶의 시간을 그만한 양의 커피라고 생각한다. 이미 많이 마셔버렸지만 아직도 꽤 많은 양이 남아 있다고 믿고 싶다. 이제 와서 나는 덧없이 마셔버린, 때로 억울하게 엎질러버린 그 소중한 커피들을 아까워한다. 의미없고 가치없는 것들을 좇고, 허망한 환상에 매달리며 살았던 것이다. 나는 좀 덜 분석하고 덜 계산하고 덜 따지는 만큼 더 느끼고 더 받아들이고 더 열심히 맛보려 애써야 했다. 하지만 남은 커피만은 내 방식대로 마시겠다. 비록 작더라도 내 잔으로 마시겠다는 말이다
- 이왕주 지음, 『쾌락의 옹호』, 문학과 지성사, 2001.
서투른 삶, 완벽하지 않은 삶을 견디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인위적으로 탄생한 인간의 문명이다. 자본주의는 끊임 없는 경제 성장을 요구하고, 여러분에게 성공에 대한 욕망을 불어 넣는다. 전지구적인 자본주의 탓에 오늘 날 사람들은 발전을 당연하게 여긴다. 뉴스를 보면 항상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아하고, 경제를 발전시켜야하고, 국력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따위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도대체 얼마만큼 더 발전해야 할까. 이미 전 세계 인류가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기술력을 갖추었음에도 아직 부족한 것일까. 자신이 죽음에 이르는지도 모르고 땅을 더 많이 차지하려고 분주하던 바흠처럼, 인류 전체도 인류의 멸망으로 향해 나아가는지도 모르고 눈앞에 보이는 발전만 갈망하고 있는 것 같다. 멈출줄 모르는 인간에게는 멈춤의 지혜가 필요하다.
“짐승 같은놈! 이라는 욕은 디오게네스(Diogenes)에게는 칭찬이 될수도 있다. 고대 아테네에서 플라톤과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그는 이상적인 삶의 방식은 개와 같이 살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하여서 견유학파(犬儒學派, 퀴니코스 Cynici)라고 불린다. 그는 천 두 벌만 걸치고 살았고 집도 없이 술항아리 안에서 살았다. 그는 인간의 문명을 부정적으로 보고 자연에 따르는 삶을 살아갈 것을 강조했다. 자연은 인간들이 그토록 갈구하는 세속적 성공의 척도인 돈, 명예 같은 것들을 명령하지 않는다. 개라는 동물은 이런 자연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개는 본능에 충실하게 살아가며 필요 없는 것을 욕구하지 않는다. 대통령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권력자지만, 개가 보기엔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개는 권력자에게 아첨하지 않는다. 따라서 개는 인간이 겪는 세속적인 불행과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디오게네스는 개를 모범으로 삼아 살아가고자 한다고 보았다. 자연에 따르는 삶을 중시한 그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일화를 살펴보자.
한번은, 마케도니아의 왕인 알렉산드로스가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다.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다. 훌륭한 철학자를 스승으로 두었으니 알렉산드로스도 어느 정도 철학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디오게네스를 찾아와 물었다.
"혹시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이 지금 햇빛을 가리고 있으니, 빨리 비키시오"
남들은 먼저 찾아가서 만나려는 당시 최고 권력자에게 햇빛을 가리지 말라고 호통치는 디오게네스의 태도는 그가 권력자에게 아첨하거나 구애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언젠가 알렉산드로스는 “만약 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이기를 바랐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도 전해진다.
또 언젠가 그가 강에서 컵을 이용해 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옆을 보니 어린 소년이 손을 이용해 물을 마시고 있는 것이 아닌가! 디오게네스는 그 소년을 보고 자신이 컵을 사용하던 것 조차도 부끄럽게 여기며 그 자리에서 자신이 사용하던 컵을 깨버렸다고 한다. 어떤 일화에서는 개가 물을 혀로 핥아서 먹는 것을 보고 컵을 부쉈다고도 하는데, 어떤 것이든 이 일화에서 디오게네스가 최대한 인위적인 문명을 거부하고 자연에 따라 살아가고자 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디오게네스는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니며 ‘진정한 사람’을 찾는다고 말했다고 전해지는데, 그가 보기에 세속에서 불필요한 돈과 명예에 허덕이는 인간들은 모두 거짓된 인간으로 보였을 것이다. 어느 날 그가 “인간들아!”라고 외치자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그는 사람들을 지팡이로 쫒아내면서 “내가 부른 것은 인간이지 쓰레기들이 아니야”라고 말했다.
열거한 디오게네스의 행동들은 반사회적이지만, 사회 속에서 자연스러움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보내고, 자연에 따라 살 것을 주문하는 디오게네스 나름대로의 '교육방법'이었다. 우리가 디오게네스에게서 배워야할 것은 만족하는 삶의 중요성이다. 문명은 인간의 삶에 편리함을 주었다. 대신 그 대가로 인간에게서 지금 이 순간을 만족할 줄 아는 태도를 박탈했다. 더 많은 돈! 더 많은 명예!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 이것이 극단으로 치닫자 우리가 살펴본 포스트휴먼 같은 존재까지 등장하는 것이다.
돈과 명예를 손에 넣어도 공허함이 찾아오곤 한다. 그래서 그 공허함을 채우려고 새로운 목적을 추구하지만, 그 과정은 행복하지 않다. 자연스러운 삶이란 미래에 담보잡힌 삶은 아니라, 매 순간 지금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한 번 뿐인 삶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그때야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 남들은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고, 야망을 가지지 않은 당신을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중요한 것은 여러분 자신이 훌륭한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너를 비웃고 있어"라고 하는 말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나귀가 똑같이 그들을 비웃지만, 그들이 당나귀가 하는 일에 신경 쓰지 않듯이 나도 그들이 하는 일에 신경쓰지 않아" 언젠가 한 젊은이가 철학을 공부하는 것을 보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좋은 일이야. 당신이, 몸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영혼의 아름다움에로 눈을 돌리게 하는 일은"
-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지음, 김주일 외 옮김,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1』, 나남, 2021.
“나 너희에게 위버멘쉬Übermensch 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는 사람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지금까지 존재해온 모든 것들은 자신 이상의 것을 창조해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이 거대한 밀물을 맞이하여 썰물이 되기를 원하며 사람을 극복하기보다는 오히려 짐승으로 되돌아가려 하는가? 사람에게 있어 원숭이는 무엇인가? 일종의 웃음거리 아니면 일종의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이 아닌가. 위버멘쉬에게는 사람이 그렇다. 일종의 웃음거리 아니면 일종의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이다.”
- 니체 지음, 정동호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2016.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위버멘쉬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초인 또는 극복인이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니체가 구상한 새로운 인간을 지칭하는 용어다. 니체가 포스트휴먼 같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나타난 새로운 인간을 위버멘쉬라고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니체의 글은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잘 보여준다. 니체는 인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인간이란 짐승과 위버멘쉬(초인) 사이를 잇는 밧줄, 심연 위에 걸쳐 있는 하나의 밧줄이다."
밧줄의 앞에는 포스트휴먼이, 밧줄의 뒤에는 디오게네스가 있다. 중간에 선 여러분에겐 선택권이 있다. 앞으로 가는 것도, 뒤로 가는 것도 심지어 그 자리를 고수하는 것도 여러분의 판단에 달렸다.
[과제]
여러분이 생각하는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서술하시오.
트랜스휴머니즘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자신의 의견을 밝히시오.
[참고 문헌]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김재홍 외 옮김, 『니코마코스 윤리학』, 도서출판 길, 2016.
Aristotle, 『Works of Arisotle』, Richard Mckeon(편), 데자르뎅 지음, 김명식 김완구 옮김 『환경윤리』, 연암서가, 2017.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김재홍 옮김, 『정치학』, 도서출판 길, 2017.
르네 데카르트 지음, 이현복 옮김, 『방법서설』, 문예출판사. 2022.
피터 싱어, 김성한 옮김, 『동물해방』, 인간사랑, 2006
신상규 지음, 『호모 사피엔스의 미래』, 아카넷, 2014.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호모 사피엔스』, 감영사, 2023.
니체 지음, 정동호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2016.
톨스토이 지음, 윤세한 엮음,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삼여출판사.
이왕주 지음, 『쾌락의 옹호』, 문학과 지성사, 2001.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지음, 김주일 외 옮김,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1』, 나남, 2021.